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아주 강렬하게 느껴 부지 못했던 사람은
오히려 그 순수함으로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 역사의 처음부터 쇼펜하우어에서 니체에ㅡ 이르기까지
이미 많은 사람이 이 신에의 거부로 어떤 일시적인 의의를 주는 빌미를 가지게 되었다, 왜냐면 이것에 감응하는 민중은 물론 어느 시대이던 간에 쉽게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소극적인 증명으로는 경험으로 신을 안 사람들을 도저히 설법 할 사람은 없었다. 또 그와 같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폐허 위에 그것을 못지않게 영속하는 현자에게나 바보에게나 어느 이세상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유익한
모든 생활 우에 있어서도 충분히 인간을 위로 할 수 있는 세계관을 세운 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려울 것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이것을 해보려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장래에 영속적인 결과를 줄 수 없는 파괴만으로 오용적 만족만 했을 것이다.
세계는 건설적인 기독교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계가 잊어서는 안될 종교철학자이기도 한 “보에티우”의 저서 “철학의 위안”
에는 이런 것을 요약하여 안위를 준다.
인간은 신의 생활에 진심으로 투명하게 참여함으로써만이 참되이 행 복 해 질 수 있다고 주지하며 가리키고 있다.
이 글을 보는 많은 신도들은 아슬아슬한 위기의 문장을 접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과거나 현실 앞으로의 기독교계나 거기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 그리고 믿으려는 사람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엄습해 올 것이 자명한 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어떤 말이 나 올까 ! 무슨 이해 못한 말들이 나올 까 어떤 헤프닝이 벌어질까…………!!
인간이 신에 대하여도 그들 개체가 가지고 있는 자유 의지로 우리는 신을 거부 할 수 있다. 이 말은 신과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이성적으로 끊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총의 선택이라 할 지라도,
이 신을 거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뜻 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의 다읫도 만약 그가 왕자의 권력의식을 가지고 예언자 나탄의 견책을 물리 쳤다면 , 이것을 하였을 것이다.
또 우리들의 주에 있어서도 누가의 복음서 제4장이 현실적 의의를 가진다고 한다면 이것의 가능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한번 가졌던 신을 잃는다는 이 불행의 가능성은 인간의 가장 유현 불가측한 일의 하나로 인생의 많은 불가사의한 현상, 특히 신경병적인 상태는 여기에 그 기인을 가지는 것이다.
이 일은 너무 깊이 파고 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가테고리가 있다.
신과의 결합의 줄을 어떤 연유가 있더라도 끊지 않으려는 결심을 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에서는 한 없이 순수하고 성의와 진실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므로 아무런 정신이 깃들지 않은 모든 형식 환언하면 이를 테면 조심성 없는 식전의 기도나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서 교회에 가는 것이나 억지로하는 가정예배 따위는 신앙에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해친다,
소위 경건한 가정의 수 천명의 아동에 관한 경험측이 이것을 능변으로 <SPAN lang=KO style="FONT-FAMILY: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