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서 댓글을 다신 곳에 질문을 하려다 원문에 적합하지 않은 내용이라 따로 올려 봅니다.
저는 교회는 나가지 못하지만....아니 게을러 안나가지만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늘 갖고 살고 있습니다. 다만, 타 종교에 대해서도 제 3자의 입장에서 중립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도 직접 신을 만난 사람은 없고 객관적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일이 아니니까요. 각자 개인의 믿음에 따라 살다 이 담에 죽고 나면 알게 될 것이라는 생각 입니다. 따라서 신에 대한 인간들의 평가나 주장이나 학문적인 지식은 어쩌면 무척이나 허황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각설하고,
얼마 전부터 저는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고 또는 인터넷을 통해 듣고 있는데 법륜스님께서 말한 것과 같이 구약 시대의 하나님은 심하게 이야기 한다면 잔인할 정도로 징벌하는 하나님, 그리고 몇몇 자신을 따르는 자들 외에는 벌레만도 못하게 인간들이 취급 받는 듯한 느낌을 받고 상당히 실망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고 전혀 다른 존재였습니다.
구약과 신약에 대한 법륜스님의 평가에 대한 아프리카님 또는 기독교의 다른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종교에 대해서는 어린 아이 만큼도 못한 지식이나 신앙을 가진 저나 비슷한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치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캐나다에서 삶을 만족하고 조용히 평정심을 갖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피곤하고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것이지만 이 것은 편을 가르고 언쟁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이 됩니다.
레이크싸이드 올림.
신의 고향은 어디인가?
https://www.youtube.com/watch?v=X5KaoCt_Azg
다원사회 속의 기독교 - 정진홍교수 (2008/10/16)
https://www.youtube.com/watch?v=MV40SdU_KTI
종교 읽기와 종교 짓기: 종교연구의 미로 (정진홍 교수)
https://www.youtube.com/watch?v=zBt5zXorU2w
구약(히브리성서)과 신약에 대한 기독교의 수용은 맞는데 상당히 고민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생물학자 리챠드 도킨스는 [The God Delusion]이라는 책을 써서 성서(특히)속에 잔인한 구절을 지적하고 있고, 죤 샐비 스퐁이라는 진보적인 신학자이자 교역자는 [The Sins of Scripture: Exposing the Bible\'s Texts of Hate to Reveal the God of Love]라는 책으로 성서의 증오구절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타종교나 무신론자들에게 증오감을 표출하는 것은 바로 성서의 끔찍한 메시지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역사가이지 종교학자인 필립 젠킨스는 [Laying Down the Sword: Why We can’t Ignore the Bible’s Violent Verses]라는 책에서 성서의 증오구절을 단순히 은유적으로만 읽어서는 극복할 수 없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상당히 온건한 분이신데 이번에 중요한 책을 썼습니다. 영어책만 이야기 해서 죄송합니다.
사실 증오표현은 구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많습니다. 이러한 구절 때문에 이른바 진보적인 기독교에서는 3년 주기의 성구집(lectionary)을 만들어 이것을 주로 본문으로 삼아 교회에서 설교를 합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성서 자체가 부족사회나 기원전후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를 반영한다는 것이죠. 전에 이 게시판에 언급한 바가 있는데, 고정된 성서, 고문서인 성서를 극복하는 방법이 바로 교리의 발전이었습니다. 이야기로서의 성서와 교리가 서로 보완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서를 개작해야 되지만 아직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교리적 발전을 통해서 시대가 흐르면서 기독교나 유대교는 부족적 마인드에서 벗어나 타자이해와 평화의 기독교로 발전되고 있다고 봅니다. 유대교의 대표적인 사상가라면 잘 아시겠지만, 레이크사이드님 세대나 저의 세대가 잘 알고 있는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또는 [나와 당신]이라는 책이 있고, 기독교로 보면 연세대 교수였던 철학자 김형석 선생님의 [사랑과 영원의 대화]같은 책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을 떠난지가 좀 되서 이에 관련된 한글책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은 이러한 기독교의 한계를 강하게 비판한 책이 종교학자 오강남 선생님의 [예수는 없다]가 있습니다. 이 책은 종교학적인 책이라기보다는 진보적 기독교인으로 쓴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흔히 말해 일반 교회에서 접할 수 없는 새로운 예수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누구한테 빌려준 것같은데 수배하면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 종교를 비교하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은 오강남 선생님의 [세계종교둘러보기]가 있습니다. 이 책도 누군가에게 빌려 줬는데 수배하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강남 교수님은 리자이나 대학에서 종교학을 가르치시고 지금은 명예교수로 계십니다.
