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일 오전 7시50분, 아침 뉴스를 시청하던 뉴욕 한인들은 깜짝 놀랐다. CBS-워너 계열의 인기 채널 CW11 뉴스에 제주의
수려한 풍광과 해녀, 사찰이 등장한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앵커의 옷차림이었다.
디자이너 이영희씨의 한복을 날아갈듯 차려입고 나선 이는 재미교포 방송인 장주영(28·미국명 줄리 장·사진)씨. 뉴욕 일대를 방송권역으로 하는 CW11의 아침 뉴스 앵커이자 2007년 에미상 교육프로 부문 후보에 오른 미국 방송뉴스계의 샛별이다. 한국관광명예대사이기도 한 장씨가 재외동포재단이 주최한 ‘2007 재외동포 차세대 지도자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달 30일 방한했다.
"올 5월에만 한국 관련 방송을 4회 내보냈어요. 1월에는 한복 특집을 진행하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우리말 코멘트를 넣기도 했지요. 덕분에 절 중국인으로 오해하는 시청자들이 많이 줄었어요.”
장씨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프로그램 ‘트룰리 줄리(Truly Julie)’의 PD 겸 리포터이기도 하다. 그녀는 “내가 한국인임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며 “상사들의 반대를 뚫고 가수 비를 인터뷰하거나 윤도현밴드 뉴욕 공연의 사회를 본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에 한국을 알리는 데 항상 앞장 서겠다는 장씨의 각오다.
장씨는 8살이던 1988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아버지 장지석(작고) 씨가 디트로이트 현대자동차연구소장으로 부임한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영어라곤 한마디도 못했지만 기죽지 않았다. 학교 유일의 한국인이란 사실도 ‘나만의 특별함’으로 받아들였다”고 술회했다. 중·고교 시절 그녀는 공부뿐 아니라 발레·승마·연극·필드하키·플루트 연주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미시간대 재학 중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경제학도인 그녀에게는 쉬 기회가 오지 않았다.
"인턴 자리를 얻으려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방송국을 28일 동안 계속 찾아갔어요. 담당 직원이 지쳤는지 결국 사장 면담을 주선하더군요.”
데모 테이프를 본 사장은 즉석에서 그를 채용했다. 인턴십이 끝난 뒤 사장은 “매일 새벽 3시에 출근한 인턴은 당신이 처음”이라며 찬사로 가득한 추천장을 써주었다. 덕분에 오하이오 폭스TV 기자가 됐고, 일리노이 NBC TV 앵커를 거쳐 2004년 뉴욕에 진출할 수 있었다. 장씨는 “요즘도 하루 4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며 “살인적 스케줄에 미국인 상사도 혀를 내두른다”며 웃었다.
미국에서 20년을 살았지만 장씨의 한국어 구사력은 수준급이다. 그녀는 “언젠가 남북통일이 되는 날 그 현장의 열기를 영어와 한국어로 세계에 알리는 것이 나의 꿈”이라며 “그것이야말로 한국의 혼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일 것”이라고 말했다.
디자이너 이영희씨의 한복을 날아갈듯 차려입고 나선 이는 재미교포 방송인 장주영(28·미국명 줄리 장·사진)씨. 뉴욕 일대를 방송권역으로 하는 CW11의 아침 뉴스 앵커이자 2007년 에미상 교육프로 부문 후보에 오른 미국 방송뉴스계의 샛별이다. 한국관광명예대사이기도 한 장씨가 재외동포재단이 주최한 ‘2007 재외동포 차세대 지도자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달 30일 방한했다.
"올 5월에만 한국 관련 방송을 4회 내보냈어요. 1월에는 한복 특집을 진행하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우리말 코멘트를 넣기도 했지요. 덕분에 절 중국인으로 오해하는 시청자들이 많이 줄었어요.”
장씨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프로그램 ‘트룰리 줄리(Truly Julie)’의 PD 겸 리포터이기도 하다. 그녀는 “내가 한국인임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며 “상사들의 반대를 뚫고 가수 비를 인터뷰하거나 윤도현밴드 뉴욕 공연의 사회를 본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에 한국을 알리는 데 항상 앞장 서겠다는 장씨의 각오다.
장씨는 8살이던 1988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아버지 장지석(작고) 씨가 디트로이트 현대자동차연구소장으로 부임한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영어라곤 한마디도 못했지만 기죽지 않았다. 학교 유일의 한국인이란 사실도 ‘나만의 특별함’으로 받아들였다”고 술회했다. 중·고교 시절 그녀는 공부뿐 아니라 발레·승마·연극·필드하키·플루트 연주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미시간대 재학 중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경제학도인 그녀에게는 쉬 기회가 오지 않았다.
"인턴 자리를 얻으려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방송국을 28일 동안 계속 찾아갔어요. 담당 직원이 지쳤는지 결국 사장 면담을 주선하더군요.”
데모 테이프를 본 사장은 즉석에서 그를 채용했다. 인턴십이 끝난 뒤 사장은 “매일 새벽 3시에 출근한 인턴은 당신이 처음”이라며 찬사로 가득한 추천장을 써주었다. 덕분에 오하이오 폭스TV 기자가 됐고, 일리노이 NBC TV 앵커를 거쳐 2004년 뉴욕에 진출할 수 있었다. 장씨는 “요즘도 하루 4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며 “살인적 스케줄에 미국인 상사도 혀를 내두른다”며 웃었다.
미국에서 20년을 살았지만 장씨의 한국어 구사력은 수준급이다. 그녀는 “언젠가 남북통일이 되는 날 그 현장의 열기를 영어와 한국어로 세계에 알리는 것이 나의 꿈”이라며 “그것이야말로 한국의 혼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일 것”이라고 말했다.
캐나다 중앙에서 퍼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