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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동창회 111] “무신론자 목사”의 삶의 철학: “믿음”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의 삶으로의 여정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14368 작성일 2021-01-17 09:22 조회수 2761

무신론자 목사라는 호칭은 자신들이 스스로 만든 말이 아니라, 유신론적 신자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냈다. 왜냐하면 무신론자 목사들은 믿음(belief)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으며, 오직 새로운 의식 인간성(life)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참 사람 예수-역사적 예수 정신에 따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필자에게 무신론자 목사가 어떻게 교회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수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 긍정적인 관심과 부정적인 의문을 던진다. 필자가 살고 있는 캐나다 서쪽과 동쪽 전역에 나의 동역자들이 무신론자 목사로서 대단히 활발하게 생기가 넘치는 목회를 확장시키고 있다. 무신론자 목사들은 예수의 신성과 성서의 절대적인 권위와 죽은 후의 내세를 믿지 않으며, 성서문자근본주의를 철저히 반대한다. 그들은 이러한 신학과 신앙에 대해서 무신론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성서문자근본주의 유신론적 신자들이 그들에게 무신론자 목사라는 명칭을 부쳤다. 그들은  교인들에게 초자연적인 하느님에 대한 맹신을 버리고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도록 설교와 교육에서 강조한다. 나는 20년 동안 캐나다연합교회에 속한 온타리오주의 한인교회와 앨버타주의 영어교회에서 담임목사로 목회했다. 내가 시무했던 교회들은 공개채용과 면접을 거쳐 목회자를 청빙했다. 나는 항상 청빙신청서와 면접에서 나의 무신론적 신학참 사람 예수 의식 인간성을 살아내는 삶의 방식을 선명하게 밝혔다. 또한 나는 예수 신성과 예수의 기적을 믿지 않으며, 성서는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되며, 은유적인 해석이 필수적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20년의 나의 목회에서 교인들이 만들어진 예수를 보상심리에 빠져서 사심으로 가득한 내세지향적인 믿음을 쫓기 보다는 참 사람 예수가 산 것처럼 살도록 격려했다. 1988년에 캐나다연합교회동성애자목사안수를 공식적으로 선포했으며 이것이 캐나다 의회가 동성애자 결혼을 합법화하는 데에 기초가 되었다. 1990년에 캐나다연합교회는 성서절대적인 권위가 아니라 많은 권위들 중에 하나라는 신학과 신앙 지침서를 공표했다. 또한 1998년에 교단  총회장은 오타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예수의 신성을 믿지 않는다고 밝혔으며, 전국의 연회들이 이구동성으로 총회장의 신학을 적극적으로 포용한다고 선언했다. 필자가 무신론자 목사로서 성공적으로 목회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속한 교단과 나를 청빙한 교회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지질학자로서 산에서 광야에서 돌들과 살면서 우주의 법칙을 배우며 살았다. 이때 자연으로부터 사심없는 정직함과 성스러움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 체험을 더 깊이 하기 위하여 캐나다의 멕길 대학(McGill Univ.)에서 지질학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나의 모태신앙인 인격신론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계속해서 현대과학의 지질학과 충돌했다. 지질학에서는 우주의 기원과 발생, 태양계와 지구의 출현, 지구 상의 생물들의 기원, 천문학, 생물학, 진화과학(뇌의학, 진화 심리학)을 두루 연구한다. 따라서 교회에서 믿는 삼층천의 하느님을 이해하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으며, 나의 의식과 인간성은 위선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간과 생명과 우주세계의 심층적인 의미에 대한 신비감에 사로잡혀 전공을 바꾸어 같은 학교의 종교학부에서 진보적인 신학을 탐구하기 시작했으며, 과학은 종교와 철학과 교육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특히 성서비평학을 통해서 성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성서에서 드러나는 두 얼굴의 예수 즉 만들어진 예수역사적 예수를 정직하게 분별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예수 하느님은 오늘 교회가 믿는 유신론적 하느님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성서가 사본들의 모음집인 것이 눈에 들어오면서 참 사람 예수가 심하게 변질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수는 무신론적, 자연주의적, 인도주의적 시회개혁가였다. 예수는 유신론적인 종교체제 교리 형식에 순종하는 수동적인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직하고 이성적인 참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예수무신론자로 인식한다. 예수는 제도적인 종교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따르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아내도록 가르치고 격려했다.

