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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동창회 66] 바이러스 팬데믹에서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은 교회예배와 경제활성화 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13191 작성일 2020-04-18 09:56 조회수 1945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의 긴급한 상황에서 중보교회들은 여전히 일요일 예배와 각종 집회를 갖는 무식한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또한 보수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치경력을 위해 경제 활성화에 눈이 어두워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하는 규제조치를 완화하려는 무지하고 추악한 생각에 골몰하고 있다. 지난 수개월 동안 감염병 예방 의학자들은 경고하기를 바이러스 팬데믹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사회적 거리를 강화하고, 감염 검사를 확장하는 것뿐이라고 한다. 국민 전체의 생명과 건강과 안전을 위한 지극히 상식적인 지혜이다. 그러나 교회들은 무엇을 위해 무모하게 예배모임을 고집하는가? 불행하게도 내세지향적인 중보교회들이 예배모임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세계에서의 삶은 죄악스러운 것으로 치부하고 또한 인간의 생명 존엄성을 하찮게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배를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죽은 후에 보상으로 천국에 올라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헛된 망상때문이다.

 

오늘날 77억이 살고 있는 지구촌에서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기독교의 무지함과 무식함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당한체 불필요한 두려움과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사람답지 못하게 살고 있다. 비인간적인 불의에 대해 많은 원인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원인은 중보교회들의 삼층 세계관에 근거한 이분법적 신학성서근본주의 믿음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창조론과 죽음 후의 내세론과 이분법적 구원론이 초래하는 빈부차별, 성차별, 인종차별,  성적본능차별, 종교차별이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의 존엄성과 자유와 희망과 권리를 박탈한다. 삼층 세계관믿음체계인간의 본성, 생명의 존엄성, 그리고 세계의 의미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인간은 오직 하느님을 관념적으로 믿고 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며, 죽은 후 내세에서 영원히 산다는 망상에 사로잡혀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다른 생명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종교적 권위와 인간이 만든 어떤 하느님에 대한 교리믿음 보다 최우선적으로 소중하다. 인간만들어진 신 또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되었거나 존재하거나 희생될 수 없으며, 그런 맹신을 강요하는 하느님은 이미 죽었다. 전통적인 신자들은 고대인들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만들어진 신들을 하루속히 추방하는 것이 자신과 가정과 사회를 위해 지극히 현명하다.   

 

21세기 우주진화 세계관을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정직하고 이성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 인간이 밤하늘의 별들을 보는가? 아니면 별들이 우리를 보고 있나? 주류 과학계는 밝히기를, 현대과학이 공개적으로 계시(啓示)하는 138억 년의 우주 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여기에 있나? 에 대해 상식적인 답변을 제시한다. 물론 우주 이야기가 주는 답변은 과학적이고 동시에 종교적이다. 또한 우주 이야기의 해답은 서로 다른 세계관 즉 삼층 세계관과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살고 있는 수십억 인류에게 건강하고 아름답고 생명이 넘치는 밝은 미래를 위한 공통의 대의가 된다.

 

오늘 밤 사람들은 밤하늘의 들과 은하계를 바라 볼 것이다. 물론 21세기의 우리는 천체학, 진화생물학, 화학, 물리학, 지질학 등 현대과학으로부터 입수한 정보들에 근거하여 육안으로, 천체망원경으로, 그리고 인공위성 창 밖을 통해서 밤하늘의 은하계를 본다. 수천억 개의 별들이 무리를 지은 우리의 은하계 100-130억 년의 진화과정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포함해서 수많은 별들을 탄생시켰다. 주목해야 할 것은, 수천억 개의 은하계들은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45억 년 전 하늘 밖의 초자연적인 힘이 개입해서 미리 설계한대로 완성품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지구는 오랜 세월동안 우주지율성 창조성진화과정에서 우연히 자연적으로 출현했으며,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물론 우리 인간도 우주의 자율적인 진화과정에서 20-30만 년 전 지구에 출현했다. 따라서 우리가 은하계를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을 탄생시킨 모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은하계를 보는 것은 우리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다. 은하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은하계에 의해 탄생한 바로 그 눈이다. 따라서 이성적인 우리는 우주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고, 자신을 아는 눈이다. 인간이란 지구가 의식의 눈이 뜨여져 자의식하게 된 생물종이다. 인간을 통해서 지구는 자신에 대해, 자신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자신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간언어를 발명했으며,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세상들을 창조했다. 이러한 진화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위해 궁극적인 진리를 인식하고 언어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인간은 자의식을 지닌 우주이며, 지구 자체이다. 우주와 지구와 인간은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으로 자연스럽게 운행하고 있다. 우주의 법칙을 간섭하고, 인간을 통제하는 초자연적인 힘은 존재한적도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 즉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을 폄하하거나 가로 막는 하느님과 믿음체계의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방해하는 장애물일뿐이다.