오강남 선생님의 강의도 한번 들어 보시구요.
오강남 - 표층신앙과 심층신앙 [하남풍산교회 강의]
https://www.youtube.com/watch?v=Mec7zZ-GSVU
* 오강남 선생님의 신앙적 옛고향 안식일 교회에서 강연하셨네요. 와! 보수적인 안식일 교회도 대단합니다.
또한가지 에드먼트 교민 최성철 목사님의 [깨달음의 하나님]을 추천합니다. 기존의 전통적 기독교 사상과는 매우 다른 진보적인 생각을 담고 있으며 글도 평이한데다가 유려하게 잘 쓰셔서 읽는이가 편안하게 읽을 수 있지만 새로운 도전을 많이 받으실 수 있을 겁입니다. 최근에 또 책을 내셨는데 씨엔드림이나 늘봄님께 연락하시면 구해보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깨달음의 하나님]은 제가 갖고 있구요. 우리 교민사회에 최성철 목사님처럼 기존틀을 깨는 분이 계신 것도 축복입니다. 제가 늘봄님과 티격태격하는 것은 토론을 하자는 것이지 다른 뜻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에게 배움을 주는 분은 누구나 스승이니까요. 저는 최목사님과 대화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오히려 많이 공부했다고 봐야겠죠. 최목사님도 캘거리와 에드먼튼에서 강연을 여러번 하셨는데, 어떤 단체와 관련되지 않고 오로지 당신의 신학사상을 나누고자 이런 신학운동을 하시는 것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최목사님은 오강남 선생님의 정신적 제자이자 벗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위에 추천한 동영상이나 책을 구태여 보거나 읽으실 필요는 없지만 종교에 대해서 알려면 가끔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들으면 도움이 많이 됩니다. 앞으로 대화를 통해서 종교에 대해서 서로 지평을 넓혀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종교를 하나만 가져서 기독교인이 돌 수도 있고, 불교인이 될 수도 있으며, 기독교인과 불교인이 동시에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긴 하지만 때론 불교인적 생각도 많이 하고 때론 무당이 되고 싶을 때도 있고, 때론 무신론자가 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제 첨에 언급한 정진홍 선생님의 책 중에서 비교적 평이하고 그동안의 저작이 녹아있는 [하늘과 순수와 상상: 정진홍 교수의 종교문화 읽기]가 있습니다. 이 책은 제가 갖고 있구요. 정선생님은 기독교인이지만 종교현상학자시죠. 이분의 강연이나 책에서 현상학적 거리와 긴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분 중의 한분이십니다. \"타 종교에 대해서도 제 3자의 입장에서 중립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하신 레이크사이드님의 말씀처럼 긴장을 주는 분이시죠. 제대로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앞으로 좋은 대화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올림
그리고 성경을 읽다 보면 예수가 탄생하는 과정은 있지만 성장과정이나 성인이 되어 제자를 두기 이전 까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왜 없는지 그리고 신약을 읽다 보니 시간적으로 중복 되거나 또는 순서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전에 생각했던 것 처럼 방대한 양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저는 어려서 부터 교회에 나갔지만 사실 성서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유치한 질문일지 몰라도 용감하게 여쭤 봅니다.
그리고 공관복음서와 완전히 다른 독립적인 요한복음서가 있는데, 이것은 예수에 대한 철학적 형이상학적 진술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제일 후대에 쓰여진 것이죠.
복음서상에 모순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은 서구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성서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그런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이죠. 요즘은 이 부분은 매우 정교하게 발전되었습니다. 이러한 성서비평학을 인정하지 않은 보수교회에서 수십년을 다녀도 성서의 모순에 대한 공부를 할 기회가 없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대한 간략한 정리는 아래 일전에 제가 이것 저것 배껴서 참고한 것 참고 하시고요.
http://www.cndreams.com/cnboard/board_read.php?bIdx=1&idx=4847&category=&searchWord=내사랑아프리카&page=3
레이크사이드님, 바로 그런 의문속에서 성서에 대한 지식도 증가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예수탄생설화(이야기)를 비교해 보세요. 서로가 없는 부분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교집합을 해보면 재밌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의문을 갖고 계신 겁니다.
