CN드림 캐나다 앨버타주 1등 신문

라이프

자유게시판

시비거리를 가지고 시비를 걸어야지..

작성자 clipboard 게시물번호 20311 작성일 2026-09-30 18:33 조회수 67

영화 암살자(들) 때문에 한국이 발칵 뒤집어진 모양이죠? 

 

역사왜곡이니 패륜이니 뭐니하며 출연배우(유해진)가 나왔다는 버거킹 불매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하는군요.   

 

세상에 가장 잘못 알려진 사건 중 하나가 1974 년 광복절에 벌어진 국립극장 총기난사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 두번째 부인 육영수 씨의 인격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이상한 것은 다른 사건들은 세월이 지나면 사실에 가깝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두 가지는 그렇지 않고 사람들의 뇌리에 잘못 각인된 채 흐지부지 관심에서 멀어져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제가 15 년 전 씨엔드림에 쓴 글이 있어요. 

링크 할까하다가 원문을 그대로 가져와 봅니다. 

 

내가 영화를 아직 안 봐서 평론은 쓸 수 없는데, 

이 글을 보시면 왜 이 영화 제목이 암살자도 아니고 암살자들도 아닌 암살자(들)인지 약간 이해가 되실 겁니다.  

 

앞 부분 군더더기 빼고 올립니다. 

 

당시 글 제목은 ‘병역미필 저격수의 귀신같은 사격솜씨’

 

================

 

…… (전략) ….그렇다면 나는 1974 년 8 월 15 일 역시 개인적인 특별한 날짜로서 기억하고 있는가? 

 

물론 기억하고 있다. 이 날은 외할머니가 외삼촌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날이었다. 따라서 부모님을 따라 김포공항으로 외할머니 전송을 나가야 했다. 그런데 나는 아침에 가족들 몰래 혼자 집을 빠져 나와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 날 대한민국 사상 처음 생긴 지하철을 타보기 위해서였다. 

 

그날 개통된 지하철 구간은 서울역에서 청량리까지 제 1 호선 구간이었는데, 그때는 1 호선이고 뭐고 그 구간이 전부였다. 

 

Anyway…… 오스카의 생일처럼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날 아침 10 시 20 분. <8.15 광복 제 29 주년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던 서울 중구 장충동 소재 국립극장 안에서 일곱 발의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그 일곱 발 중 네 발은 문세광이 발사했다. 

 

문세광은 일본여권을 소지한 만 23 세의 재일교포였는데, 나중에 수사검사 정치근 씨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자칼의 날을 통독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자칼의 날을 통독했다는 문세광의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작전은 소설 속에서 샤를르 드골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는 전문적인 살인청부업자 자칼하고는 처음부터 영 그 모양새가 달랐다.   

 

우선 그는 저격용 권총을 구입하는데 실패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격용 권총을 구입하는데 실패한 게 아니라 문세광은 애당초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던 게 분명했다. 

 

저격용 권총이라면 최소한 브라우닝 반자동 피스톨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사용한 권총)이라든가 콜트 45 구경 정도는 되어야 명중률과 치사율을 어느 정도 보장 받을 수 있는데, 그는 그런 권총을 하다못해 암시장에서라도 구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사카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발견한 어느 파출소에 들어가 웬 구닥다리 권총 한 자루를 훔쳤다. 

 

일본의 어느 엉성한 파출소가 그 날 문세광에게 도둑맞은 권총은 스미스웨슨 38 구경이었는데,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유명한 반전영화 디어 헌터에 나오는 러시안 룰렛 게임에 등장하는 그 크고 묵직한 리볼버를 말한다. 

 

문세광은 그 묵직한 권총을 허리에 차고 서부활극에 나오는 총잡이 흉내를 내며 숙소인 중구 소공동 소재 조선호텔을 나섰다. 그는 <서울 2바 1091> 포드 20 M 을 타고 국립극장 정문을 통과했다. 고급승용차 뒷자리에 앉아 정문을 통과하는 스물 세 살짜리 청년에게 외곽경호임무에 투입된 서울시경 소속 경찰관은 힘차게 거수경례를 올려 부쳤다. 

 

입구에서도, 극장 안에서도 비표조차 달지 않은 이 청년을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탕탕탕탕탕탕탕 청년이 기념식장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30 여 분쯤 지나 일 곱 발의 총성이 수 분에 걸쳐 식장 안을 뒤 흔들었다. 

 

이 날 기념식장 안에서 울린 총성은 모두 한 종류의 권총에서 발사된 것이었다. 저격범 문세광과 역시 권총을 발사한 경호원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권총인 스미스웨슨 3.8 구경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대목을 떠 올릴 때마다 덴젤 워싱턴이 주연한 영화 인사이드맨이 생각난다. 뉴욕 맨하튼 월스트리트에 있는 한 은행이 무장강도조직에 순식간에 장악되는데 범인들이 인질들에게 자기들과 똑 같은 옷을 입혀 범인과 인질의 구분을 사라지게 함으로서 완전범죄를 가능하게 만드는 그 영화……   

 

이 날 녹화된 비디오를 보면 두 번 째 총성이 나고 나서 연단의 모든 사람들이 혼비백산해서 비호처럼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은폐-엄폐물이 거의 없을 것 같은 연단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순식간에 어디론가 싹 숨을 수가 있었는지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어안이 벙벙할 정도다. 박정희 대통령은 연단 아래로 몸을 낮추었고 다른 요인들은 의자 뒤에 숨거나 꿩처럼 의자 밑으로 머리를 처 박기도 했다. 

