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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계사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싸르니아는 뱀이 참 똑똑하고 깨끗한 동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뱀은 종교신화에 많이 등장합니다.
히브리경전 창세기에도 등장합니다.
그 경전에 따르면
원시시대 인간은
선과 악의 차이조차 알지 못했던
야만적인 존재였습니다.
어느 날 뱀이 인간의 자의식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인간은 뱀의 가르침에 의해 야만적 무의식의 세계에서
이성적 자의식의 세계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에덴’ 이라는 우물안을 뛰어넘어
세계와 자신의 관계를 인식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 입니다.
뱀 덕분에 인간은 드디어 이성적 자아를 도구로 삼아
영적 자아, 즉 ‘참나’를 추구하는 놀라운 일도 해 내게 되었습니다.
캄보디아 사원에서 뱀을 많이 보았습니다.
힌디 신화에 나오는 ‘나가’ 라고 합니다.
나가는 get out! 이라는 의미의 한국말이 아니고,
뱀이라는 의미의 고대 인도어라고 합니다.
뱀의 왕 바수키는
자기 몸을 밧줄삼아 천 년 동안이나 줄다리기를 하는
신들에게 독을 뿜었습니다.
싸르니아 수사본부가 재수사한 바에 따르면,
다수의 신이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사망의 원인은 독극물에 의한 질식사
사망의 종류는 wrongful death (타살)입니다.
나머지 신들은 모두 생식불능이 되어
대를 잇지 못한 채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뱀은 인간을 이성적 영적 존재로 만들어주고,
이성적 영적 존재가 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또 다른 이성적 영적 존재,,,,,,
숙명적인 천적 신까지 멸종시켜 준 셈입니다.
올해는 뱀의 해 입니다.
뱀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래도 종교게시판에 올려볼까하고 갔다가,,,
무서워서 이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수사본부 staff은 다 짤리지 않았나요? 뭐, 재개를 하셔도 종교방으로 좌천될 확률은 많지만요.
명리학에서는 한해의 시작을 그러니까 새로운 기(氣)의적용은
입춘(入春)부터라고 봅니다.
2월 4일부터 계사년의기가 적용되는것이지요.
뱀의 기운이라서 그런가 올겨울은 따듯합니다.
서울은 매우춥다는데............
사실 저는 종교방이 교회광고방인줄 알았었습니다.
연전에 자유게시판에 하도 교회광고가 자주 달리는 바람에 항의가 심하자
그 여파로 광고방이 분리된 줄 알았는데
들어가보니 종교토론방으로 운영되고 있더군요.
암튼 거기서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성도분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깜박 잊고 있었는데 고국 부모님께 전화 드렸읍니다
씨엔 드림에 오시는 모든 분들 복 많이 받으세요
동양의 제자백가들 사이에도 선악의 기준이야 있었지만 기독교 식으로 유일신에 대비되는 사탄이나 악마 같은 초자연적 존재는 없었지요. 가령 순자의 성악설도 악이란 게 \"예의를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라는 다분히 생활철학적 악이지요. -이 분야는 잘 모르는 분야인데 아는 척 해봤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인간이 자의식을 발견한 사건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겠지요.
어쨌든 저는 그 경전을 읽고 아 그런 이야기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가리켜 죄라고 한 역설적인 고대농담의 문학적 깊이가 참으로 대단한데,
그 고대인의 문학적 농담을 진담으로 여겨
자기가 진짜 원죄를 머리에 이고 사는 죄인인 줄 아는 일부 현대 사람들......
그 사람들이 경건하게 회개하는 장면이야말로 포복절도할만 하다고 하겠습니다.
저녁, 오후 5시 이후에는 커피를 마시지 말아야 하는데 잠자고 있어야 할 시간에 댓글 달고 있으니 오늘의 원죄는 '커피' 입니다. ㅎ
힌두교에서 악의 실재를 카르마와 삼사라를 통해서 설명하려 했던 반면에 유대기독교 문학은 죄라는 개념을 통해서 악의 실재와 부정의를 보았다는 점이 다르겠죠. 칼럼리스트 최성철 목사는 어거스틴의 원죄교리를 비판하셨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그것은 기독교 전통에서 나온 중요한 교리가 어거스틴에 와서 culminate 된 것이라고 봅니다. 해석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이것을 악의 근원적 깊이라고 보고 싶은데요.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는 다르겠죠. 그런 악의 문제를 신화적 표현을 한 것이 창세기 이야기이고 이런 것은 우리의 개인적 사회적 삶에서 반복되고 경험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이것을 종교적 담론이라고 오해하시지는 않겠죠. 며칠 전 Tim Blanning이라는 분의 [낭만주의의 혁명](The Romantic Revolution: A History](2010)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낭만주의의 발흥을 계몽주의가 제공해주지 못하는 부분인 초월적 공허 (transcendental vacuum)를 채우기 위함이라고 하던데 일면 공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계몽주의가 이성이라는 밝은 태양의 이야기라고 하면 낭만주의는 밞은 이성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감성(feeling)이라는 달의 음영을 말하는 것이겠죠. 낭만주의 음악가들이 달에 관한 작곡을 많이 했다는 것은 보면 이성의 명징성의 제국주의 아래서 어둡게 드리운 달의 음영(the dark side of the moon)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낭만주의 미술의 대가 Casper David Friedrich의 그림에서도 빛나는 태양조차도 흐릿한 음영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신화(뮈토스; mythos)는 이성(로고스; logos)과의 싸움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는 없지만 낭만주의의 음영에 드리운 우리의 내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같습니다. 뭐, 거한 이야기같지만, 낭만주의 시대에 신화수집이나 전설 수집, 그리고 자연을 살아있는 내적 자아로 표현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가끔가다가 잠못이루는 밤을 맞거나 깨어나 실존적 공허에 빠진다면 여러분은 낭만주의의 몸살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낭만주의는 시대적 조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이야기를 다시 엮고 싶어질 때는 언제든지 내 가슴속에서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든지 우리는 심한 마음살을 앓게 될테니까요. 이야기가 시작, 중간, 끝이 있듯이 우리는 이런 마음살을 통해서 새롭게 시작, 중간, 끝의 플롯을 만들어갑니다. 아, 이렇게 한해가 많이 갔구나, 한 것없이.
낭만주의자인 여러분 모두는 자기만의 신화(personal myth)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만은 아니고 이야기 심리학자 Dan MaAdams도 한 이야깁( The Stories We Live by: Personal Myths and the Making of the Self)니다. 어쨌든 ㅋ. 횡설수설...저도 잠자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