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아래 죽으면 누가 천당에 갈 수 있나 제목 덧글 15번 질문을 위로 올렷습니다.
종교학과 기독교에 박식하시고 깊은 이해를 갖이신 두분에게 드리는 질문 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사실인 사건 입니까? 아니면 허구라고 판단하십니까?
늘봄님과 아프리카님에게 드리는 질문
작성자 prosperity 게시물번호 8363 작성일 2015-09-21 06:06 조회수 3545
저 아래 죽으면 누가 천당에 갈 수 있나 제목 덧글 15번 질문을 위로 올렷습니다.
종교학과 기독교에 박식하시고 깊은 이해를 갖이신 두분에게 드리는 질문 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사실인 사건 입니까? 아니면 허구라고 판단하십니까?
신학을 전공하면서부터 성서를 새로운 패러다임의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기적 이야기들은 마치 호우머의 오딧세이와 같이 신화적인 이야기입니다. 21세기에 고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기 보다는 현대과학과 우주진화에 기초하여 재해석해야 합니다.
저는 새로운 목회지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마다 교인들에게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예수가 몸으로 부활한 것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든 것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가 물 위로 걸어간 것을 믿지 않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온 것은 여러분들이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고 입술로 인정하도록 강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예수의 정신을 세상 속에서 몸과 마음으로 살아내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하고 싶으시면 제가 은퇴하기 직전에 일했던 \'임마누엘토론토한인연합교회\' 에 문의하시면 됩니다. 또한 그 교회 웹사이트(www.immanuelunitedchurch.org)에 제가 5년 동안 설교한 원문이 그대로 있습니다. 지금은 저의 신학과 동일한 목회자(정성민 목사)가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는 훌륭한 목회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임마누엘연합교회에서 설교한 것들을 종교칼럼 형식으로 바꾸어 지난 2013년에 일 년에 걸쳐 CN드림 신문에 칼럼으로 올렸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모아 책으로 발간했습니다.(\"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교회의 탄생: 믿는 하느님보다 더 소중한 깨달음의 참 인간\", 교보문고)
많은 힌국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몸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잘못된 구원론에 쇄뇌되어 있습니다. 이 교리를 문자적으로 관념적으로 믿는 것보다, \'지금 여기 현세에서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이웃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이라는 예수의 정신을 실천적으로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믿음의 핵심입니다. 또한 그렇게 사는 시간과 장소가 영원한 천국입니다. 천국은 내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오늘 하루에 있습니다.
저는 늘봄님보다 더 보수적인 교회 출신이었는데, 이런 보수교회와 신학을 탈출해서 이른바 진보적인 곳에서 폴 틸리히(Paul Tillich)라는 신학자를 만나 제 마음의 고향을 찾았습니다. 저의 신학석사 논문도 틸리히의 해석학적 방법론이었구요. 저는 틸리히의 위대한 책 [Systematic Theology]의 내용 한줄 한줄 거의 모두 동의합니다. 예수의 육체적 부활과 영적 부활을 문자적으로 믿기보다는 당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경험한 것, 즉 예수 안에서 경험된 새로운 존재(New Being)로서의 예수 경험이 제 경험입니다. 나중에 시카고 대학에서 틸리히는 종교학자 멀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와 함께 공동 세미나를 개설했는데, 그후 틸리히는 그가 젊다면 조직신학 책을 다시 쓰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엘리아데를 통한 세계의 여러 종교와의 만남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책 [The Future of Religions]에 나온 이 한마디 말에 엘리아데를 알고 싶어 종교학을 했고 종교학 석사논문을 엘리아데의 종교현상학에 대해서 썼습니다. 틸리히는 루터교 출신이고 엘리아데는 루마니아 정교회 출신입니다. 이들이 제시한 종교 상징론은 제 개인적 실존적 삶의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다시 신화론적 복음주의자라는 말을 좀 더 설명하자면, 유대/기독교 전통이 갖는 창조-타락-구원의 전통적 구조나 삼위일체교리를 상징으로 저는 받아들이는데, 틸리히와 같이 새로운 상황에서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해석학적 과제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신화적 구조가 아주 깊이 박혀 있어서 제가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무신론자로 갈 가능성은 현재로선 전혀 없습니다. 존재의 깊이에서 흘러나오는 존재에의 용기는 실존적 소외라는 위협을 극복할 수 있다고 틸리히는 말하고, 종교가 갖는 상징의 힘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인간성을 경험할 수 있다고 엘리아데는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불교도들이 불교 전통에서 삶의 의미나 깨달음을 갖는다면 그것은 그분들의 몫이지만, 저는 유대/그리스도교가 갖는 성서이야기와 그 신화적 구조가 좋습니다. 늘봄님과 달리,저는 모태신앙이 아닌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제 정서는 유교적, 샤마니즘적 정서도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그래도 그리스도교적 모델이 저한테 가장 맞습니다.
저는 우리가 원자료(raw materials)로서의 성서로 돌아가자면 돌아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성서는 2천년 전의 고대 문서입니다. 성서 텍스트는 그동안 업데이트 되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새롭게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성서는 지난 2천년 동안 축적된 교리와 신학의 발전, 그리고 현대 과학의 눈을 통해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틸리히나 엘리아데는 그냥 학문적 책이 아니라 저한테는 제 2의 성서입니다. 성서나 기도문 뿐 아니라 이러한 학문적 결과도 우리의 실존적 삶에 깊이 관여합니다. 캘거리를 방문한 적이 있는 가톨릭신학자 폴 니터 (Paul Knitter)는 [Without Buddha I could not be a Christian]이라는 자기 경험적 책을 썼는데, 이 책도 저한테는 제 2의 성서가 되었습니다. 성서 텍스트가 진화하지 않으면 교리나 성서이해는 진화해야 되니까요.