물론 신앙은 신학은 아니며 우리가 살면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신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니니안 스마트라는 종교학자는 종교에는 종교에는 적어도 6개 차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experiential, mythic, doctrinal, ethical, ritual, social dimensions. 어쩌면 종교는 생활입니다. 옛날 저의 할머니가 정한수를 떠놓고 제 생일날 저의 안녕을 빌어 주셨는데, 이것에 \"종교\"라는 개념이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그냥 생활이었죠. \"종교\"라는 개념이나 기독교, 불교, 이슬람 등등의 분류는 근대이후입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하든 결과(consequences)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삶의 절차에 우리의 운명도 함께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천국이 있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도 아름답고, 신앙을 갖지 않으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무신론자들이나 불가지론자들도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레이크사이드님께서 지적하셨듯이, 종교가 과학과 싸우면 백전백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삶의 의미를 갖고 싶고 그런 의미가 영원하길 바라는 소망은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종교학자는 이것을 \"낙원에의 향수\"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과학과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유물론적 과학적 세계관이 좋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고, 과학 그 이상을 넘어 형이상학적 삶의 의미 또는 영속성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그 나름의 삶의 구성(construction)입니다. 나와 믿음과 사상이 다른 사람을 척결하겠다고 십자군 운동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종교를 척결하겠다는 스탈린주의는 무신론에 기반하지 않았던가요? 빨갱이를 척결하겠다고 하는 한국 개신교도들도 좌우만 다르지 스탈린주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 스탈린주의죠. 저는 어떤 형태로든 좌나 우든, 사상의 자유나 신앙의 자유, 성적지향의 차이를 억압하는 행위에는 반대합니다.
신내림을 받아 무당의 삶을 살든, 사막의 수도원에서 삶의 오로지 한 뜻모아 신에게 봉헌하든, 종교가 문화의 핵심이라고 보든, 또는 그냥 진화의 부산물이라고 보든 그것은 실존적 삶을 사는 사람은 결단을 해야 하고, 그 결단은 항상 consequences가 있다는 것이죠. 결국, 삶의 아름다움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음악을 듣거나 차를 마시거나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지내는 행복, 그러나 운명에 저항할 수 없이 닥치는 불행이나 고통,그리고 고난. 이런 어쩔 수 없는 삶의 유한함에 나를 귀의할 대상이나 체계가 있다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세월호 유가족이 자녀를 나중에 하늘에 다시 만나고 싶은 소망이나 내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을 죽음 저편에서 해후하고 영원히 함께 하고 픈 소망은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실재가 아니겠습니까?
어제 추천하신 동영상 두편을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단순하고 아주 초보적인 사람에게는 조금 지루하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나 석가모니는 실존인물이라는 것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은 역사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탄생과정에 대해서는 누구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성경을 읽으면서 읽기 전보다 의문이 더 많이 생기는 것은 저만의 경우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번 어떤 분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누구나 다 쉽게 이해가 된다면 목사나 전도사가 왜 필요하냐고 자기처럼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야기는 끝이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면 예수도 한명 석가모니도 한명인데 왜 그렇게 많은 종파가 있는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심지어 이슬람교도 파가 있어 서로 죽이는 일까지 빈번히 일어나고 있으니 우리가 올바른 종교를 선택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일 것 같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저 나름대로 길을 찾는 노력을 하려고 합니다. 무작정 관광겸, 새로운 경험을 해볼 겸, 영주권 유지 겸 왔다가 이제는 이곳 생활도 안정되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저는 아직도 캐나다 방문 한국인의 마음으로 이곳에 있습니다. 올해는 2회에 걸쳐 총2개월이나 유급 휴가로 한국 집에 다녀 왔는데 그래도 아직은 한국이 저에게는 편하고 좋습니다.
친절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40여년 전 인천의 한 절에서 경내에 있는 게시판이라고 해야하나요?
