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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들은 들은 적이 없는 예수 이야기 |
작성자 강현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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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번호 1271 |
작성일 2009-03-29 22:21 |
조회수 1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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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선 님의 시를 음미하면서 나름대로 묵상해 본다. 서로 핍박이나 조롱이 아닌 교류요 소통이라고 이해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다름 때문에 마찰과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그 때문에 오히려 모두의 사고의 폭이 한층 넓어질 수 있다면 다행 아닐까? 너나 나나 사실과 합리성에 사고기반이 자리잡고 있다면 ‘핍박’ ‘조롱’ ‘무지’ 와 같은 것들이 낄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 분의 시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 이야기를 읽으니 몇 주 전 한국 기독교 사이트에서 내가 했던 이야기들이 생각난다. 사실 이 이야기는 그 때 한 말들이다.
신학을 전공한 교역자(터무니없는 의미를 지닌 목회자라는 단어보다는 이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들은 이미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 지금 퇴장해도 좋다. 오늘 할 이야기는 이 분야(신학)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지 않는 나를 포함해서 아마추어들(평신도들)끼리 하고 싶은 이야기다.
참, 아마추어 이야기 나왔으니 하나 고백할 게 있다. 언젠가 어느 분으로부터 메일 한 장을 받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건 내가 왜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유명논객 몇 사람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나 하는 점과도 관계가 있는 이야긴데,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니 그건 그 사람들의 주장에 문제가 있어서 라기 보다는 그 사람들의 말하는 자세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 사람들의 글이나 강연에서는 자기 분야가 아닌 주제에 대해 논설을 풀면서도 하나같이 겸손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사람들의 장점은 저널리즘의 경험과 훈련을 받은 탓에 자기 사상에 맞게 다른 분야의 정보를 선택하고 조합하고 전달하는 기술이 좀 뛰어나다는 것인데, 이런 점과 겸손한 마음으로 깊게 공부하려는 마음이 결합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좀 더 겸손해 지자. 아자!! 아자!!!
사설이 길었는데 본론으로 들어 가겠다.
기독교경전 (신약성서)에 묘사돼 있는 예수와 빌라도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일까? 내가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된 건 어줍잖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한 어떤 영화 때문이었다. 멜 깁슨이 사재를 털어 만들었다는 ‘The Passion of Christ’ 가 그 영화다. 나는 2004 년 봄, 씨엔드림 off-line에 이 영화가 의심할 여지없이 반 유대주의자가 반 유대주의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만든 영화라고 단언하는 평론을 기고한 적이 있다.
그 중 일부만 다시 가져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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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예수가 누구에게 잡혀 어떻게 죽어갔는가라는 제한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잔혹한 폭력과 피비린내 나는 체형장면은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간 관객들조차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일부 평론가들은 (감독이)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를 최대한 배제함으로써 중립을 지키려 애썼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과연 그런가?
신약성서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으면서 영화를 주의 깊게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사람의 조연에 대한 뚜렷한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한 사람은 유럽인이고 다른 두 사람은 유대인이다.
유럽인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을 식민지배하고 있었던 로마의 총독 빌라도다.
영화에서 그는 기본적인 양심과 사고력을 갖춘 정상적인 사람이다. 비록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면 문책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는 소심한 관리이지만 그 정도의 우유부단함은 사려 깊게 고뇌하는 모습으로 충분히 커버될 수 있는 단점이다. 동족에게 고발 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온 예수에게 안쓰러운 눈길로 물잔을 건네는 자비심도 갖고 있고 "네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무엇이든 말해보라"며 오히려 예수에게 애원하는 감동적인 모습도 보일 줄 아는 인물이다. 떼거리로 몰려와서 어거지를 부리고 있는 유대인들의 등쌀에 마지못해 예수를 형장으로 보내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의 잘못된 결정을 자책하는 듯한 표정으로 서성거리는 양심 있고 공정한 관리일 뿐이다.
반면에 예수의 동족인 두 사람의 유대인은 둘 다 기본 품성부터가 비뚤어진 못 된 인간들이다.
한 사람은 대 사제 가야파이고 또 한 사람은 유대왕 헤로드이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은 유대인을 종교적 정치적으로 각각 대표하는 지도자들인 셈이다. 영화에서 가야파가 맨 먼저 한 일은 예수의 제자들 중 한 명을 돈으로 매수해 그가 지금 있는 곳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위태롭게 하는 이 동족 젊은이를 잡아 죽이기 위해 외국인 점령자들에게 아부하는 파렴치한 인간이다. 그는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를 죽여야 하는 이유랍시고 횡설수설 주워섬기다가 잘 생각이 나지 않는지 옆에 있던 다른 사제에게 곁눈질하며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는 왜 예수를 체포해 끌고 왔는지 그 이유에 대한 논리적 설명도 할 능력이 없는 형편없는 돌대가리다. 이 따위 인물을 대사제로 떠받들고 있는 그 당시 유대인이라는 것들이 얼마나 한심한 인종이었느냐는 느낌을 찰나적으로 스치게 한다.
