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묵상, 명상 그리고 무심
Beeho
오늘날 서양은 과학적 연구와 발명 그리고 기술적 발달로 그것을 정확히 표현하는 많은 언어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양에는 그런 말들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적 경험에 관해서는 동양의 언어들이 서양의 언어보다 절대적으로 풍부하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마음을 초월하는 상태, 생각의 흐름을 초월하는 상태를 산스크리티어로 디얀(dhyan)이라고 한다. 영어에는 이것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다.
이와 비슷한 단어만이 있을 뿐이다.
즉 디얀과 비슷한 의미의 영어 단어들이 내가 알기로는 세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집중(concentration)으로, 이것은 가장 낮은 차원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 을 한 가지 생각이나 한 가지 사물에 대하여 계속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집중은 과학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사실 집중이 없으면 과학은 절대로 성립되지 않는다.
과학은 이 집중의 산물이다.
두번째는 묵상(contemplation)이란 단어이다.
묵상은 집중보다 약간 높은 차원이다.
묵상은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한 가지 생각이 아니라 생각의 흐름을 동일한 주제에 묶어 두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빛에 대해 생각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빛의 속도와 질량과 일곱가지 색깔과 빛이 가진
모든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을 계속 한다. 이것이 바로 묵상이다.
과학이 집중해서 나오듯이, 철학은 묵상에서 나온다.
세 번째는 명상(meditation)이란 단어다.
명상은 묵상 보다 더 높은 차원이다.
그러나 명상은 디얀을 중국어로 음역한 찬(chan), 일본어로 음역한 젠(zen)과는 여전히 동격이 아니다.
디얀은 무심(無心)을 의미한다.
집중할 때는 마음이 집중하는 것이다.
묵상할 때도 마음이 묵상한다.
그래서 묵상할 때나 기도할 때 온갖 잡다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하나의 병이기 때문이다.
명상도 마찬가지다. 명상도 마음이 명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디얀에서는 마음이 사라진다. 디얀은 마음을 초월한 상태이다.
디얀은 생각의 흐름을 초월한 상태이다.
디얀은 마음을 넘어선 침묵이요, 무심(無心)이다.
영어에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디얀을 대신할 단어가 없다.
틀렸습니다. \" 선: 불교에서 중시하는 법으로서 명상으로 심신을 통일하는 것.
....선정(禪定)의 약칭이다. 앉아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잡념을 떨쳐내어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법(坐禪)으로\" 쎄칸컵님이 지금 올린 이 글에서 아주 중요한
오류가 있습니다. 무엇이 틀렸을까요? 내가 다시 쓴 \"연꽃과 진흙\"이란 글에
답이 있습니다. 님이 올린 선에 대한 정의는 선의 선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정의 입니다. 마음은 하나의 병 입니다. 마음을 집중하면 할수록 절대로 무심(無心)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고타마 싯타르다와 그의 제자인 달마
의 가르침인 것 입니다.
위의 내용들은 비호님께 문제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의 사회화 과정, 역할, 실천에 대한 저의 개인적 관심이 선불교전통에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참다운 지성은 언어로 실현된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촘스키같은 우리시대의 지성인, 그런 분을 저는 진정한 선사라고 보죠.
어쨋든 님이 \'리바이벌\' 했으니 저도 제가 올린 글을 \'리바이벌\' 합니다.
추신: 그 틀렸다는 백과사전들을 수정해 주시와요. 저 말고 다른 사람이 틀린 거 인용 못하도록.... 부~탁~해~요!
요 아래에서 복사한 글:
제가 올린 글에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네이버(두산동아백과사전)/야후/다음 백과사전 그리고 위키백과사전(영문)에 나오는 내용이 오류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물안 개구리처럼 여기서 \'선의 정의\'를 논할게 아니라 네이버(두산동아백과사전)/야후/다음 백과사전 그리고 위키 백과사전에 나오는 선의 정의가 틀렸다고 주장하시니 그곳에 가서 \'느그들 사전에 나오는 선의 정의가 틀렸다.\'라고 알려주시기를 권합니다.
계속 멋진 글 올려주사와요^^
계속 좋은 글 올려 주세요.
언제나 즐감하고 갑니다.
밑에 임제선을 제가 잠시 언급하면서, 임제종의 부정적 측면 감히 말씀드린바 있는데요...
문제는 화두선이라는 것이 중국 선종에서 마치 목적인양 취급되었다는 점입니다. 진정한 인간성과 평화를 깨닫고 실천하는 단계에서 성취해야할 하나의 방법론인데, 그것이 절대적 성취인 것처럼 여겨졌다는 것이죠.
과연 화두선과 선문답이 주는 영향력이 석가모니 당시와 같은 많은 실천의 모티브를 주었냐는 것이 저의 가장 큰 의문입니다...
결국 화두선이나 마음 공부에서 얻어지는 자타불이의 상태만이 마치 \'신성한 절대\'로 여겨진 것은 자비와 이타행의 실천이라는 불교가 가지는 종교적 가치를 스스로 무너뜨리게 된 중대한 오점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허나, 불교에서 분명히 이판과 사판을 구별하시는 것은 아는 분은 알고 계실 겁니다. 원래 이판승은 사회 참여를 하지 않고, 불교의 정신적 가치를 지키려고 애쓰시시며 선방에서 수행하는 분들로, 그 분들께 사회 참여의 기치를 세워보라는 것은 무리가 좀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선방 스님들로 인해서 동화되고 열심히 일하시는 사판승들과 불자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도하시다가 얻으신 깨달음, 혹은 그 분이 살아오신 족적, 그리고 매우 드물게 해주시는 가르침을 통해서 종교를 떠나 많은 이들이 동화되고 그러한 삶을 실천하고자 애쓰게 하는 그러한 인간내면의 참모습을 솔선 수범하신 모습은 부정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불교의 사회적 참여 문제, 여전히 많은 숙제를 안고 있지만, 그 좌선 및 간화선으로 인한 순기능과 그에 따라는 부수적인 종교적 현상들은 또한 결코 무시하기 힘들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불교가 진정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조사선-간화선이 어떤 식으로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을지는 다소 미지수인 부분이 있지만, 보살행을 중심으로 사회참여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과 행동에 임할 준비가 불교도들을 중심으로 더더욱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