 

삼층 세계관의 고대인들은 우주적 자연으로부터 느끼고 깨달은 생명의 신비스러움과 경이로움과 황홀함을 하느님, 야훼, 하늘님, 알라, 브라만, , 위대한 영, 등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성서와 코란과 경전들을 기록했다. 종교적 경전들에 묘사된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를 현대어로 전환하면, 전체적 우주(세계), 우주를 구성하는 개체들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된 전체, 우주적 삶의 현실적인 실제(實際), 인간의 온전한 삶의 요청, 자율적인 삶의 요청, 행복한 삶의 비전, 평화로운 삶의 희망을 뜻한다. 기독교 성서는 이것을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 형상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형상이란, 이성적인 인간의 본성이고, 인간의 존엄성이며, 인간의 창조성 자율성 가능성 그리고 잠재력이다.

 

우주를 인식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하느님이란 인간의 숭배대상이 될 수 없다.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는 인간의 온전한 삶에 대한 요청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자율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에서 깨달아 알게 된 궁극적이고 관계론적인 실제(實際)이기 때문에 반드시 믿어야 하는 존재론 실재(實在)가 아니다. 하느님이란 인간의 온전한 삶의 방식이고 표현이다.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인간 언어 창작품이다. 또한 삼층 세계관의 믿음체계는 교회를 보호하고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최후심판과 지옥천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우주는 하나의 생명의 망이라는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하늘 위에 인격적인 하느님이란 없을뿐만 아니라, 어떤 하느님이라도 인간 보다 더 소중할 수 없다.

 

하느님의 Reality "실재(實在)"에서 "실제(實際)"로 교체되어야 한다. "실제"라는 단어의 의미를 "사실의 경우나 형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재"라는 용어는 사전에서 "실제로 존재함", "사물의 본질적 존재" 등의 의미이다. 지금까지 서구 기독교에서 전해진 Reality를 실재(實在) 또는 실제(實際)로 번역했다. 하느님의 실재(實在)하느님의 실제(實際)는 큰 차이가 있다. 하느님의 실재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물질적이고 인격적이고 외부적인 존재에 대한 말이고, 하느님의 실제는 그 반대로 믿어야하는 객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계론적인 삶의 현실이다.

 

성서에 기록된 모든 예수의 치유 이야기들은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각시켜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은 종교, 신앙, 전통, 교리, 그 무엇보다 더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은유적인 이야기들이다. 21세기 기독교인들은 신구약 성서의 모든 기적 이야기들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참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 예수안식일에 회당에서 18년 동안 허리도 펴지 못하고 마치 암흑 속에서 죽지못해 살았던 여인을 보았다. 예수는 가르치던 것을 즉시 중단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치유해주었다. 이 여인의 희망은 오랜 세월동안 종교적 율법가부장 제도와 형식에 짓눌려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체 생존해온 자신의 절망과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는 예수가 안식일법을 어기고 여인을 치유해주는 것에 대해 격분하여 예수를 비난했다.  안식일에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행해서는 안된다는 소위 하느님의 율법은 유대교 율법 중에 가장 으뜸가는 법이었다. 안식일법은 하느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법을 어기는 것은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강조하기를 안식일은 하느님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예수의 말을 현대의 말로 전환하면, 인간은 하느님 보다 더 소중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이란 인간이 자신의 보다 의미있고 보람있고 행복한 삶을 위해 창조한 삶의 방식이며 표현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인간의 느낌과 깨달음과 체험이 먼저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나중에 왔다. 

