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십육국 시대, 오대십국 시대 중국 대륙은 혼란스러웠다. 수많은 나라들이 세워져 개나 소나 황제가 되었다. 오호십육국은 후한이 망하고 오랑캐들이 중원에 들어와 나라를 세우던 때로 실제로는 16국이 넘었고 오대십국은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통일하기까지 약 70년 동안에 일어난 흥망성쇠다. 열 나라의 흥망성쇠, 그 마지막을 장식한 후주(後周) 이야기다.
후주는 9년만에 없어진 나라로 마지막 황제는 공황제(恭皇帝), 이름은 시종훈 (柴宗訓)이다. 시종훈이 황제가 된 것은 7살 때로 연운16주 탈환을 위한 통일전쟁에 금군 사령관 조광윤이 원정군 사령관이었다. 그런데 휘하 장군들은 7살짜리 황제가 불안해 조광윤을 강제로 황제 자리에 앉혔다. 조광윤은 공황제로부터 선위 받는 형식으로 황제가 되었으니 송 태조다.
송나라는 천하통일을 했다. 그런데 우리 역사도 그렇고 중국 역사도 그렇고 유럽 역사도 그렇고 몰락한 왕조의 황제나 왕, 그 가족들은 신하들 손에 비명횡사하기 일쑤이고 살아난다 해도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데 후주 공황제, 이제는 황제가 아니니까 이름을 불러도 되는데 시종훈은 예외다.
송 태조 조광윤은 시종훈과 그 일족들을 우대했다. 그리고 유훈을 돌에 새겨 후임 황제들이 지키게 했는데 시씨 일족을 우대할 것, 선비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 것, 조광윤은 자신이 군인이었으나 정부를 문민통제에 두었다. 송나라가 문약하다는 이미지가 있는 것은 문민우위 정치 때문이기도 하다.
수호지에 나오는 인물 중에 소선풍 시진이 있다. 시황제 후손인 시진의 집에는 반역 죄가 아니면 무슨 죄를 지어도 처벌하지 않는다는 단서철권이 있다. 천하의 호걸들, 수호지에 나오는 호걸들이란 죄 짓고 도망 다니는 인간들인데 이들은 꾸역꾸역 시진의 장원으로 몰려들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투쟁에서 밀리면 역적으로 몰려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데 "선비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송 태조의 유훈에 따라 송나라 때는 권력투쟁에서 밀려도 목숨을 잃는 일이 없었다. 고작해야 벼슬에서 물러나거나 좌천되는 정도였지 피비린내 나는 정치보복은 없었다.
송나라는 금나라와 전쟁에서 패해 북쪽 지방을 잃어버리고 양자강 남쪽 땅을 겨우 지킬 수 있었다. 수도는 개봉에서 임안으로 옮겼다. 이것을 남송이라고 하는데 수호지도 남송 시대를 배경으로 지은 소설이다. 전쟁에서 패해 황제가 포로로 잡혀가는 혼란기에도 시씨들은 안전하게 남쪽으로 모셨다.
금나라가 망하고 금나라보다 훨씬 강한 원나라(몽골제국)가 남송과 전쟁을 시작했다. 남송은 전쟁 기계 몽골제국을 상대로 3차에 걸쳐 45년간 전쟁을 했다. 남송의 마지막 전투는 애산전투다. 지금의 홍콩 부근에 있는 애산에는 남송 마지막 함대 800척이 모여 구름 떼처럼 몰려드는 몽골 함대와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이 마지막 전투에 시씨들이 몰려 들었다. “300년 은혜를 갚겠다.”면서. 송나라 조정에서 녹을 먹던 수많은 관료들과 일족들도 몰려 들었다. “살아서 송나라 신하였으니 죽어서도 송나라 신하가 되겠다.”면서.
마지막 재상 육수부는 최후가 다가오자 7세짜리 황제 소황제를 안고 바닷물로 뛰어 들었다. 몽골 기록에 의하면 바닷물에 떠오른 시신이 10만구였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송나라는 망했으나 300년을 지켜온 송태조의 유훈은 “국가는 끝까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라가 망할 때 몸을 던져 순국한 경우가 송나라때 가장 많았다고 하는 것도 지켜야 할 원칙을 끝까지 지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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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제주지방법원에서 4.3 군법회의 수형인 30명에 대한 직권재심이 있었다. 이번 재심에서는 불법적 군사재판으로 구속되어 수형 생활하다 6.25 사변 직후 행방불명 된 30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무죄를 선고받은 고 고성우씨의 동생 고성흠씨가 재판부에 “고맙다”고 하자 장찬수 부장판사는 “고맙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들 피해에 대해 너무 늦게 명예회복을 해줘 오히려 국가가 미안하다고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