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성경적 지식은 일천하지만
성경적 교리에 대하여는 다시 말해 기독교의 헌법에 대하여는
어떤 연유로 인하여 정독을 하였을 때가 있었다.
성경에는 심판하지 말랜다.
악인은 버려 두란다.
언쟁도 하지 말랜다.
똥 밝았다 치라신다,
더더욱 내 사명이 아니면 내 버려두란다(그냥 두라는 게 아니라) ,
그리고는 너는 아냐고 묻는다.
신의 구제의 사념을?
그리고는 신이 누구를 회심시키려 하는지를?
신이 그들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면 너도 그것으로 충분치 않냐고.
그들은 은혜를 받을 수 없는 무거운 사슬을 정사에 매고 있지 않느냐?
빛이 희미한 해피한 한 가운데서 그들은 늘 재앙을 근심한다.
그 머리 위에는 언제나 심판의 칼이 걸려 있음을 ,
바른 심판자에 그들을 맞겨라!
주저치 말고 너의 길을 걸어라!
신은 범속한 사상을 가진 통속적 작가가 아니시니까,
종교철학자이며 법률학자인 칼 힐터가 말하기를
“침묵으로 실패하는 경우는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이 얼마간 기묘하게 들리는 것은
가지가지 잡다한 인생의 경우를 극히 유능하게 헤엄쳐서 그 실적을 올렸던 나의 지난 한국에서의 직장에서의 일을 회상하며 불굴의 만용적 의욕을 스케치하는 것,
실제로 매우 많은 곤란하고 불쾌 했던 인생의 복잡했던 사건은
이 침묵이라는 해안으로 소용도리를 헤엄쳐 나올 수 있었기도 했다.
인간의 보편적 실수는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 사전 학습되어지고 훈련 되어진 것 들에 의해 빗어지는 자기 표현의 형태에서 거의 다 찾아 볼 수 있다.
호악과 의도를 아무렇게나 잘 바 꾸는 사람에게는 때때로 기공을 새울 수 가 있다.
.
..
.
.
.
고칠 수 있는 혹은 고치지 않으면 안되는 명확한 부정에 대한 절대적 침묵은 절대적 파멸일 뿐이다. 그리고 내적인 증오를 품고 침묵하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어떤 유물론적 철학자의 아름다운 말에서 이런 것이 있었다.
“”사람은 목격하는 어떤 비참에도 스스로 부끄러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불유쾌한 감정 때문에 많은 사람이 비참한 정경을 보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가능 하게 한 것은 현대 사회의 사회주의 현상의 최고의 공적이 될 수 도 있을 거 같다.
이기주의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을 인간이 이성적으로 이해 하지 않는 한 설령 신앙이 이것을 그 사람에게 깨우쳐 준다 하더라도 그 신앙은 생활의 실체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참으로 연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지상에서의 천국이란 나약한 인간이 하나님과 끊임없이 생각을 같이 한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더 소원 하지 않을 때 만이 시작하는 것 같다. 그리고 더욱 다가올 천국도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을 거 같다. 더욱이나 인간이 이런 심정 없이는 그러한 천국에 어울리고 그 곳에 안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이성적으로는 전혀 인정하기 어려울 것 아닌가?
결코 뒤를 돌아 보지 말고 앞만 바라보고 전진 할 것!
온니 킾고잉! 오케이! 유라잇!
뒤를 돌아 본다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다만 실패를 거울 삼을 때,개선 되어야 할 것에 대한 이바지 할 경우,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간직하고 싶을 때 ,
또는 해야 할 때 를 제외 하고는 상기라는 것의 회상 이라고는 에고의 회귀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신앙자! 다시 말해 한 개체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다는 것은 통상적인 다음의 두 가지 현상에 있어서 분명히 인정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간 다져온 인생
에서의 희망에 찬 추단적 확신이다(어지간한 여자의 추측보다 더 정확하다고 늘 자신 했던 필자),
첫째로 썸타임 아주 갑자기 아무런 외적 계기가 없이 나타나는 전연 초 현세적인 환희에 있어서이고
둘째로는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수천의 사람들에 있어서와 같이 이기주의와 결부된 일에는 결코 성공하지 못하지만 이것에 대칭되는 어려운 사안이나 비범한 일에는 현저히 또한 훌륭하거나 용이하게 성공 한다는 것에 의하여 더욱 확고히 인정된다고 본다.
하나 하나의 개체의 영혼이 참다운 내적인 생활에 도달 했을 때 자신의 내부에 경험되고 선험되어 생성 되는 과정은 다음 과 같은 거 같다.
