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막간의 휴식시간을 이용해서...... |
작성자 강현
지역 Calgary
|
게시물번호 1148 |
작성일 2009-02-22 01:46 |
조회수 1107 |
|
|
재판정 망신’사건으로 유명해진 지적설계론자 Michael J. Beche는 1996 년 진화론 비판에 ‘irreducible complexity’ (환원불가능한 복잡성)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진화론이 검증 불가능한 가설에 불과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생명체는 M16 자동소총과는 달리 분해결합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그 말은 맞는 말이다.
원래 창조신화 신봉자였다가 지적설계론자로 진화한 그의 사상은 ‘진화의 누진과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그의 말대로 환원불가능할만큼 복잡하게 얽혀버린 자연계의 생물체와는 달리, 갑자기 빠른 속도로 진화한 것이기에 ‘reducible simplicity’ 하기 짝이 없는 사상이다. 200 년간이나 연구업적을 쌓아온 진화론을 통째로 표절해다가 각색한 다음 ‘창조주’라는 말만 결론 부위에 덧붙이면 되니 편리하기가 이를 데 없는 사상이기도 하다.
Beche는 펜실베니아 지적설계론 사건 재판 때(이 사건은 언젠가 게시판에서 소개한 적이 있으므로 재론은 생략한다) 부정직한 발언으로 망신을 톡톡히 당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면역계에 대한 진화론적 근거를 반박하면서 증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재판 당시 반대측 변호사가 제시한 면역계의 진화에 관한 논문 58 편과immunology(면역학) 저서 9 권 중 그가 제대로 읽은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탄로 나고야 만 것이다.
계속될 질문과 탐구의 영역을 이데올로기로 채우려 한다는 점에서는 지적설계론(The Theory of Intelligent Design) 역시 본질상 창조신화와 다른 사상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지적설계론을 이 자리에서 비판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다. 내가 며칠 전에 어느 분으로 메일 한 통을 받고난 뒤 마음을 고쳐먹은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다름이 아니라 수구적인 종교사상이 과학과 문화의 발전을 저해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화학과 신학처럼 분야가 전혀 다른 학문도, 근본주의나 유물론처럼 화해가 불가능할 것 같은 사상도 서로에게 자극 받아가며 다 함께 진화를 거듭해왔다. 이런 과정을 편리하게 사회적 긴장과 압력이라고 불러도 좋다.
Dawkins가 이런 고백을 한 걸 어디선가 발견했다. 켐브리지에서 신학자들과 토론을 하면서 감히 자신이 하나님을 ‘복잡하게’ 인식하려 했는데, 신학자들로부터 Dawkins 식 ‘하나님 인식론’에 대한 비판을 받고 느낀 게 많다는 고백이었다. 반성까지는 아닌데 어쨌든 Dawkins는 그 경험을 통해 최소한 하나님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려는 신학자들이 부정직하다는 인상은 받지 않았다고 털어 놓았다.
도킨스 교수와 김국도 목사가 같이 백분토론에 나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976 년(검색해서 확인하지는 않았는데 아마 내 기억이 맞을 것이다)에 벌어졌던 알리(권투선수)와 이노끼(레슬링 선수)의 한판 대결처럼 엄청난 입장료를 내고 들어 온 관전객들의 분통을 터뜨리는 싱거운 순환논쟁이 되지 않을까? 그러다가 김국도 목사는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하며 싸대기를 한 방 날릴지도 모르겠다. 교회에서 새는 바가지가 방송국에서 새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그래도 그 두 사람은 상대에게 무언가를 자극 받고 교훈을 얻을 것이다. 김국도 목사는 집에 돌아와서 ‘저 자식’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그렇게 길게 지껄인 것인가’ 씩씩거리면서도 가금 떠올릴 것이고 도킨스는 ‘저 미치광이 같은 목사’가 왜 갑자기 자기 뺨은 후려갈긴 것인가’에 대해 곰곰 생각할 것 이기 때문이다.
지적설계론이란 진화론과의 사회적 긴장과 압력을 통해 창조신화가 스스로 변화한 모습이다. 우주와 생명의 세계를 학습해 가면서, 사상의 차이를 떠나 모두가 동의할 수 밖에 없는 막연한 진리는 이 세상의 어느 것도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네트워크 개념은 비단 자연계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인간들간의 사회관계에서도 통용되는 철학이다.
도킨스의 가장 큰 문제는 종교와 인문학의 세계를 자신의 영역인 과학적 인식론의 방법으로 환원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앞서 소개한 神 인식론에 대한 그의 고백은 이런 한계를 그가 최근에야 깨달았다는 사실을 반증해 준다. 이런 한계 때문에 그가 이전까지 종교를 비판한다면서도 고대문서인 유대교경전과 기독교경전을 향해 주로 펀치를 날려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한마디로 시체에다 칼질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종교 문화적 환경과 사회적 인식, 그리고 과학적 동기가 각기 다른 방법론으로 인간에게 작용하면서도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너무 간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서구 기독교는 대부분 진화론을 수용한지 오래다. 지난 11 일 The Times 가 "교황청이 진화론을 창조신화와 양립 가능한 이론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보도를 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펜실베니아 도버 사건 등 망신스러운 일들을 겪으면서 지적설계론도 하루가 다르게 진화해 가는 모양인데, 사실 이 사상은 전래의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상당 부분 포기해야 하므로 어떤 면에서는 근본주의 입장을 견지하는 신자들에게는 ‘이단사설’이 될 수도 있겠다.
나는 2 년 반 전에 지적설계론을 소개하면서 ‘알버타 보수파 신자들’(뭐라고 적당히 부를 말이 없으니 그냥 넘어가자.) 에게 지적설계론에 대한 의견을 질문한 적이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때 한 사람의 답변도 얻지 못했다.(종교라는 아이디를 가진 분이 답글을 달아주시긴 했다)
누군가와 대화 중에 지적설계론이 잠깐 나왔길래 그 때 생각이 나서 쓴 글이다. 그냥 막간을 이용해서.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