유대왕 헤로드는 가야파보다 한 술 더 뜬다. 우선 생김새나 차림새부터가 점입가경이다. 마약쟁이들이 우글거리는 삼류 스트립 바 에서 튀어나온 히피건달스타일의 그는 아예 자신의 직무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주지육림에 둘러싸여 미치광이 같은 변태놀음이나 즐기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가 예수에게 서둘러 '죄가 없음'을 선언한 것도 어떤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침부터 찾아와 귀찮게 굴고 있는 가야파의 똘마니들을 빨리 쫓아버리기 위해서다.
신약 루가복음을 보면 '서로 반목하던 빌라도와 헤로드가 예수사건 이후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빌라도는 헤로드와의 정치적으로 껄끄러운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예수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빌라도는 관할구역을 핑계로 마침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던 헤로드에게 예수를 보냄으로써 헤로드의 권위도 인정해 주면서 골치아픈 예수문제도 함께 해결해보려는 일석이조를 노렸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영화는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모두 배제한 채 두 유대인 지도자를 파렴치함과 비겁함 그리고 무책임함이 서로 범벅이 된 인간말종으로 묘사한다. 영화 초반에 다잡아놓은 이 '한 유럽인과 두 유대인'에 대한 편견의 위력은 이후 전개되는 예수에 대한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폭력의 과정에서 슬그머니 발휘된다.
갈고리 채찍에서부터 손발에 못을 밖는 지루한 과정을 거쳐 옆구리에 창을 꽂아 체액이 쏟아져 나오는 순간까지 대부분의 폭력은 빌라도의 부하들에 의해 행해지지만 이상하게도 관객들의 분노는 대사제 가야파와 총독관저에 몰려와 '예수의 죽음'을 외쳐댔던 유대인 군중들에게 가서 꽂힌다. 혹시 관객들의 분노의 불똥이 다른 곳으로 튀지 않도록 폭력의 적절한 고비마다 빌라도가 파견한 '걱정스러운 표정'의 로마관리가 부하들을 제지하는 장면을 넣는 배려 또한 감독은 잊지 않았다. 또 관객들이 끝까지 분노의 대상이 되어야 할 가야파를 중간에 잊기라도 할까봐 그랬는지 모든 중요한 폭력의 장면에 그를 구경꾼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이렇게 대세가 완전히 기운 마당에 끝머리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착한 유대인(예수에게 물잔을 건네는 여인과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키레네 사람 시몬)이 이 영화를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작품으로 다시 이끌기에는 지나치게 역부족이었다. 특히 키레네 사람 시몬은 대신 지고 가던 십자가를 내팽개치고 '폭력을 중단하라'고 소리를 질러대며, '원작(신약성서)'에도 없는 '오버'를 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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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반유대주의 (anti- Semitism)에는 두 가지 역사적 맥락이 있다. 하나는 유대인들의 강한 민족주의에 대한 소외의식에서 비롯된 주류(majority)의 집단적 반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 민족집단이 가지는 유별난 지적 재능에 대한 인종적 열등감이다. 주류(백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인종적 열등감은 주로 계몽주의 이후 두드러지기 시작한 유대인들의 경제와 과학, 철학 분야에서의 활약과 함께 나타나는데 1930 년대 Great Depression 이후에는 이 열등감에서 비롯된 집단 반발이 일부 지역에서 조직화 제도화된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향한 폭력적 탄압과 차별의 중심에는 주로 기독교 이데올로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우리가 떠 받들고 있는 기독교 복음은 예수가 만든 것도 아니고 사도바울이 만든 것도 아니다. 주연과 조연은 모두 유대인인데 감독은 로마인이다. 로마 권력이 탄생시킨 로마의 종교다. 적어도 시작은 그렇다. 사실 종교란 개인적인 깨달음에서 출발하는 게 정상이지 거꾸로 남이 제작해 놓은 교리적 명제들을 깨달음의 공간 안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면 나중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많은 경우 나처럼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황당한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개인적인 깨달음을 중시하는 믿음은 기존의 기독교 권력이 가장 증오하는 사상이 아닐까? 개인의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교회권력이 애써 꾸며 놓은 2000 년 역사의 교리적 진술 따위가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힐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옛날 영악했던 교회권력은 이미 4 세기 경에 Gnosticism은 물론이고, 선재론이나 윤회사상 같은 권력 유지에 해가 될 만한 텍스트들을 기독교 신학에서 모조리 제거해 버렸다. 그런 사상을 유포하고 다녔던 신자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해 버렸음은 물론이다. 기독교의 시작은 이렇게 비극적이다. 만일 현대 보수 기독교가 로마시대나 더 나아가 중세와 같은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말이 씨 된다고 했으니 재수없는 이야기 그만하자.
