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날짜로 지난 9월 20일 캐나다에서 사시는 한국 교민 중에서 제사를 지내는 분이 있으신지 질문을 드렸습니다.
지금 현재 (한국 날짜 9월 26일) 405개의 클릭이 이루어졌고, 세분이 제사에 대한 구체적 답변을 해 주셨습니다.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theist : 현재는 부모님이 살아계시나, 한 분이 돌아가시면 이곳에
서 지낼 예정, 무신론자
- abc : 무교, 제사 지냄
- 종교 : 기독교, 제사지냄, 큰집에서 대표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가 제기한 질문 방식은 인터넷 poll도 아닌 아주 원시적인 댓글을 통한 질문이었고, 이 게시판은 클릭할 때마다 클릭 수가 올라간다는 것을 감안할 때 저를 포함한 중복 클릭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숫자를 보면, 씨엔드림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다수 여러분이 저의 질문에 클릭을 하신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제가 이 질문을 처음 드렸을 때, 아마 한 분도 제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는데 최소한 한 분은 지금 제사를 지내시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댓글 달아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조선시대 때 대부분이 가정에서 제사를 지냈고, 지금도 많은 한국 가정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민지에서 제사 지내는 분이 거의 없다는 것은 여러 가지 변수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댓글 가지고 소설을 쓰는 위험이 있으므로 매우 원론적인 차원에서 저의 생각을 몇 가지 첨가합니다.
1. 제사는 종교가 갖는 보편적인 우주론이 결여된 가족 의례 (family cult)
조상 숭배라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 일어나는 보편적인 종교 현상이긴 하지만, 일반 세계 종교처럼 체계적인 우주론 (cosmology,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이 결여된 종교 현상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 “宗” (종)을 분석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한 지붕 밑에 한 핏줄을 가진 사람들이 보여 종교 의례를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제사가 바로 그런 종교 의례라 할 수 있습니다. 제사는 가족이나 친족의 범위를 뛰어넘는 사제 (priest)가 없습니다. 구태여 사제라는 말을 붙이자면, 가족 중에서 가장 연장자 또는 장손이 사제직을 맡습니다. 묘사를 따지자면, 집안에서 가장 높은 종손이 사제직을 맡습니다. 그러니까 제사는 불교나 유교가 갖는 탈친족적인 사제직이 없습니다.
제사의 본질 또한 조상을 섬기는 것이 최우선이므로 혈족을 뛰어넘는 것이라 하더라도, 모든 정점은 조상으로 연결됩니다. 씨받이 현상도 결국은 조상 또는 자신을 귀신 (ghost)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열망이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조선이라는 유교 사회의 붕괴 그리고 근대화
유교가 사회규범으로 자리잡았던 조선사회의 붕괴, 그리고 일제 식민지 경험과 민족의 이동, 한국 전쟁과 민족의 대 이동,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운동과 사회 이동 인구의 변화 등에 의해 제사는 가족의 의례로 더욱 더 제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동시에 가족 구조의 변화도 함께 몰고 왔습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분화되면서 제사에 대한 가족 구성원의 참여의 빈도는 더욱 더 낮아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사가 종손이라는 가부장적 구조를 통해서 전승되었으므로 핵가족화되면서 종손이 아닌 가족 구성원은 제사 참여의 빈도수가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어서 제사가 친족이라 씨족의 정체성 (identity)를 형성하는 주요한 요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3. 이민지에서의 한국인
제사가 민족이나 친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요 변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민지에서 충분히 감지될 수 있습니다. 시크교도들의 독특한 터반과 무슬림들과 힌두들의 독특한 복장을 우리는 캐나다에서 빈번히 목격합니다. 이들 이민자들의 정체성은 민족적 정체성과 종교적 정체성이 혼성된 형태라고 볼 수 있는데, 한국 이민자의 경우, 이런 전통문화나 종교적 정체성을 이민지에서 유지하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말하자면, 한국인의 자기 정체성은 파편화 (fragmentation)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유교적인 정서 일부와 어쩌면 불교적인 정서 일부를 갖고 있는 정도이지요. 한국에서 제 일 종교를 자랑하는 불교가 이민지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그 만큼 불교의 자기 이동성이나 자기 정체성이 기독교보다 약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일본 이민자들의 불교 공동체도 캐나다 주류사회에 거의 통합되어 가는 모습을 감안한다면 한국불교 역시 이민지에서의 자기 응집력이 적은데 하물며 가족 의례로서의 제사가 이민지에서 연행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예라 할 수 있지요.
4. 역설적으로 한국 문화의 담지자는 기독교회다
생각하시는 분의 견해에 따라 불행한 사태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이민사회에서 주류 공동체는 기독교입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돌아 보건대, 기독교가 한국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 보다는 “파괴자”로서의 역할을 많이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 한글의 보급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전용이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독교가 한국전통문화에 부정적 계승을 했다고 하더라도 한국인의 삶의 한 형태라고 보면, 이민지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계승하는 주요한 문화 센터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일요일마다 한글로 설교가 이루어지며, 성서공부를 한글로 하며, 또 명절 때 한복을 입기도 합니다.
제가 제사 이야기를 하다가 기독교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과거의 문화 유산을 다시 돌아 보자는 것입니다.
보수적 기독교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민사회에서 그나마 교회가 파편화된 한국문화를 유지하는 문화중심지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기독교를 떠난 대안적 조직체도 좀 더 의식적으로 한국의 전통 문화에 대한 고민을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5. 개인적 고백
저는 기독교인이지만 한국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면서 처음엔 안 지냈습니다. 나중에 "문화적 회개" (cultural repentance;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를 하고 다시 제사를 지냈지요. 그리고 제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당연히 제사를 지낼 생각입니다. 물론 전통적인 유교적 의미에서 지내기 보다는 저를 나아준 조상께 감사하며, 가족과 친지가 함께 모이는 축제의 장으로 제사를 삼고 싶습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많습니다. 조상 삼대에 걸친 제사를 넘어 집안 묘사로 넘어가면 장난이 아닙니다. 제 어릴 때 기억으로 저의 집안에서 묘사를 며칠씩이나 지내더군요. 물론 이 묘사의 전 구조는 철저히 가부장적입니다. 앞으로 제사가 가족의 축제의 장으로 발전되지 않은 한 제사의 운명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6. 쓸쓸한 뒤안길
두서 없는 저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생각에 동의하시든 안하시든 여러분들의 의견 있으시면 의견 부탁드립니다.
이런 글을 쓰는데 마음이 참 무겁군요. 제가 시골 살 때, 저의 할머니가 담그신 동치미는 최고였습니다. 삼촌들도 동네 다 돌아봐도 우리 동치미처럼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 나는 동치미를 맛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의 짧은 미각으로도 그런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맛을 이젠 볼 수가 없습니다. 시대가 변하면 과거의 기억을 갖는 세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가게 됩니다. 제사가 우리의 기억, 또는 몸짓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져 가듯, 이민지 2, 3세들도 우리의 기억을 공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전이 (transition)의 문지방 (threshold)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쩌면 쓸쓸한 것입니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듯 우리 살림살이도 그렇게 흘러가고 그렇게 또 잊혀져 갈 것입니다. 기억할 수 있다는 것도 좋지만, 잊을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축복임과 동시에 역사가 만들어 내는 저주일 수도 있겠지요.
제가 그렇게 열심히 지내는 제사도 역시 제 기독교적 세계관과 우주론에 흡수되어 사라져가 버리는군요. 예수쟁이가 되면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얻었지만, 한편으론 참 많은 것을 잃고 또 잊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종교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