그 하나는 만족을 주지 않는 현세적인 정진을 중지하고 악한 것을 버리고 또는 무관심을 버리고 착한 신앙에 전향 하라!
다음으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시오 무엇 보다 도!
다른 것을 동반 추구가 아니라 동열도 아니고 최우선이다,
그 후에 모든 유익하고 참으로 필요한 것이 언제나 얻어 질 수 있다는 만용적 확신이 생긴다고 본다.
그렇다 바로 그것! 바로 그것이다!
그대여 확실한 선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추구를 주저치 말자!
가장 숭고한 것을 희구하는 것은 확실한 선 바로 확실한 선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나와 우리의 유일한 선일 게다.
이미 깨달은바 있지만 미워도 다시 한번 이라는데 고운데 무얼 망설이는가!
저 높은 환상은 바로 모든 천한 자주적 선택을 영원히 거부함으로 얻어 진다는 것을 ……………
쒯! 이지톡!! 포스트 오브 써너버 .............!!!!!!!!!!!!!!!!!!
나(띵:검둥이들이 하는 발음 형태)씽투두! 온니! 킾고잉 투 ????????????????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사상에 떠 오르는 것은 극히 하루의 전조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 같다. 마치 소프트웨어의 길잡이처럼 말이다.
이것을 신앙적 접근 방법으로 들어 가보면
온갖 우연적인 원인을 초래하는 순간적인 기분에 자신을 의뢰하는지?
혹은 스스로가 자신의 생활의 스케쥴을 확실하게 장악하려고 하는지?
바로 보이는 눈앞의 걱정거리나 귀찮은 일을 시작 하려는지?
혹은 지극히 자주적인 생존 경쟁을 시작 하려는지?
바로 이 같은 것들에 의하여 시작 되는 것은 이러한 형태로 그날의 운명에 결정되고 시달리게 된다고 봐야 한다.
혹자들에 의하여서거나 이미 지득한 바로 인하여 알고 있는 부지간의 언어적 향응은 이러하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바로 이 것은 한날의 괴로움은 바로 하루의 것에만 족하면 될 12라고 한다.
하여 두려움은 언제든지 무엇인가 올바르지 안은 일의 전조일 것이다,
성경적 교리에 대하여는 다시 말해 기독교의 헌법에 대하여는
어떤 연유로 인하여 정독을 하였을 때가 있었다.
성경에는 심판하지 말랜다.
악인은 버려 두란다.
언쟁도 하지 말랜다.
똥 밝았다 치라신다,
더더욱 내 사명이 아니면 내 버려두란다(그냥 두라는 게 아니라) ,
그리고는 너는 아냐고 묻는다.
신의 구제의 사념을?
그리고는 신이 누구를 회심시키려 하는지를?
신이 그들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면 너도 그것으로 충분치 않냐고.
그들은 은혜를 받을 수 없는 무거운 사슬을 정사에 매고 있지 않느냐?
빛이 희미한 해피한 한 가운데서 그들은 늘 재앙을 근심한다.
그 머리 위에는 언제나 심판의 칼이 걸려 있음을 ,
바른 심판자에 그들을 맞겨라!
주저치 말고 너의 길을 걸어라!
신은 범속한 사상을 가진 통속적 작가가 아니시니까,
종교철학자이며 법률학자인 칼 힐터가 말하기를
“침묵으로 실패하는 경우는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이 얼마간 기묘하게 들리는 것은
가지가지 잡다한 인생의 경우를 극히 유능하게 헤엄쳐서 그 실적을 올렸던 나의 지난 한국에서의 직장에서의 일을 회상하며 불굴의 만용적 의욕을 스케치하는 것,
실제로 매우 많은 곤란하고 불쾌 했던 인생의 복잡했던 사건은
이 침묵이라는 해안으로 소용도리를 헤엄쳐 나올 수 있었기도 했다.
인간의 보편적 실수는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 사전 학습되어지고 훈련 되어진 것 들에 의해 빗어지는 자기 표현의 형태에서 거의 다 찾아 볼 수 있다.
호악과 의도를 아무렇게나 잘 바 꾸는 사람에게는 때때로 기공을 새울 수 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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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칠 수 있는 혹은 고치지 않으면 안되는 명확한 부정에 대한 절대적 침묵은 절대적 파멸일 뿐이다. 그리고 내적인 증오를 품고 침묵하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어떤 유물론적 철학자의 아름다운 말에서 이런 것이 있었다.