 

단 두 사람 예외가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씨가 그 때까지 그대로 자리를 지키며 앉아있었고, 박종규 경호실장이 연단 앞으로 뛰어나와 관객석을 향해 마구 권총을 난사했다. 

 

‘마구 권총을 난사했다’는 내 표현은 그가 발사한 것이 분명한 탄환 중 하나가 저격범인 문세광의 위치와 전혀 다른 각도에 있었던 성동여상 합창단원 장봉화 양 (당시 17 세)를 맞추어 쓰러뜨렸기 때문이다. 장봉화 양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피스톨 박이라는 별명이 붙은 박종규 경호실장은 졸지에 벌어진 상황에 당황에서 오발을 했다고 쳐도, 저격범 자칼 문의 권총저격솜씨는 요인암살비사에 뒷담으로 기록될 만큼 황당했다. 이 청년이 소지한 리볼버에는 다섯 발의 탄환이 장전되어 있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뛰어나가면서 권총을 꺼내다 방아쇠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자신의 허벅지에 첫 발을 발사하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문세광이 발사한 탄환은 약실에 남아있던 한 발을 제외하고 모두 네 발이었는데 아까 말한 대로 첫 발은 자신의 다리를 맞추었고 두 번 째 탄환은 단상에 맞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두 발을 더 발사했다. 문제는 세 번 째 총성부터 일곱 번 째 총성까지는 누가 발사한 총에서 난 총성인지 순서를 가늠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녹화된 화면을 보면 육영수 씨는 세 번 째 총탄에 머리를 맞은 것으로 확인된다. 문제는 사건 직후 청와대 경호실에서 모든 탄피와 탄환을 수거해 가버리는 바람에 육영수 씨가 누가 쏜 총에 맞은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게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저격사건이 엄연한 형사사건이니만큼 현장은 검사 지휘아래 수사관할구역의 경찰 감식반이 도착할 때까지 보존되어 있어야 하는데 사법-수사기관도 아닌 청와대 경호실이 가장 중요한 증거물인 탄피와 탄환을 수거해 가는 바람에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은 현장에서부터 벽에 부딪혔다. 명백한 증거인멸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당시 현장감식에 참여한 이건우 서울시경 감식계장 (작고) 는 사건 후 15 년이 지난 1989 년 9 월 <월간 다리와의 인터뷰에서 “육여사는 문세광의 총에 의해 죽은 게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했었다. 

 

육영수 씨가 문세광의 총에 죽었다는 증거도 없지만 그가 쏜 총에 죽지 않았다는 반증도 찾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 그는 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이건우 경감은 33 년 베테랑 수사관만이 감지할 수 있는 확신에 가까운 의혹으로 이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베일에 싸인 문제들을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1 년 전에 발생한 DJ 납치사건 이후 수세에 몰려있던 한국이 문세광 사건 이후 대일관계에서 그 수세를 극복하고 일거에 공세로 전환한 정황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한일관계에 있어서의 딜레마 뿐 아니라 1974 년은 박정희 정권이 연초부터 긴급조치를 잇달아 선포해야 할 만큼 정권위기가 고조되었던 해이기도 했다. 

 

정권위기는 야당이나 재야의 반유신투쟁 때문이 아니라 권력내부의 균열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 년 벌어진 윤필용 사건 이후 육사 11 기 이후 기수의 군부내 사조직인 하나회와 대립함으로써 스스로의 권력기반이 위험할 정도로 흔들렸던 시기도 이 때였다. 그러나 이런 부분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언급은 쓸데없는 주제확산의 위험이 있으니 이 글에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다.             

 

이 날 총잡이 문세광이 국립극장에 타고 들어간 고급승용차 포드 20M 에 달린 <서울 2바 1091>는 위장번호판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위장번호판을 단 차량을 운용하는 곳은 당연히 정부기관인데, 청와대, 중앙정보부(현재의 국가정보원), 내무부 치안국 (현재의 경찰청) 국세청, 검찰 같은 권력기관이나 사찰기관뿐이다. 

 

이 재일교포 청년은 당시 한국 수사기관의 발표와는 달리 조총련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일본 수사기관에 의해 밝혀졌고 오히려 친한단체인 재일거류민단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도대체 이 청년의 정체는 무엇일까? 

 

37 년이 지났는데도 (이제는 52 년) 그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그 날 비명에 유명을 달리한 육영수는 49 세였다. 큰 딸 근혜는 22 세였는데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에 다니다가 프랑스에서 유학 중에 어머니가 피격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었고, 둘째 딸 근영 (서영으로 개명) 은 20 세로 서울대학교 작곡과에 다니고 있었다. 막내 지만은 16 세로 중앙고등학교 1 학년 학생이었다.

 

육영수 씨는 어디선가 날아 온 총탄을 머리에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한 게 아니라 종로구 원남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으로 후송되어서 뇌 절제 수술을 받고 난 후 그 날 저녁 운명했다. 

 

옛날에 박목월 시인이 쓴 책 ‘육영수 여사’에서 육영수 씨가 운명하던 시간, 그 날 내내 흐리고 비가 내리던 서울 하늘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갑자기 광채 같은 게 서울 상공을 뒤덮었다는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나는 당시 서울 하늘에서 전혀 그런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아무튼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생전의 인연들은 누구였을까? 

 

말썽꾸러기 막내아들의 얼굴과 함께, 아마 1950 년 12 월 12 일 이래 24 년 간이나 의 연을 끊고 살다시피 한 그녀의 아버지 아니었을까? 

 

이 사건의 내막이야 무엇이건…… 그 날 이후 박정희 씨는 무너졌다. 흐르고 있는 이 노래의 어느 가사 대목처럼…… 

 

2011-06-30 (MST 17:00) clipboard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