 

나의 지질학 신학의 긴 여정에서 새롭게 인식한 사실은, 138억 년 전 우주세계가 출현했던  빅뱅 전에 전지전능 창조주 신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현재와 미래의 우주 역사에서 객체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광활한 우주세계의 하늘 위에서 또는 하늘 밖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조그만한 별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삶에 자기멋대로 개입하고 조정하는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인 심판자 하느님은 없다. 이런 망상은 고대인들이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에서 만들어낸 임시변통의 안전장치에 불과하다. 결국 과학혁명 계몽주의 운동으로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의식 인간성이 심층적으로 진화하면서, 21세기에 인격신론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확실하게 죽었다. 유신론은 더 이상 설득력도 없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분열과 혼돈과 테러와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하느님의 유신론과 또한 이것들과 관련된 창조론 지적설계 진화창조론은 인류사회의 밝은 미래에 심각한 장애물이며 위험한 것들이다. 현대인들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간에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하느님에 대한 망상을 완벽하게 버려야 한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자연 법칙이 깨어지는 초자연적인 기적은 일어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고대인들은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삼층천을 만들었지만, 원초적으로 종교 계시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삶의 경험에서 참되고 온전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지혜의 요청으로 등장했다. 따라서 종교하느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것이다. Religion(종교)이란 말의 어원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생명,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상호관계(Relationship)이듯이, 종교존재론적인 하느님을 유신론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우주세계를 구성하는 개체들의 관계론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믿어야만하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죽었다. 보상을 위한 필수조건들을 요구하는 하느님은 죽었다. 이 세계의 종말최후심판은 없다. 따라서 진노하는 심판자 재판장 하느님도 죽었다. 이런 유신론은 더 이상 설득력도 없고, 가정과 사회와 세상을 혼란에 빠트릴 뿐이다. 오늘날 전세계의 주류 신학계는 인격신론의 유신론을 오래 전에 떠나 보냈다. 무신론자 학자들이 학문의 모든 영역들을 주도하고 있다. 소수의 유신론자 학자들이 분노하고 절규하지만 보편적인 설득력과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21세기 현대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떠나보내고, 참 사람 예수새로운 의식 인간성을 살아내어야 한다. 예수와 예수의 하느님은 믿음의 객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나는 천만다행히도 멕길대학에서 새로운 의식 인간성의 진보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성서문자근본주의 교회생활에서 시작된 나의 삶의 여정에서 현대과학 지질학과 역사적 예수의 신학의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려는 무신론자 기독교인이 되었다.

 

<<<무신론자 목사의 삶의 철학>>>

 

* 성서138억 년의 우주진화 역사를 변형시킬 수 없다. 영원히 끊임없이 변형하는 불확실성 우주 이야기를 기독교의 이분법적 신학과 삼층 세계관의 맞춤형 이야기 즉 불변하는 이야기로 변질시킬 수 없다. 성서는 현대과학이 발견한 우주진화 과정에 기초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성서우주 역사의 기초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

*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삼층 세계관의 고대인들이 자신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만들어졌다. 인간의 의식과 인간성이 진화하면서 믿음 하느님은 죽었다. 믿음을 떠나보내고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 의 방식이 하느님의 의미이다. 

* 성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온전한 삶을 위한 지혜서이다. 성서원본이 아니라 수많은 사본들 중에 극소수를 수집하고 편집한 모음집이다. 성서는 공식적인 정경이 아니라 그냥 읽혀진 책이다. 성서문자적으로 심각한 오류와 모순투성이지만, 은유적으로 읽고 21세기의 언어로 전환할 때에 진실한 책이 된다. 성서는 과학 교과서, 역사 교과서, 백과사전이 아니다.  

* 현대인들의 신약성서는 예수가 죽은 후 1-2백 년 후의 사본들이기 때문에 참 사람 에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이 아니다. 예수 신성은 예수가 죽은지 2-3백 년 후에 교회가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교리일뿐이다. 삼위일체는 믿어야만 하는 교리가 아니라 하느님이란 말의 심층적인 의미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수는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예수는 죽은 후에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문자적인 재림은 없다. 예수는 이분법적으로 사람들을 차별하는 성전 종교하느님 나라 종교로 개혁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 예수는 성차별, 빈부차별, 계급차별, 인종차별, 종교차별을 철저히 반대했다. 예수 2% 98%를 장악하는 황금만능주의의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이 땅 위에 공정한 분배 정의가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다. 참 사람 예수는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하느님을 철저히 반대했다. 예수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무신론자 현자였다. 예수 하느님은 믿음의 객체적 대상이 아니라,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온전하게 사는 삶의 방식이었다.

