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지적에 감사 드립니다.
저로서는 ‘예수쟁이’님께서 하신 말씀에 따로 토를 달아야 할만한 이견이 없습니다. 제가 글을 작성하면서 협상초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미국을 겨냥한 것이었지 한국 정부를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가 그 중심이 아니라는 것은 잘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의 맥락이 한국 정부가 잘못에 대한 비난의 일부를 감수해야 하는 것처럼 표현됐다면, 그것은 제 글재주의 모자람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현실적 한계에 의해 정책 결정의 폭이 좁을 수 밖에 없는 약소국가의 대표기관 (정부) 이 이런 비슷한 경우가 생길 때 마다 겪을 수 밖에 없는 설움이라고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외무역에 생존을 의탁하고 있는 한국의 처지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짜여진 세계 지배 논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정책 결정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노무현 씨나 노회찬 씨나 권영길 씨 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마찬가지라는 것도 잘 압니다. 21 세기의 한국은 그런 모험을 하기에는 잃어버릴 게 너무 많은 나라입니다. 21 세기를 살고 있는 ‘80년대 운동권’은 60 년 대의 체 게바라도 오늘의 모하메드 오마르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파병을 잘 했다고 하겠습니까? 청와대와 국정원이 인질들이 희생될 결과를 예측하고도 카르자이와 접촉한 것은 잘못됐으나, 그래도 미국의 노여움을 사 나라가 통째로 거덜나는 파국은 그 ‘잘못’ 덕분에 면했으니 그 ‘잘못’은 잘못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다고 쓰겠습니까?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미 예수쟁이 님은 현실과 이상, 정치와 운동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세히는 아니지만 그 양자간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을 주셨습니다.
저는 예수쟁이 님의 의견대로 노무현 정부가 인질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최선’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 답지 않게(?) 별로 길지 않은 글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현실 정치를 하고 있는 그들이, 그들이 해야 할 최선을 다 했듯이, 그들을 항상 최선을 다 하도록 자극하고 에너지를 공급해야 할 사명이 있는 ‘현실 정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운동가든 사상가든 논객이든 이빨꾼이든 그들 나름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또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후기에서 언급하신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글, 참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저는 작년 여름 한국의 한 목사님에게 선교에 관한 제 의견을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보 잘 것 없는 사람의 짧은 소견이지만 저도 후기로 이곳에 다시 옮겨 볼까 합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길’이 한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논리로 ‘선교의 기본’이 반드시 ‘예수를 구세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예수처럼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과 ‘전통적 의미의 기독교 교리나 계시를 비기독교인들에게 전도한다’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3개국 국민들은 대부분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예수를 유일한 구세주로 믿는다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의 자연사랑실천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톡홀롬이나 오슬로의 길거리를 메우고 있는 자전거 행렬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사소해 보이는 하나의 예이지만 저는 이 사람들이 일요일 마다 교회에 가기 위해 SUV를 끌고 나와 맨하튼의 트래픽 속에서 Gas를 낭비하고 있는 뉴욕의 일부 기독교인들보다는 좀 더 ‘예수를 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국의 일부 기독교인들이 일요일마다 수 천 명씩 공개된 장소에 모여 “미국은 하나님이 건설한 나라”라고 외치며 문화갈등을 선동하는 전자부흥사들의 구호아래 비장한 단조 군가 풍의 ‘God Bless America”를 소리높여 합창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예수를 닮은 삶’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같은 기독교인인 제가 이런 거부감을 느끼는데 비기독교인들이나, 특히 가뜩이나 위축돼 있는 아랍계 미국인들의 심정이 어떨지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각자의 종교적 체험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 기독교 역사의 전통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전통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관용과 존중의 바탕 위에서 평화적으로 이루어져 왔는가를 자문해 본다면 그 답은 결코 긍정적일 수 없습니다.
비기독교인들도 각자의 삶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소중한 믿음과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은혜’를 나누고 싶다면 거꾸로 그들이 우리에게 나누고 싶어하는 것을 먼저 들어주고, 자신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물어 본 뒤 이야기를 꺼내는 게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한 가나안 여자에게 유대인다운 인종주의적 편견을 노출하다가 그 이방여인의 겸손함과 진실됨 앞에 스스로 잘못을 깨우치고 뉘우친 적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천대했던 자의 어떤 모습에서 교훈을 받고 스스로 잘못을 발견하고 공개적으로 뉘우치는 이런 용기야 말로 예수를 그답게 하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기독교인들을 아직 무엇을 깨닫지 못한 개종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그들 각자마다의 사고 단계에 맞는 전도작전을 구사한다는 식의 오만한 마음을 갖는 것은 전도자나 피 전도자 양쪽 모두를 위해 올바른 접근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캐나다에서 강 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