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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머리 소녀의 전설 |
작성자 강현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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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번호 1053 |
작성일 2009-02-04 16:21 |
조회수 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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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시애틀에는 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밴쿠버를 출발할 땐 우중충하게 흐리기만 하던 날씨가 국경 세관을 통과할 때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5 번 주간고속도로(Interstate Freeway)에 들어서자마자 굵은 장대비가 되어 쏟아졌다.
2003 년 1 월 어느 날 내가 시애틀에 간 이유는 좀 특이하다. 긴 머리 소녀 Samara Morgan의 흔적을 만나보기 위해서다. Samara 는 워싱턴 주 모에스코 섬 (Moesko Island) 에서 말 목장을 운영하는 중년 부부에게 입양된 뒤 양부모로부터 갖은 학대를 당하다가 결국 어린 나이에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 소녀 이름이다.
그 소녀는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어느 날 이른 아침 시애틀 근교에 있는 한 휴양지 마을에서 양모 Anna Morgan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검은색 쓰레기 봉투에 얼굴을 가리운 채 20 여 미터 깊이의 우물 안으로 던져졌다. 양모는 돌 뚜껑으로 우물을 덮어버렸다. 칠흑같이 깜깜한 우물 안에서 소녀는 7 일 동안이나 공포와 기아에 허덕이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어느 여기자에 의해 유해가 뒤늦게 발견돼 이 도시 근교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혔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다.
‘비 내리는 도시 시애틀’의 모습은 Samara의 우울한 표정을 그대로 닮은 것 같았다. 녹색 숲과 회색 물 안개에 둘러싸인 채 쥐 죽은 듯 고요한 동네들이 참 괴기스럽고도 매력적인 인상으로 다가오는 도시다.
Samara가 서부를 대표하는 전설이라면 동부에서는 Regan 이야기를 빼놓고는 ‘소녀의 전설’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워싱턴 DC에 가면 포토맥 강변에 죠지타운 이라는 동네가 있다. 프랑스 혁명이 나던 해인 1789 년 카톨릭 예수회에 의해 설립된 Georgetown University 가 있는 바로 그 인근이다. 영화배우 크리스 맥닐이 열 두 살 난 외동딸 레이건과 함께 살던 빨간 벽돌 2 층집이 그 동네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다.
레이건의 아버지는 크리스와 이혼하고 유럽으로 가 버렸다. 레이건은 아빠를 무척 사랑하고 그리워하지만 영국인 영화감독 버크 데닝스와 바람이 난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속 깊은 소녀다. 그 집에서 더부살이 하며 집안일을 돌보는 노부부는 스위스에서 이민 왔다고는 하는데 사실은 남자가 나치에 부역한 경력을 지닌 도피자 신분이다.
동네 성당 데미안 카라스 신부는psychiatrist(정신과 의사) 이기도 한데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다. 그러니 신부 생활이 의미가 있을 리가 없다. 그리스 이민 1 세이기도 한 그의 늙은 어머니는 거동조차 불편한데도 거의 버려진 채 혼자 살다 정신병원에서 사망한다. 카라스 신부는 어머니의 죽음이 자기 탓 이라고 믿으며 죄책감으로 세상을 우울하게 살아가는 더할 수 없이 춥고 배고픈 인생이다.
메린 신부는 archaeologist(고고학자)이면서 귀신신학의 전문가다. 실제로 그는 젊었을 적에 아프리카를 돌아다니며 귀신 쫓는 기도(exorcism)를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심각한 마약중독자다. 헤로인에 의존하며 말년을 보낸다.
Samara Morgan의 비극적인 이야기에는 사람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며 공포를 부채질하는 동양적인 기법이 흐르고 있는데, Regan McNeil 의 이야기에서는 서로 따로 인 것 같으면서도 기묘하게 얽혀진 주변 상황의 비정상적 복잡성이 보는 사람들의 심리 내면을 파고들어 헤집어 놓는 추리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Samara 이야기처럼 동양 고전에 그 바탕을 두면서도 서양적인 추리 기법의 진수를 보여주는 특이하고도 숨겨진 보배 같은 ‘소녀 이야기’가 하나 있다. 한국 소녀 수미 이야기다. 수미는 중증 multi-personality disorder (다중인격장애) 환자다. 이 소녀 안에는 다른 두 사람이 거의 완전한 각각의 인격체를 이루며 함께 존재하고 있다.