* 원초적으로 기독교는 예수의 신성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서 탼생했다. 따라서 예수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 현세적의 종교이다. 오늘날 교회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되는 내세적이고 황금만능주의의 부유층들을 위한 상업적인 종교이다. 기독교는 부자가 되고, 죽은 후 천국에 올라가 영원히 살기위한 종교가 아니다.   

* 기독교인 만들어진 하느님 예수를 보상심리에서 믿지 않고,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살아낸다.

* 기독교인은 죽은 후 천국에 올라가서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을 믿지 않는다. 인간이 죽음 후에 이 세계를 떠나 이주해 갈 다른 세계는 없다. 내세를 믿기 보다는 지금 여기 현세에서 순간순간 영원함을 누린다. 인간의 삶은 일회적이고, 인간의 영원함은 현재형이다. 이 세계에서 모든 인간들과 생명들을 평등하게 존중하고, 조건없이 사심없이 사랑한다.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소중하게 대한다. 따라서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함을 환영한다. 우리는 세상을 성속(聖俗)으로 이분법적으로 차별하기 보다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으로 포용한다.

* 기독교인과학이 모든 삶의 영역에 기초가 된다고 인식한다. 과학은 종교와 철학과 교육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 지구의 생명 인간은 빅뱅 이후에 우연성자연성창조성으로 등장했다. 우주세계는 이 세계 밖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서 미리 계획한대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우주는 불확실성 속에서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으며, 미래에 폭발해서 사라지고 새로운 우주가 탄생한다. 확실성이란 종교체제가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가설이며 지극히 비과학적이고 정치적인 발상이다. 우리의 집 지구의 마지막은 태양계가 폭발해서 사라지는 때이다. 우주진화 세계관이 주류 사회의 모든 영역의 기초가 되고 있는 첨단과학 시대에 하느님은 미래를 모른다. 하느님은 하늘 위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他者)가 아니라, 지금 여기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온전한 방식이다.

* 종교의 주체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다. 종교는 믿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삶과 생명에 대한 것이다. 종교 모든 인간들과 생태계가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사는 길이다. 종교 현세를 도피하여 내세에서 안식처를 찾는 것이가 아니다. 종교는 현세를 개혁하는 도구이다.

* 다른 종교인인종여성성전환자동성애자를 평등하게 존중한다. 다른 종교인을 나의 종교로 개종시키려는 헛된 수고를 안한다.

* 기독교인의 예배는 비이분법적이고 우주적이고 조건없는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삶 그 자체이다. 예배 장소는 교회나 기도원이 아니라, 삶의 현장이다. 따라서 숨쉬고 먹고 마시며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 전체가 예배이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참 사람 예수의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 즉 그의 정신에서 탄생했다. 교회는 예수가 살았던 것처럼 살려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예수의 모습을 닮은 그리스도인(Christian)들의 공동체이다. 유신론적 교회기독교는 권력과 권위를 보호하고,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조와 교리와 전통을 만들었다. 즉 무엇을 믿느냐에 대한 교리교회종교가 만든 종교적 분리대 내지는 안전장치이며,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에 대한 상업적인 부산물이다. 원초적으로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삶과 생명의 종교이다. 역사적 예수 정신을 따라야 하는 기독교의 기능과 목적은 이 땅 위에 공정한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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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  |  2021-01-1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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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에 죽은 후에 갈 천국이 있다면 누가 거기에 갈 수 있고 어떻게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을까?

물론 천국이나 지옥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고대인들이 만들어낸 신화이다. 그래도 많은 현대인들이 신을 이렇게 저렇게 믿으려고 하고, 신에 대한 믿음과 관련해서 천국을 꿈꾸고 있다.

그야말로 만일에 죽음 후 내세에 천국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면 거기에 인종차별, 종교차별, 성차별, 성적본능차별, 빈부차별, 교육정도차별, 신분차별, 계급차별, 등등의 차별주의와 우월주의가 없는 세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종교체제들은 특히 유대교에서 파생된 기독교와 회교도는 자신들의 종교에 속해야만, 거기에다 필수조건들을 더 부쳐서 종교제제가 만든 복잡한 교리들과 공식들을 암기하고, 의문없이 인정하고 믿는 척이라도 해야만 그곳에 갈 수 있다고 우겨댄다.

