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저의 질문이 말꼬리 질문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늘봄님께서는 고대의 삼층 세계관이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예수와 바울도 삼층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제 생각에 예수와 바울도 그 시대의 산물이고 그러한 삼층 세계관의 틀에서 선교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저는 예수와 바울도 삼층 세계관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했었지만, 늘봄님의 글을 보면서 예수와 바울의 당시 세계관이 어땠을까 하는 분명한 질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토론이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늘봄님의 글들은 항상 thought-provoking해서 여러 질문을 많이 갖게 합니다. 저는 질문이 많을수록 배우는 것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신학적 질문이 아니라 역사적 질문입니다. 그래서 늘봄님의 답변에 대해서 신학적 의문을 갖기 보다는 역사적 이해를 높이기 위한 것이니 깊이 헤아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위의 질문은 늘봄님의 글을 보면서 제가 명시적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질문이 없으면 배우는 것도 없기에 늘봄님께 말씀드리는 것이구요.
혹시 가능하면, 천국과 지옥의 현재적 담론은 교회의 은폐와 거짓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호머-베르길리우스-단테의 계보에 이르는 단테의 영향이 현대 천국과 지옥관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것으로 보는데 이 문제를 말씀해 주시면 저의 기독교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적 현상에서 사후의 문제는 저의 관심사 중의 하나라서 늘봄님께 배우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프로이트에 대한 이해가 저와 조금 다르신 것 같아서 이것도 알려주시면 프로이트에 대한 저의 이해를 높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의 이러한 질문들이 합당하지 않다면, 왜 그런지 친절히 알려 주시면 깊이 감사드리겠습니다.
내사랑아프리카 올림
* sattva 님께서는 늘봄님의 설교집이라고 보고 말하라고 하셨는데, 저는 늘봄님의 [깨달음의 하나님]을 갖고 있고 질문이 많지만, 여기 게시판에 늘봄님께서 올리신 글로만 한정합니다. 여러분들이 늘봄님의 책을 읽으면 좋죠. 칼럼도 쓰시니 늘봄님의 신학사상을 접할 기회는 경로가 다양하다고 봅니다. 여기선 여러분이 읽지도 않은 글을 갖고 문제 삼으면 바람직하지 않고 또 게시판의 성격에 맞지 않다고 봅니다.
저의 천당지옥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저의 지질학 배경에서 시작한 우주진화 세계관의 시각에서 없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밝히는 공개적 계시 즉 138억 년의 우주 이야기를 인식하면서 믿음체계가 주장하는 그런 천당지옥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캘빈 S. 홀이 자신의 저서 '프로이트 심리학 입문' 이란 책에서 프로이트는 인도주의자, 진화론과 현대물리학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 즉 새로운 인간관, 진보적인 인간관을 정립했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캘빈의 프로이트 해석을 저의 말로 바꾸자면 인간은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생물종입니다.
예수와 바울의 삼층적 세계관이 틀리는 가르침이라니 사후 인간이게는 구원은 없는 것이라는 말씀이라 여겨야 되겠지요.
예수와 바울의 삼층 세계관은 그 당시로써는 진실했습니다. 또한 우주진화 세계관의 시대에 그들의 정신과 가르침을 "재해석"함으로써 우리의 삶의 거울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소개하는 고대 성서는 진실합니다.
그 당시에는 흰색으로 이해하였고 실제로는 검은 색이 였어나 그 당시에는 시력이 나빠 흰색으로 보였으니 검은 색이지만 흰색이라 가르친것이 진실하다는 말씀이신가요. 정말 어렵습니다.
저는 종교를 과학의 영역으로 한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종교는 의미의 추구이며 신화적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이 발전된 상태에서도 여러 신종교들이 나와서 자기들의 신화를 만들어갑니다. 외계인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자 라엘리안 같은 외계인을 믿는 신종교가 나오고, 론 허바드같은 과학공상소설작가가 싸이언톨로지라는 종교를 만들었고 톰 크루즈와 존 트라볼타는 이 종교의 신자입니다. 저는 허바드의 공상과학소설 [Dianetics]에 근거해 만들어진 이 종교를 가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화는 기독교 성서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몰몬교의 [몰몬경]은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전혀 없는 허구라고 하지만 몰몬교도들에겐 신화적 진실로 다가와서 수많은 몰몬 선교사들이 몰몬경 이야기를 세계 전역에 설파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신화만들기와 새로운 종교 만들기를 그냥 비과학적이라고 보기 보다는 사람들의 사회적 문화적 구성능력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천동설이니 지동설이니 진화론이니 상대성이론이니 불확정성 이론이니 같은 것을 몰라도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사랑과 친절에 감복하여 교인이 됩니다. 이것은 종교사회학에서 나름대로 확정된 이론입니다. 훌륭한 교인을 만들려면 전도를 하는 사람이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으로 무장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와같이 번영님이 노인회를 위해 헌신하는 그 모습보고 사람들이 교회 나가는 것이지 번영님이 광우병 연구 전문가였다고 교회나가지 않습니다. 제가 종교나 신학에 좀 안다고 저를 사람들이 존경하지 않고, (사실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정하자면) 저의 희생적 헌신을 보고 저를 사람들이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추상적 용어지만, 처참히 무너지는 삶의 고통 속에 누군가 와서 나의 손을 잡아 주고, 나의 눈물을 닦아 주며, 위로해 주는 그 "관심"(concern-저는 이 말을 좋아하는데 행운 불운 모두 봐주는 것)에 내 얼음장 같은 가슴이 눈녹듯이 녹아 내리고 거기에 장미같이 붉은 사랑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입니다.