한 사람은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 수연이다. 아버지의 외도에 한을 품고 어머니가 둘째 딸 수연이의 옷장 안에서 목 매달아 자살하던 그 날 동생 수연이도 어머니의 시체를 끌어안고 몸부림치다가 넘어진 옷장에 깔려 압사하고 만다.
또 한 사람은 가장 증오하는 계모다. 수미는 어머니를 죽게 한 장본인이 계모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바로 그 계모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동생 수연이를 살릴 기회를 놓쳤다는 심한 죄책감을 함께 가지고 살아간다. 동생에 대한 병적인 보호본능과 계모에 대한 역시 병적인 증오는 모두 ‘하나 남은 ‘ 혈육인 아버지의 놀라울 정도의 무기력과 무책임에서 비롯된 자기 진화 증상이다.
수연이 이야기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이야기가 하도 복잡해 듣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해를 하지 못하고 듣는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복잡한 이유는 ‘The Six Sense’ 나 ‘The Others’ 에서 이미 써 먹은 ‘쉽게 이해되는 반전’을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꾼의 ‘차별강박증’ 때문이다. 그는 이야기 듣는 사람들이 도중에 반전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반전을 암시하는 수 많은 메시지들을 스토리의 일상 속에 철저하게 숨기려고 했다. 그 바람에 이야기를 듣는 내내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들과 스토리의 일상이 충돌을 일으켜 참을성 없는 사람들이 자라를 박차고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야기와 청중의 교감과 호흡을 중요시하는 평론가들로부터는 이야기의 구성도와 설득력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이야기 구성도나 설득력에 대한 비난이야 이야기꾼이 받고 당할 몫이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듣는 사람들대로 노력할 몫이 따로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우열반을 나누어서 우반과 돌반에서 각각 이야기를 다르게 전개해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혼자 한 적도 있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을 때 어떤 단락마다 뭔가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그 뭔가를 따라 잡기 위해 긴장하고 집중해야 했다는 기억이 난다. ‘왜 신발이 한 켤레뿐이지?’ ‘왜 손금을 보고 놀라는 거지?’ ‘왜 세 여자가 생리를 같은 날 한다는 거지?’ ‘누구보고 내일 집에 오라는 거지?’ 새엄마는 어디 가고 아버지는 혼자 자는 거지?’ 이해가 순조롭지 못한 대목마다 의문부호를 찍으며 그때마다 필기를 해 놓지 않으면 이야기를 더 들을 자격을 박탈당하고 자리를 떠야 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야기를 듣는 내내 지속됐었다.
해외에는 ‘A Tale of Two Sisters’ 라는 타이틀로 소개됐던 이 이야기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 해 며칠 전 ‘The Uninvited’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Samara 이야기나 카야꼬와 그의 아들 토시오 이야기는 동양적 공포유발 기법이 서양인들의 내면을 파고들어 성공한 작품들이다. 전형적인 동양고전을 이야기의 바탕으로 하면서도 Regan 이야기처럼 서양 전설의 추리기법을 사용한 우리 이야기를 리메이크 했다는 이 서양 작품이 과연 그 원작에 필적할 만 한 이야기 거리인지 몹시 궁금한데 기회를 내서 들어 볼 생각이다.
추신)
몇 년 전, 전혀 기대하지 않고 보기 시작했다가 매료된 적이 있던 한국영화 A Tale of Two Sister' (장화-홍련)을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 해 상영하고 있군요. 시간내서 한 번 봐야겠습니다. 비 내리는 시애틀 생각도 나고 해서 그냥 되는대로 끄적여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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