 

역사적 예수는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 믿는 것과 사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과거의 패러다임

폐기처분하고,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엄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언했다.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는 사람과 하느님을 분리하고, 정치를 세속적인 것으로 종교를 거룩한 것으로 분리하는 이분법적 종교가 아니다; 예수의 기독교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극히 현실적인 종교이다; 기독교는 세상을 등지고 교회 안에서 성서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믿는 경전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믿음체계가 만든 도덕을 지키는 도덕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선한 일을 많이해서 내세를 위해 하늘에 공적을 쌓는 내세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고 제도적 교리을 무조건 믿으면 하늘과 땅에서 천 배 만 배의 보상을 받게되는 황금만능주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기도하면 만병통치를 얻는 무당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깨달음의 삶의 종교이며, 사심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생명의 종교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중단해야 한다. 그대신 하느님을 살아낸다고 고백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의미는 나와 다른 사람들과 생태계가 상호의존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한다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고 생태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보호하는 것이다.(마태복음 22:34-40). 예수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오직 하느님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느끼고 보고 듣고 살아가는 실제(實際)이며, 깨달음의 길이다. 평화와 정의와 사랑과 희망과 용기와 기쁨과 용서와 포용을 살아내는 것은 하느님을 살아내는 것이다. 절망과 슬픔과 고통의 암흑 속에서 빛을 보고, 힘찬 희망과 기쁨과 용기를 갖는 것은 하느님을 살아내는 것이다. 하느님의 실제(實際)는 세상의 밝고 어두운 곳들, 깨끗하고 더러운 곳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로 높이 세워놓은 경계 넘어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을 살아내는 현실이다.

 

예수 당시에 믿음체계는 한 여인을 혹독하게 정죄하기를, 너는 태어나면서부터 벌레만도 못한 더러운 죄인이고 아무 값어치도 없는 쓰레기같은 인간이라고 했다. 그 여인은 제도적인 종교의 잘못된 신학과 교리와 믿음에 얽매여서 떳떳하게 허리도 펴지 못하고 살아왔다. 예수는 그 여인에게 너는 온전한 사람이다라고 선언했다. 원죄론과 대속론과 창조론을 180도로 뒤집어 엎는 예수의 개혁적인 선언은 오늘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그 이상의 구원과 축복과 사랑은 없다. 예수의 선언대로 모든 인간은 더러운 죄인이 아니라 성스러운 생명이라고 인식하면, 비신자는 죄인이고 교회 다니는 사람은 구원받았고, 교회 밖 세속적인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더럽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깨끗하고, 기독교인들은 거룩하고 다른 종교인들은 추악하다는 배타적이고 우월적인 편견 오만 사심에서 해방되어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다.

 

하느님경제가 인간보다 더 소중하면 통제와 탄압과 착취가 일어나지만, 인간하느님경제보다 더 소중하면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어 회복되고,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공평하게 사랑받고 존경받고, 세상은 정의와 평화로 풍요롭게 된다. 이것이 역사적 예수가 가르치고 살았던 지금 여기하느님 나라 운동이었다. 천국과 하느님 나라와 하늘 나라는 이 세계와 분리된 다른 세계가 아니다. 모는 사람들이 공평하게 치유받고 사랑받고 구원받는 사회와 나라가 하느님 나라이다. 천국은 죽음 후의 세계가 아니며 하늘 위에 존재하지도 않으며, 다만 오늘 여기에 생명과 존엄성이 존경받는 현실이다. 특히 오늘 바이러스 팬데믹의 위기에서 인간의 생명 존엄성을 가장 먼저 소중하게 여기는 종교 정치가 절실히 필요하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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