번영님이 만든 세계 (cosmic world)는 저의 세계와 다릅니다. 제가 구축한 세상은 그동안 저를 키워준 부모님, 저를 가르쳐 준 선생님, 저한테 친절하게 대해주신 번영님, 그리고 길에서 헤멜때 친절하게 갈 길을 알려준 이름모를 사람들, 그리고 운좋게도 아직 죽지않게 저를 인도해 준 보이지 않은 힘(신)으로 구축된 세계에서 삽니다. 저는 성서에서 창조, 타락, 구원의 문자적 실현은 믿지 않지만, 이 세가지 요소의 구조는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제가 신화론적 복음주의자라고 했었는게 바로 이런 맥락입니다. 이 구조는 인간의 삶의 아름다음, 그 아름다운 현실속에서도 어쩔 수 없는 나약함, 그리고 그 나약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믿음의 구조를 보여주는데 그 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보이지 않은 사랑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저는 무신론자도 환영합니다. 신을 믿지 않더라도 찬란히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고 희망을 가슴에 담으며 황혼녘의 붉은 노을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성찰하면서 인생을 마감하는 무신론자도 아름답다고 봅니다.
번영님께서는 부디 믿음을 잃지 마시고 생 마지막 다하는 순간까지 그동안 번영님께서 봉사하고 헌신한 그 일을 놓지 마시고 또 그 동안 성실을 다한 삶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시길 빕니다. 지금 믿음의 회의가 온다면 그것으로도 좋은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의심없는 신앙은 허상이라고 했습니다. 의심의 끝에 무신론으로 귀착되면 그것으로도 좋고 다시 새로운 신념을 갖는 것도 훌륭합니다. 8년전 쯤인가 오바마 선거구인 시카고에 열린 종교모임에서 제가 광고를 해서 호텔 룸메이트를 찾았는데 그는 미국 장로교회 목사였는데 목사직도 사임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 고백을 듣고 그 정직한 결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솔직함에 숙연해지더군요. 저도 언제 무신론자가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being human) 또는 참 인간성(humanity)를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좋은 것입니다. 저는 그 동안 사랑을 참 많이 받아와서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고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지 막연히 믿음의 대상은 아닙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신을 궁극적 실재 (ultimate reality)라고 하였습니다. 이 궁극적 실재는 대상성을 상정한 것이므로 불교의 열반(니르바나)과 다릅니다. 그래서 그는 신을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을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관계와 참여로 본 것입니다. 신은 우리의 삶의 영역을 초월하면서도 우리의 존재의 기반이자 궁극적 의미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의미상실입니다. 우리의 삶이 meaningful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기독교 전통 안에서 찾는 중입니다.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올림.
그래서 우주여행을 꿈꾸는 지금 이 시대에도 인터넷이 발전된 이 시대에도 사람들은 생로병사에 주로 관심을 가지지 칼 세이건의 우주탐험같은 것은 호기심이지 주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이스나 세익스피어 비극을 보면서 깊이 공감하고,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닌 문학의 일종인 욥기를 보면서 이 착한 사람이 당한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죠. 이건 비판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우주적 하나님이니 우주적 그리스도니 하는 것은 흥미있는 개념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제가 쉽게 말씀드려서 그렇지 종교학자나 인류학자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구요. 저 멀리 있는 신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신을 사람들은 많이 찾습니다. 멀리있는 님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님이 나의 진짜 님이듯이요.
물론 늘봄님의 우주적 하나님(하느님), 우주적 그리스도 같이 현대와 같이 새로운 과학적 우주관에 근거해서 이런 주장을 하시는 것은 신선한 것이며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나 바울이 본 우주와 늘봄님이 생각하시는 현대과학적 우주관은 천양지차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것이구요. 그래서 철학자의 하느님이나 과학자의 하느님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우주관을 추구하는 신앙인들은 소수죠. 폴 틸리히는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이며 철학자의 하느님이기도 하다고 한 것입니다. 철학자는 과학자로 대치될 수 있겠죠.
문학이긴 하지만 신화적 구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톨킨의 [반지의 제왕]입니다. 이 영화의 trilogy를 보시면 성서의 신화적 구조와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행복했던 순간(낙원), 악의 등장과 고난의 행군(타락), 악의 파괴와 낙원의 회복(구원)의 구조를 이 영화는 보여줍니다. 저는 이 영화를 모두 개봉관에서 봤는데 매우 행복했고, 최근에 다시 봤는데 또 행복했습니다. 아마 또 볼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은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타마 붇다의 왕족으로서의 행복한 삶과 단란한 가정, 생로병사의 현실 (고해의 바다), 열반(깨달음). 톨킨은 기독교인으로 유명한 C. S. Lewis 와 동료였구요. 루이스의 삶의 일부를 그린 Shadowlands (1993)를 안 보셨으면 강추합니다. 루이스는온화한 복음주의 문학비평가이자 문학가입니다. 루이스의 책들은 신앙을 잃고 상심하는 사람들을 위로한 훌륭한 저작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