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각 사람은 독특하게 하느님/하나님/한울님 을 섬깁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의 신앙과 사상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 가지가 영원히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따라서 신학과 신앙은 시대에 따라서 진화하고 발전하는 것이 온 인류를 위해서 건전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종교는 다른 종교인들과 다른 인종들과 다른 성적본능자들을 공평하게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과 생태계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촌의 모든 생명들이 건강하게 안전하게 평화스럽게 살아가는 길을 건설하는 것이 종교의 기능입니다. 저는 이 정신을 역사적 예수에게서 배웠습니다. 예수의 하느님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분하여 심판하는 하느님, 선한 일과 전도를 해야 축복과 보호를 제공하는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1700년동안 교회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을 떠나 이분법적인 하느님을 만들었고 이것으로 사람들을 통제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런 하느님'을 믿을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제가 믿고 싶은 하느님은 인종과 종교와 성차별과 성적본능을 넘어서는 우주적인 하느님, 조건없고 비이분법적인 하느님, 외부에 타자로 있지 않고 나의 내면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영적실재입니다.
저의 글에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에게 직접 답변을 드리지 않고 이렇게 일반적인 글로 답변 드리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내가 거기에 매몰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길러라는 것이죠. 보통 종교현상에서 전통종교(세계종교)와 신종교(현대종교)라 나뉘는데, 별 희한한 종교가 다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실재는 종교라는 한 현상으로 환원할 수는 없고 다양한 문화적 환경과 교류를 통하여 협력하기도 하고 발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때는 비슷한 점도 많습니다. 혹시 시간이 되면, 캘거리의 NW 16 Ave. 근처에 유리테리언 교회에 가보세요. 아주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유니테리언들은 삼위일체나 예수의 신성을 믿지 않거든요. 여호와 증인들도 좀 다른 맥락에서 예수의 신성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와 다른 실재를 만났을 때, 다름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과 같음을 비교해 보는 쏠쏠한 재미도 있습니다. 늘봄님의 사상은 일면 유니테리언 종교와 상당히 오버랩됩니다. 그러니 유니테리런을 보면 늘봄님이 좀 보일 수도 있습니다. 비교론적 시각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늘봄님께서 책으로 비즈니스 하시는 것도 아니고, 씨엔드림에 칼럼도 쓰시고, 또 이 게시판의 사랑방 손님이신데, 그래도 온라인 친구가 아닙니까? 본인의 사상과 신념을 피력한 책이 나왔으면 사서 보지는 않을망정 책장사한다고 하시면 좀 심하지 않나요? 늘봄님의 사상은 David Gil님의 사상과 비교하면 대극(opposites)의 두 점에 있는 것같은데, 이러한 대극적 다름은 서로 신선한 자극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강남교수의 [예수는 없다]라는 책이 나왔을 때, 읽어보지도 않고 비난한 보수교회 교역자들이 많았습니다. 늘봄님께서 은퇴를 한 다음에도 열공을 하시는 모습은 나이의 후배들이 많이 배워야겠죠. 늘봄님께서 “저는 \'그런 하느님\'을 믿을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고 하신 발언은 본인의 믿음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고 용기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학적으로는 신학의 영역이고, 개인적으로는 고백의 영역이라고 봅니다. 오강님 교수의 [예수는 없다]는 사실, “그런 예수는 없다”를 짧게 표현한 것이었는데, 저는 그것이 신학적 발언이라고 보구요. 저는 종교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그런 예수도 있고, 그런 하나님도 있다는 입장입니다. 종교학자 정진홍교수는 고백의 언어(신학)과 인식의 언어(종교학)을 구분하셨는데, 새로운 신학적 사조에 놀랄 필요는 없고, 종교적 실재를 비교론적으로, 유형론적으로 보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늘봄님은 고백의 언어로 발언하신다고 볼 수 있겠죠.
ㅎ, 그런데 이 게시판은 이른바 종교게시판이 아니라 세속세계의 게시판이라 보수복음주의적 고백의 언어가 나오면 상당한 저항을 받을 겁니다. 단 한가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회적 규범, 즉 다문화, 다양성, 소수자존중, 열린마음을 들고 나오면 별 저항이 없을테지만요. 그런데 한국개신교의 현실은 그 정반대니 고민되죠. 그런데 보수복음주의의 메시지는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니 교회안에서만 만족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아래 게시판에서 독재자 하나님이라고 제가 말씀드렸는데, 현개신교의 이데올로그들, 즉 목사들이 생산해 내는 하나님은 대부분 독재적인 신관입니다. 히브리 성서와 크리스챤 성서는 분명히 폭력적인 메시지를 많이 담고 있고 또 분명히 평화와 관용의 메시시도 담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메시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것이죠. 성서라는 고대 문서에 대한 교리적 진화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요즘 노예제를 찬양하는 개신교 보수주의자는 거의 없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와 사회의 교호작용, 즉 종교문화인 셈이죠. 문창극 장로의 교회에서의 발언이 얼마나 사회적 파장이 컸는지는 다 알 것입니다. 종교가 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것은 아니지만, 개신교의 종교적 담론은 교회라는 성안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고립되어 있습니다. 가끔 나오는 빤스망언과 세월호 망언 빼고는요. 저의 주장은 최소한 교회밖에서의 기독교적 발언은 이 게시판을 포함해서 일반 독자들이 수긍할 만한 사회적 규범을 담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의 사회화 과정의 일부겠죠. 저만 말만 많이 하고 갑니다. 그럼, 실례가 많았습니다.
늘봄님께서 "다른 성적본능자"라는 용어를 쓰셨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다른 성적 지향성을 가진사람, 또는 성적 소수자라도 해야 하지 읺을까하는 생각입니다. 같은 성을 가진 사람에게 성적매력을 느끼는것은 본능일 수도 있고,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이 구분은 스펙트럼이라 fuzzy합니다. 만일 "다른 성적본능자들"이라고 하면 마치 선천적으로 같은성에만 매력을 느끼는 분들만을 포함하게 되므로 바이섹슈얼이나 선택에 의한 게이/레스비안들을 제외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인권은 그 생물학적 기초에 관계없이 완벽히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죠. 이런 의미에서 성적지향성이 다른 사람들, 또는 성적소수자로 지칭하는데 맞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http://m.movie.daum.net/m/magazine/film/detail.daum?thecutId=9793
마지막 네번째 것은 못봤습니다.
3. 전 세계가 극찬한 러브 스토리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4)
는 그런 성의 문화적 요소를 리얼하게 잘 다룬 것같습니다. 이것은 성정체성의 문화적 요인과 관련되는 문제를 잘 다루고 있다고 봅니다. 사실 \"나의 성적 지향\"이 어떤 것인지는 살면서도 잘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죠.
좀 graphic 해서리...
이것은 늘봄님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지난 1700년동안 교회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을 떠나 이분법적인 하느님을 만들었고 이것으로 사람들을 통제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런 하느님\'을 믿을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라는 말씀은 상당히 파시스트적 발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