“”사람은 목격하는 어떤 비참에도 스스로 부끄러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불유쾌한 감정 때문에 많은 사람이 비참한 정경을 보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가능 하게 한 것은 현대 사회의 사회주의 현상의 최고의 공적이 될 수 도 있을 거 같다.
이기주의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을 인간이 이성적으로 이해 하지 않는 한 설령 신앙이 이것을 그 사람에게 깨우쳐 준다 하더라도 그 신앙은 생활의 실체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참으로 연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지상에서의 천국이란 나약한 인간이 하나님과 끊임없이 생각을 같이 한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더 소원 하지 않을 때 만이 시작하는 것 같다. 그리고 더욱 다가올 천국도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을 거 같다. 더욱이나 인간이 이런 심정 없이는 그러한 천국에 어울리고 그 곳에 안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이성적으로는 전혀 인정하기 어려울 것 아닌가?
결코 뒤를 돌아 보지 말고 앞만 바라보고 전진 할 것!
온니 킾고잉! 오케이! 유라잇!
뒤를 돌아 본다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다만 실패를 거울 삼을 때,개선 되어야 할 것에 대한 이바지 할 경우,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간직하고 싶을 때 ,
또는 해야 할 때 를 제외 하고는 상기라는 것의 회상 이라고는 에고의 회귀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신앙자! 다시 말해 한 개체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다는 것은 통상적인 다음의 두 가지 현상에 있어서 분명히 인정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간 다져온 인생
에서의 희망에 찬 추단적 확신이다(어지간한 여자의 추측보다 더 정확하다고 늘 자신 했던 필자),
첫째로 썸타임 아주 갑자기 아무런 외적 계기가 없이 나타나는 전연 초 현세적인 환희에 있어서이고
둘째로는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수천의 사람들에 있어서와 같이 이기주의와 결부된 일에는 결코 성공하지 못하지만 이것에 대칭되는 어려운 사안이나 비범한 일에는 현저히 또한 훌륭하거나 용이하게 성공 한다는 것에 의하여 더욱 확고히 인정된다고 본다.
하나 하나의 개체의 영혼이 참다운 내적인 생활에 도달 했을 때 자신의 내부에 경험되고 선험되어 생성 되는 과정은 다음 과 같은 거 같다.
그 하나는 만족을 주지 않는 현세적인 정진을 중지하고 악한 것을 버리고 또는 무관심을 버리고 착한 신앙에 전향 하라!
다음으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시오 무엇 보다 도!
다른 것을 동반 추구가 아니라 동열도 아니고 최우선이다,
그 후에 모든 유익하고 참으로 필요한 것이 언제나 얻어 질 수 있다는 만용적 확신이 생긴다고 본다.
그렇다 바로 그것! 바로 그것이다!
그대여 확실한 선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추구를 주저치 말자!
가장 숭고한 것을 희구하는 것은 확실한 선 바로 확실한 선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나와 우리의 유일한 선일 게다.
이미 깨달은바 있지만 미워도 다시 한번 이라는데 고운데 무얼 망설이는가!
저 높은 환상은 바로 모든 천한 자주적 선택을 영원히 거부함으로 얻어 진다는 것을 ……………
쒯! 이지톡!! 포스트 오브 써너버 .............!!!!!!!!!!!!!!!!!!
나(띵:검둥이들이 하는 발음 형태)씽투두! 온니! 킾고잉 투 ????????????????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사상에 떠 오르는 것은 극히 하루의 전조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 같다. 마치 소프트웨어의 길잡이처럼 말이다.
이것을 신앙적 접근 방법으로 들어 가보면
온갖 우연적인 원인을 초래하는 순간적인 기분에 자신을 의뢰하는지?
혹은 스스로가 자신의 생활의 스케쥴을 확실하게 장악하려고 하는지?
바로 보이는 눈앞의 걱정거리나 귀찮은 일을 시작 하려는지?
혹은 지극히 자주적인 생존 경쟁을 시작 하려는지?
바로 이 같은 것들에 의하여 시작 되는 것은 이러한 형태로 그날의 운명에 결정되고 시달리게 된다고 봐야 한다.
혹자들에 의하여서거나 이미 지득한 바로 인하여 알고 있는 부지간의 언어적 향응은 이러하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바로 이 것은 한날의 괴로움은 바로 하루의 것에만 족하면 될 12라고 한다.
하여 두려움은 언제든지 무엇인가 올바르지 안은 일의 전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