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을 의혹으로 이끄는 최대 원인의 하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세상에 있어서나
우리의 내부에 있어서나
활개를 치고 있는 악 보다도 용이하게는 인정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바른 길 위에 있는 자신의 내적인 진보를 절 반쯤 의심하고
혹은 신의 정의의 장엄한 진전은 역사와 자기의 생활 경험에 비춰서도 그들의 눈앞이 아주 명백하지 않으면 안되는데도 ,
그래도 이것을 의심하게 된다.
우리들은 아주 오래도록 조금도 진보 되지 않은 것처럼 생각 되어 지는 경우가 짙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러는 사이에 그러나 전과는 전혀 다르게 변해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 때가 있다.
우리들은 너무 비평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애써 비평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좋은 것을 인정하여 이것을 고무하고 장려하는 사람
또는 진리를 차분히 그리고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다.
우리들은 인생 도상에서 아주 우연히 만나는 것 중에 아주 불쾌하게 만나는 것의 하나는 바로 질투이다, 이것은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말하면 질투하는 사람을 달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의 본언은 철학자 괘테의 말을 빌려 보자
“ 남의 질투를 깨트리고 싶다면 먼저 자신의 우행을 아주 버려라!”
우리들은 간헐적으로 본인의 장점이나 소유되어있는 부유함들을 뿜어 내어서 질투를 유발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망각하면 내 네이버를 분격의 저주아래 놓이게 한다.
이러한 것은 특히 이민지에서의 한인들 간에 많이 일어나는 비일비재사건 중에 하나다. 특히나 여자일 경우 이 같은 현상이 많이 발생 된다.
그 근원의 원흉으로는 약혼자나 남편,아이, 의복이나 장신구,자동차 비니지스, 직장등의 즐거운 가정의 일 따위를 갖지 못한 것 에 대한 만용적 우월함으로 기인 될 수 있다.
이것은 든 것이 없는 자들의 이면적 세계를 잘 들어 내주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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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비밀은 아주 간단 명료하다,
참으로 신을 믿고 이것에 대하여 따라서 생활한다는 정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실천은 보다 현실이 어렵게 만든다.
기독교계는 이것을 연구하여 이미 2000을 지나왔고 아직도 또 연구를 하고 있지만
옳게 성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헤아릴 수 없는 신학자들이 이것에 대하여 학문적 심층 연구를 해 왔음에도, 또 가르쳐 왔음에도 아직도 요원한 것이 이것이다.
신에 대한 신앙의 거부는 바로 목회자에 비롯 되는 수가 많이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아주 강렬하게 느껴 부지 못했던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