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ss님, 안녕하세요. 전에 제가 님에 대해서 솔직하시고 열정적인 분이시라고 속견을 말씀드렸는데, 제가 틀린 판단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나오시는 것은 평신도이긴 하지만 님께서는 나름대로 신학적 신앙적 판단력을 가지실 정도로 소양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역자 협의회에 대해서 제가 종교 권력이라고 했었는데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개별적으로 만나는 교역자님들이 훌륭하시지만, 저는 협의회란 단체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이지 개인 교역자의 신앙 인격을 비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단체든 힘이 있다고 믿으면 그 힘이 사회적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며, 그 표현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건입니다. 저는 교역자 협의회 분들 개인에 대한 사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제 말의 억양이 높은 것은 저의 사려가 깊지 못한 것이므로 사과드립니다.
님께서 퍼온 만민교회 건은 퍼오셨다고 하더라도 원저자나 신문사의 허락없이 퍼온 것이기 때문에 법적 책임은 님께 있는듯 하구요. 음원을 퍼와서 요즘 벌금 무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판례로 어느 단체를 이단이라고 지목했다고 명예훼손은 아니었습니다. 내 신앙적 입장 (즉 정통)이라는 순수 신학적 신앙적 입장에서 나와 다른 개인이나 단체를 이단이라고 하는 데는 특별한 법적 문제가 없다는 것이겠지요. 이와는 달리 이단은 나쁘다는 근거없는 윤리적 비판을 했다면 법적인 소송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법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Ross님께서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했다기 보다는 기사에 근거해서 말씀하신 것 같아서 님의 순수한 뜻을 상대방도 잘 이해하시겠지요.
제가 우려하는 것은 님의 성서에 대한 태도입니다. 성서의 특정구절을 인용하거나 님이 생각하는 전통적인 신앙에 근거해서 거기에 맞지 않은 모든 종교는 다 이단이라는 것은 올바른 태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의도치 않게 삭제된 저의 글에서 그러한 성서읽기를 prooftexting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성서가 지닌 역사적 문화적 text와 context는 완전히 무시한 체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가령, 레위기의 정결법은 전혀 안지키면서 레위기의 몇 구절로 자기 주장이 옳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다른 말로는 동어반복 (tautology)라고 합니다. 동어 반복적 진술은 –가령 이단은 이단이다는--우리에게 아무런 지식을 주지 못합니다.
님께서 믿음이 좋을 수도 있고, 교역자 협의회 분들도 깊은 신앙이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님처럼 하나님은 알 것이라 등등은 우리에게 어떠한 지식도 전달해 주지 못합니다. 토론에도 도움이 안됩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오직 언어적 진술로만 가능합니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무지막지한 무대포가 되거나 우리에게 전혀 통하지 않은 방언 (Glossolalia)이 되고 맙니다. 신학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계시의 말씀이든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경험이건--언어라는 도구를 통하여 논리적으로 정합적으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신학자는 될 필요는 없지만,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은 신학과 인문학의 거리가 별로 멀지 않아 서로가 소통이 참 잘되는 편입니다. 우리가 신앙적 신학적 토론을 위해서는 나의 생각이 항상 틀릴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이 가장 중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단비판가가 오히려 이단으로 정죄당하는 것은 바로 서로가 폐쇄적 소통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는 제가 아래 글에서 지적했듯이 무엇 (what)이라는 본질을 묻기 전에 그것이 왜 (why) 어떻게 (how) 발전되었는지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이렇습니다. 이 번에 만민교회 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캘거리 한인교역자협의회에선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규정하려 했습니다.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천주교와 개신교의 신학적 교류가 눈부시게 발전된 상태에서 좁고 얕은 개신교적 신앙관으로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개신교 집단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제 2 바티칸 공의회에선 개신교나 다른 기독교 종파들을 형제 기독교인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두번째 사건은 베레아 운동을 통해서 축귀로 유명한 서울의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의 시무언 칼럼을 문제 삼아 캘거리 한인교역자 협의회에서 또 교회내신문 베포금지 광고 금지를 하려고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김기동 신학에 대한 비판적 조명대신 한국의 통합예장이나 한기총 등에서 이단이라고 하니까 그냥 이단이라고 한 것이죠. 축귀야 성서에 예수도 행한 것이었고, 선교사들도 열심히 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장로교 출신 목사 중에 한국 교회사를 안배운 분은 없을 것이고, 초기 교회사 중에서 네비우스 (Nevius) 선교 방법을 모르신 분은 교회사 시간에 졸았거나 공부를 엄청 안하신 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 선교사로 있었던 네비우스가 [Demon Possession]이라는 책을 썼다는 사실을 아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은 원래 1894년에 출판된 것인데, 1969년 다시 프린트되어 나온 것입니다. 이 책에서 네비우스는 중국에 온 선교사들에게 설문 조사를 하였는데 선교사 대부분이 귀신축출을 시행한다는 “충격적인”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선교사들의 초기 자료도 귀신축출의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김기동 목사는 선교사들의 귀신 축출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까? 예수를 제대로 따른 사람처럼 안보입니까? 믿기지 않으실지도 몰라, 제가 쓴 것과 인용한 것을 다시 인용해 드리죠. 제임스 게일은 캐나다인 최초의 한국 선교사로서 나중에 미국인 선교사 미망인과 재혼한 다음에 미국 장로교 한국 파견 선교사가 된 분입니다.
James S. Gale’s work contains vivid descriptions of Christian exorcism, demonstrating how missionaries confronted demonic phenomena in Korea:
Some of us have come East to learn how wondrously Jesus can set free the most hopeless of lost humanity. We have come to realize that there are demons indeed in his world, and that Jesus can cast them out; to learn once more that the Bible is true, and that God is back of it; to know that his purpose is to save Asia, and to do an important part of the work through young Americans, Canadians, Britons, and others, who will humbly bow before Him and say, “Lord, here am I; send me” (Gale 1909, 89).
Through this analogy, they tried to find a method of confronting demons, and a solution to the overcoming of demonic phenomena in Korea. For them, only Jesus could rule over demons: “Never before in the history of Korea was the world of demons seen smitten hip and thigh.” Now at last there was reason for “rejoicing for victory over the evil one” (Gale 1909, 89; Battles 1918, 92).
제가 님께 걱정되는 것은 혹시 은사론 이야기 하시다가 나중에 다른 정통파들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당할시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단비판가들은 비스무리 야시시 한것도 다 쉽게 이단으로 만들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이단비판가들이 이단 비평말고 자기 자신의 신학적 성찰을 했을 경우, 바로 그것이 이단으로 몰릴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한국의 이단비판가들을 통해서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단은 만들어진다고 좀 과장된 표현을 한 것이죠. 신학적 판단은 하느님이 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인간이 하고, 역사적으로도 그랬습니다. 제가 엇나갔는지 모르지만, 현대의 성서 비판학을 받아들이지 않고 성서를 문자적으로 의존하면 이단과 삼단은 항상 존재할 것입니다. 어떠한 종교 텍스트도 비평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열려 있는 마음이 없는 이상 이단은 계속적으로 생성됩니다. 댓글이 너무 길었군요. 죄송합니다. 아프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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