하여튼 그곳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 남들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지만 우리에겐 사랑할 원수가 없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제가 평생 잊지 않고 이 글은 참 좋은 말씀이다 라는 것입니다.
역사학은 자연과학이 아니라 오직 역자적 자료 (문헌, 고고학적 발견물, 비석, 구전) 등에 의존하기 때문에 예수나 붇다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가능한 것이죠. 역사학의 기본은 일단 자료가 많아야 합니다. 자료 하나로는 안된다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그 자료를 교차비교해서 공통분모가 많을수록 역사적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죠. 자료가 100% 충족되지 않았다고 어떤 인물의 역사적 부재를 주장하려면 자연과학이 되어야 합니다. 불교문헌이나 기독교성서는 역사책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나 붇다의 부재 주장이 가능하지만, 그것은 학계 자체의 논의에 맡겨야 되구요.
종교안에 수많은 종파나 교파가 많은 것은 경전을 해석하는 차이 뿐만 아니라 지리적 언어적 환경이 달라서 그런 경우도 많습니다. 기독교의 경우,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성서의 정경화(canonization; 표준화) 때문에 이단이라는 개념이 나와서 수많은 종파가 나왔고, 불교는 그런 정경화개념이 적어서 기독교적 종파는 없지만, 불교의 각 종파마다 기본경전(핵심경전; 소이경전)이 다릅니다. 한국의 경우, 현재 조계종과 태고종이 주요 종파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오교 구산이 있었지만,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여러 종파가 통합되어 버렸습니다. 세종대왕도 이런 통폐합에 일조를 했습니다.
\" 남들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지만 우리에겐 사랑할 원수가 없다.\"는 좋은 말이지만, 종교가 좋고 나쁨은 사회적 실천속에서 증명되어야 합니다. 불교에서도 “원증회고”(怨憎會苦)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괴로움요. 개신교에서 천주교에서 이단이라고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존경받는 종교는 개신교가 아니라 천주교가 아닙니까? 어느 종교로 개종을 하든, 귀의를 하든 자기가 믿는 종교를 객관적으로 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경전을 열심히 파는 것도 중요하고, 열심히 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경전이 나온 배경을 공부하거나 각 종교의 역사적 과정을 공부해 보는 것도 신나는 일입니다. 가령, 개신교도들을 만나면 개신교의 역사를 거의 모르고 천주교도를 만나면 마찬가지고 불교도를 만나도 그 역사를 모릅니다. 역사가 종교 자체는 아니지만 역사적 과정을 공부하면 시야가 더 넓어지겠죠. 종교의 비교론적 이해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신학교나 불교대학에 세계종교나 종교개론은 필수로 가르쳐야 합니다. 요즘엔 보수적인 기독교학교도 세계종교 과목은 필수입니다. 언젠가 어느 개신교 교역자가 회교가 힌두의 한자어 표기로 알고 설교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Religious Literacy]라는 책이 있듯이 우리는 나외에 타자를 잘 모르는 경향이 있죠. 실은 그렇게 되면 나도 모르는데 말이죠. “하나만 알면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19세기의 종교학자 막스 뮐러라는 사람이 괴테의 말을 빌려 한 말입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갈등이 생기는 것은 자기의 신념이 절대적이라고 하는데서 옵니다. 실은 국가도 마찬가집니다. 세상에 국가란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2천년동안 국가 없이 살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역사는 8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민족과 국가는 동일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종교란 없습니다. 앞으로 기독교가 몇백년 후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마야/잉카가 사라지듯 말씀이죠. 한때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였던 조로아스트교가 명맥만 유지하고 있고, 한 때 기독교의 본산인 유럽의 교회가 텅비고, 한 때 불교국가였던 인도에 현재의 불교를 보십시오. 종교간의 갈등은 순수 종교적 행위라기보다는 보통 정치가 결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교국가 스리랑카에서 불교도가 아닌 이슬람교도면 살기 힘듭니다. 종교적 갈등은 이슬람에서 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 기독교가 예외가 아닙니다. 종교적 살륙은 늘상 religion and politics의 문제일 경우가 많습니다. 잘 모르지만, 저의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종종 종교와 관련된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lakeside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