만일에 천국이 있다면 죽은 후에나 갈 수 있는데, 그러면 죽는 순간의 모습으로 천국에 갈텐데 인간의 죽음의 원인들이란 것이 늙어서, 병들어서, 교통사고로, 전쟁터에서 전사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등등인데 그렇다면 천국엔 마치 늙은이들, 사고와 전쟁으로 온 몸이 만신창이 된 사람들, 너무나 가난해서 굶어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모습들로 가득하지 않을까?

아니면 천국에 가면 모두가 젊어지고, 건강한 모습으로, 부자의 모습으로 변신할 것인가?

종교체제의 믿음체계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경전에 짧게 기록된 몇 구절을 인용하거나, 무작정 막연하게 죽으면 천국에 가서 잘 먹고 잘 살 것이라는 대답이 전부이다.

또한 천국행을 결정할 재판장 하느님은 어떤 합격조건들로 사람들의 천국행을 결정하나? 오늘 종교체제들의 하느님은 명령하기를, 교회(사찰 회당 사원)에 나와야 하고, 기독교인(유대교인 회교도인)이 되어야 하고, 예수(성전의 하느님, 마호멧)를 믿어야 하고, 그밖에 다른 종교들은 자신들의 종교단체에 속해야만 한다고 우겨댄다. 모든 종교 교단들의 하느님들은 서로 고객(?)을 더 많이 끌려고 경쟁이 대단히 치열하다.

마치 전문 음식점들이 고객을 더 많이 유치하려고 자신이 유일한 원조라고 떠들어대는 것과 같다. 자신들의 하느님이 유일한 신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짜라는 억지주장이다. 특히 오늘날 가장 추악하고 옹졸하고 유치하고 비상식적인 짓거리를 뻔뻔스럽게 자행하는 종교단체가 기독교 교회들이다.

인간의 본성이고 존엄성인 자율성-창조성-잠재력-가능성을 몽땅 무시한체 인간을 벌레만도 못한 더러운 죄인으로 폄하하고, 하느님 예수를 믿지 않으면 유황불이 활활 타오르는 지옥에 떨어져서 천년만년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끔찍스러운 거짓과 위협으로 사람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몰아넣어, 무서워서 억지로 수동적으로 교회에 나오게 한다.

이런 하느님은 죽었다. 물론 존재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은 없다. 현대인들이 신이 필요하다면 물질적이고 인격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이나 존재가 아닌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방식과 표현으로서의 신이란 말의 의미가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신 또는 하느님이란 말이 21세기에 필요할까? 필요하다면 이기적이고 부족적이고 폭력적이고 차별적이고 우월적인 신의 의미는 더 이상 우리의 가정과 사회에서 생존할 수 없다.

신을 믿고 안믿고는 개인의 자유가 아니다. 신을 믿는 것은 공동체적인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나만 우리만 잘 살면 되는 것이 신의 의미가 아니다. 내가 불행(행복)하면 나의 이웃이 불행(행복)하고, 나의 이웃이 고통 중에 있으면 그것이 나의 고통이고, 이웃이 배고픔은 나의 배고픔이고, 이웃의 성공은 나의 성공이라는 인식이 곧 신의 의미이다.

신은 경계 넘어 모든 것을 포용하는 공동체적인 운명이다. 천국이 있다면 우리 모두는 그곳에 간다. 지옥이 있다면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우리 모두는 그곳에 가야 한다.

늘봄  |  2021-01-19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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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종교인들의 "신("god)의 의미는 운동화같은 "신"(shoes)이 아니다.

운동화 신은 나의 발에 맞아야 한다. 그래서 신을 고를때 나의 발에 가장 잘 맞는 것을 찾는다.
따라서 이 신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이다.

그러나 종교적 신은 운동화 신이 되어서는 안된다. 만일 종교인의 신이 운동화 신처럼 되면 가정과 사회는 분열되고 밤낮으로 튀격태격 싸움질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심지어 폭력적인 전쟁과 테러가 일어난다.

나/우리의 신(god)에 대해서 말할 때에 우주적인 삶의 방식과 비전을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운동화 신으로 전락해서 무용지물이 된다. 그래서 그런 신이 오늘 설득력과 효력을 잃고 죽었다.

교회들은 언제까지 운동화 신을 부등켜 앉고 예수 믿는 사람만 구원받고 천국에 간다는 망상에 빠져 있을 것인가? 늦지 않았다. 오늘이라고 운동화 신을 아낌없이 내버리고,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신을 살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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