그러고 보면 사도신경에 나오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는 구절은 참으로 획기적인 구절이다. 복음서 전반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는 로마 권력에 대한 면죄와 관대함과는 전혀 상반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사도신경 구절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반 유대주의자 멜 깁슨은 영화를 만들면서 아주 솔직한 고백을 했다. 그는 자기가 만든 이 영화를 가리켜 ‘성경대로’ 만든 영화라고 한 것이다.
학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당시 예수가 살았던 지역의 문화와 율법에 대해서 꽤나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이야기다. 우선 산헤드린 공회가 직접 예수를 사형 집행하지 않고 빌라도에게 넘긴 것부터가 이상하다. 여기에 대해 지금까지 우리 평신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왔다. 유대인법정은 자치권이 있었을지라도 사형선고 및 집행권은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있었단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형집행권이 사라진 것은 AD 61 년 유대인들 스스로 야브네 법정을 만들었을 때라고 한다. 예수시대에는 산헤드린 공회에 사형집행권이 있었다. 사도행전 6 장과 7 장의 저자는 아마 복음서 저자보다는 이 시대 정세에 밝았나 보다.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으로 스테판이 사형당한 사실을 알고 기술했으니까.
요한복음 8 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자’도 당시 범죄자를 처형하는데 로마의 재가가 필요 없었음을 암시해 준다. 만일 당시 이 여인을 죽이는데 로마의 재가가 필요했다면 후대의 우리는 예수의 유명한 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자를 돌로 쳐라”는 말을 복음서에서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내 생각이지만 요한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답변을 생각해 내기 위해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는 척 하면서 시간을 끄는 행동 따위는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바로 답변하면 그만이었을 테니까.
“내게 데려올 죄인이면 내게 데려오고 가이사에게 데려 갈 죄인이면 가이사에게 데려가라”
똑똑한 예수가 이 말로 즉시 대꾸하지 않고 어물쩡거리다가 엉뚱한 답변을 했다는 것은 사형집행에 로마의 재가가 필요없었다는 결정적인 정황증거다.
그럼 왜 유독 예수만은 산헤드린의 대제사장들에게 잡혀와 심문을 받았으면서도 로마 총독에게 넘겨진 것일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까?
이상한 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빌라도와 역사에 기록된 빌라도가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Flavius Josephus 라는 유명한 유대 역사가의 기록에 나오는 빌라도는 매우 잔혹하고 무자비한 식민지 통치자였다. 그는 두 차례의 식민지 소요사태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학살로 저항세력을 무력화 시켰다. 특히 사마리아 지역에서의 잔혹한 대학살은 그의 정치적 반대세력에게 빌미를 주어 결국 시리아 총독 Vitellius의 고발로 로마에 소환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타난 빌라도는 역사 기록에 나오는 빌라도와는 전혀 딴 판의 인물이다. The Passion of Christ 에 나오는 빌라도처럼 무책임하지만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면서, 동시에 상식을 갖추고 마음까지 여린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정적들을 물리치고 산전수전 다 겪으며 로마 황제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외방 식민지 총독 자리에 오를 수가 있었다고?
어차피 예수와 빌라도의 이름이 같이 등장하는 문서는 복음서 밖에는 없으니 (신기하게도 그 많은 동시대의 역사기록들 중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가 쉽지 않다) 상상은 모두에게 부여된 특권인 셈이다. 내 상상은 이렇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아닌 로마 정보기관의 촉각에 걸려들어 빌라도의 수사기관에 의해 직접 체포돼서 사형당했을 가능성이 정황상 압도적이다.
만일 예수가 유대인 제사장들에게 잡혀 산헤드린 공회의 판결에 따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면 로마권력이 채택한 복음서가 쌍수를 들고 빌라도를 비호하고 나서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빌라도 당국에 의해 직접 체포되고 처형됐기 때문에 이처럼 긴 변명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모든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은근히 덮어 씌우면서 말이다.
그냥 내 생각이니 틀릴 수도 있다. 그러니까 틀렸으면 틀렸다고 해도 할 말없다. 내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는 자료와 증거를 제시하면 된다. 문제는 내 생각이 스스로 생각해도 별로 신통치 않은 것이나, 빌라도를 쌍수를 들고 비호한 복음서 저자(또는 편집자)들의 의도가 수상쩍은 것이나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만큼 애매한 건 마찬가지라 답답해서 해 보는 말이다. ‘독실한’ 모태신앙으로서 너무 발칙한 상상인가? 그래도 솔직하니까 좀 발칙해도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참, 다시 말하는데 나 분명히 기독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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