그런데 저는 보수 복음주의자들의 신앙에 고향의 향수같은 것을 느낍니다. 그들이 믿는 창조-타락-구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저한테 아주 맞는 신화론적 구조를 갖고 있거든요. 소설이 기승전결이 있듯이 우리 삶에도 기승전결이 있어서 저는 이러한 기승전결의 역사, 기승전결의 신화, 기승전결의 허구 사이를 오갑니다. 단순히 존재하는(exist) 것하고 우리에게 진짜로 경험되는 것(real)은 다릅니다. 구하라, 그러면 구할 것이요,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영적, 신앙적, 실존적 삶의 의미의 추구는 찾는 이에게만 옵니다. 묻지 않으면 대답이 필요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번영님께 저의 신앙적 신학적 답변을 한 것은 질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방문하는 공적 게시판에서 이런 개인적 사적인 답변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가령, 어느 정당의 정치적 선언보다는 정치비평이 바름직하듯, 어느 특정 종교의 신앙적 고백보다는 종교라는 현상에 대한 비평적 논의나 토론이 더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양해 말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올림
첫째, 흔히 종교학 하면 여러 종교를 두루두루 가르치는 것 같지만, 엘리아데의 상징론은 하나의 통합된 형태로 종교적 상징의 구조와 의미를 누구보다 깊이 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종교현상의 구조와 의미를 캐는 것이죠. 그래서 신학책만 보면 하나밖에 모른다르는 말이 맞습니다. 서양철학을 관통한 틸리히가 말년에 전무후무의 대작 [조직신학]이라는 대작을 써 놓고도 세계종교를 만난 후 다시 쓰고 싶다고 한 말이 이해가 갑니다.
둘째, 늘봄님께서 성서비평학을 말씀하셨지만, 보수교회 교역자들은 성서비평학을 고등비평이니 문서설이니 해서 평가절하하지만, 일단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이면 마치 이야기의 바다를 항해하듯 새로운 세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신이 있니 없니 존재 유무를 따지기 전에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절로 경이로움에 빠져 듭니다. 언젠가 제가 여기에 소개했던 [Who Wrote the Bible]의 저자 Richard Friedman의 또다른 책 [The Hidden Book in the Bible]은 구약성서(히브리성서) 속에서 J문서 기자가 도스토예프스키와 [죄와 벌]에 상응하는 책을 썼는데 그것이 구약성서 안에 녹아들어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책으로 복원해서 읽으면, 여기에 인간의 악함, 약함, 치졸함이 드러납니다. 원죄란 다름아닌 인간의 악함을 개념화한 것으로 볼 수 있구요. 틸리히는 이것을 실존적 소외(alienation)의 측면에서 해석하구요. 이런 면을 간과한 도킨스같은 사람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이해한 보수 기독교인들과 꼭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카톨릭 신학자는 도킨스를 근본주의자라고 하는데 일면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른바 성서비평학에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신화\"(myth)라는 개념은 거짓 이야기, 비역사적 허구로 통속적으로 이해하는데, 학계에서는 신화는 그 신화를 사는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과 의미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이 \"신화\"라는 말의 부담(loaded term) 때문에 그냥 이야기(narrative)로 또는 모델(model) 또는 범례(paradigm)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한 모델을 제공해 주는 것이 신화라고 볼 수 있구요.
언어학자나 일부 심리학자들은 개인 신화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가령, 번영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인을 설명하거나 life story를 10분정도 이야기 하라는 요청을 여러번 받는다면, 아마도 토시는 좀 달라도 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할 것입니다. 어떻게 가령 70년 인생을 10분에 다 정리할 수 있을까요? 번영님께서는 평생을 사시면서 중요한 것이나 의미있는 것만 골라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번영님의 개인 신화(personal myth)일 것입니다. 진술된 이야기 중에 다 사실이고 진실이지만 그 이야기를 하나의 sequence로 약간 드라마틱하게 구성하면, 이것은 번영님의 허구입니다. 번영님께서 구성해서 만든 하나의 이야깁니다. 이것만으로 번영님의 진실 또는 사실(facts)을 전달해 줄 수 없습니다. 이렇게 구성된 이야기는 나중에 자녀에게 전달되고 그 자녀가 또 후손들에게 전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범례적 모형이 됩니다. 이 범례적 모형은 번영님 집안에서 변할 수 없는 중요한 신화가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먹고 자고 하는 일상적인 이야기는 기억이 안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여러 국면을 이어주는 것은 중요한 삶의 국면이고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밥먹고, 싸고, 자고, 놀고 하는 것은 개인신화가 될 수 없죠. 그래서 개인신화는 이상화된 애인의 상징으로 보면 단테의 베아트리체이고, 니이체에겐 살로메이고, 릴케에겐 조르쥬 상드, 프란쯔 카프카에겐 밀레나입니다. 현재 여러분의 아내가 베아트리체이고, 살로메이고, 상드이고, 밀레나같은 사람이라면 행복한 것입니다. 아내가 아닌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다면 그것도 행복할 겁니다. 청마 유치환의 여인 이영도처럼요. 그런 면에서 신화를 살지 않고 신화가 없는 사람은 불행한 것이죠. 아니 불행한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가 덤덤한 것이겠죠. 하느님을 마음에 품는 것은 우리의 꿈을 가슴에 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한용운의 님처럼, 우리는 님을 품을 때 삶의 의미를 갖습니다. 내 가슴 속에 님이 없다면 불행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개인신화가 없는 무신론자는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