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주류는 왜 윤석렬을 지지할까?
한국 개신교 80%가 복음주의입니다. 이들 중 대부분이 윤석렬을 지지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요?
그들이 믿음으로 그러한 행위를 한다고 주장하는 데, 그들의 믿음이 무엇일까요?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데 누가 옳은가를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인식과 가치관의 차이가 뚜렷한 구별에도 불구하고 서로 양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믿음을 행하는 그 방법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밝히려고 합니다.
즉 성서읽기가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를 밝히려고 합니다.
성서에서 믿음이라는 말을 최초로 그리고 가장 많이 사용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믿음이 무엇이라고 개념정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많이 언급된 로마서도 믿음이 무엇인가를 쓴 성서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믿음을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를 밝힘으로써 그 믿음이 무엇이고 현재 복음주의가 어떤 오류에 빠졌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1세기 성서저자들 모두가 그리스도 복음을 세계에 전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본국보다 해외에 더 많이 살았기 때문에 각지역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바울은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독립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의 1차 독자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신약성서 언어가 그리스어이지만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울의 로마서 목적은 하나님의 복음이 세계로 확장되었다는 것과 그것을 유대인들이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믿음을 사용한 방법은,
1. 예수에 의해 법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새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기 위한 표제입니다.(로마1:16-17, 4장)
2. 유대인들은 혈통과 법으로 하나님 백성되는 표증을 삼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는 믿음으로 하나님 백성되는 길이 열렸음을 선포합니다.(로마3:21-31)
그렇게 바울은 믿음에 대해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3. 하박국 선지자는 구원의 때가 오는데 그때는 믿음으로 살리라고 예언했습니다.(합2:4)
바울은 법이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기 때문에(3:21) 이제는 하박국 선지자가 예언한 믿음으로 사는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로마1:16-17)
믿음(복음)을 삶의 힘으로 표현합니다.(뒤나미스 가능태 1:17)
4. 바울은 아담의 시대가 끝나고 예수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데(로마5장) 안타깝게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5장에서 새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읽지 못하고 아담의 원죄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읽었고 오늘날 복음주의가 그렇게 읽습니다.
바울은 5장의 새시대 즉 하나님나라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게 되는데 그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4장에서 설명합니다.
즉 믿음에 대한 정의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하나님나라에서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말합니다.
4장에서 믿음을 정의하려 했다면, 바울이 창세기 17장의 법의 상징인 할례와 22장의 순종의 상징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한 사건을 말했어야 하는데 말하지 않았습니다.
5.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어떤 성과(행업)를 보여주어서 하나님 백성된 게(의로움을 얻음)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 백성되었습니다.
업적이 아니라 서로의 충실한 관계입니다.
이때 사용된 단어가 '아만'인 데 여기에서 파생된 '에무나'가 충실하게, 성실하게를 나타내는 행위언어입니다.(창15:6 로마4:1-3)
이 히브리어 에무나가 신약성서 헬라어로 번역될 때 믿음이라는 뜻의 '피스티스'로 20회, 진리라는 뜻의 '알레세이아'로 22회 번역되어 사용됩니다.
A. 이스라엘은 의심하지 않고 신뢰한다는 믿음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들의 신 개념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닙니다.
또한 그들은 태어나면 자기도 모르게 믿고 있는 종교국가이기 때문입니다.
행위언어인 '에무나'가 의심하지 않고 신뢰한다는 그리스어 '피스티스'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리스 신개념은 전지전능한 신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는 다르게,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믿음(피스티스)'이라는 단어가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행위언어가 그리스의 심리언어로 변경되었습니다.
한편,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사용하는 믿음도 심리언어가 아니고 행위언어입니다.
예수께서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할 때도 혈루병 앓는 여인 스스로가 차별하는 분리장벽을 깨는, 그 여인의 행위를 말함입니다.(마가5:25-34)
우리는 행위언어가 심리언어인 신뢰라는 의미로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B.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믿음이 새로운 삶을 주는 힘임을 말합니다. 믿음을 통해 죽은 사라의 태가 열려서 이삭을 낳습니다.(4:17-19)
또한 바울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예수를 살리심을
새로운 삶으로서의 믿음의 근거라고 합니다.(4:24)
복음서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복음이고 바울 등 사도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김세윤 교수와,
바울이 하나님나라를 모르고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했다고 하는 김영한교수 등의 주장은 이렇게 로마서 4장을 바르게 읽지 못해서 입니다.
바울이 4장에서 예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라고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이 새롭게 열리는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힘인 데, 그 힘이 새 삶(생명)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예수 십자가와 부활에서 그 근거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말 성서 로마서 4장 21절은 바울이 이러한 사실을 확신한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 확신은
'플레로포레오'로서 수동태인 내가 확신을 받았다 입니다.
즉 내가 확신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확신을 주셨습니다.
같은 말 아니냐고요? 네 같은 말 아닙니다. 믿음의 행위에서 내가 주체가 되면 타자가 없습니다. 믿음에서는 항상 하니님이 주체입니다.(이말도 애매하긴 하죠)
또 로마 8장 38절에서 내가 확신하노니로 번역된 '페이도'는 내가 설득당했다(수동태)입니다. 그러나 능동태로 잘못 번역했습니다.
즉 내가 확신하노니가 아니고 내가 설득당한바 입니다.
그리스어 동사에 능동태와 수동태가 있습니다.
한국의 초기 번역자들이 당시 한국인들을 깨우기 위해서 수동태 동사를 능동태로 번역했습니다.
로마서에서 내가 확신한다는 동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확신을 받은 수동태입니다.
나의 주장은,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기독교 식으로 나타내는 행위언어이고,(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어서 믿음의 확신행위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는 것을 따르는 행위이고(플레르포레오4:21) 하나님께 설득당해서 하는 행위입니다.(페이도8:38)
믿음은 내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뜻을 행하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끊임없이 질문하며 하나님 뜻을 찾으며 사는 구도의 길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어떤 확신에 따른 행위를 하면 복음주의자들인 전광훈이나 손현보처럼 극렬 투쟁을 하게 됩니다.
믿음이 확신이 되면 역사인식이 결여됩니다.
6,25 전쟁과 5.18 광주항쟁 같은 아픔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역사인식이 아니라 자본주의 이념을 지켜야 한다는 확신이 믿음으로 둔갑합니다.
우리는 복음주의가 믿음의 방법론에서 길을 잘못 찾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주의가 윤석렬을 지지하게된 뚜렷한 이유는,
1. 믿음을 확신개념으로 파악해서 자신의 신념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의 자본주의 가치를 윤석렬이 잘 지켜주리라고 생각합니다.
2. 믿음이 확신개념이 되면 역사의식이 결여됩니다.
유물론 역사(발터 벤야민)란, 영웅사관이 아니라 과거 역사에서 고통받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오늘 나의 삶에 와있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강 작가의 삼촌목사가 이러한 역사인식이 없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과거는 잊고 현재의 가치에 충실하자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이 기득세력의 주장입니다.
우리 생각과 마음은 항상 양가 감정입니다. 어느 것을 결정하면 그 반대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신뢰로 작동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확신이 되면 괴물이 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이 괴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질문하며 구도하는 믿음으로 자유와 평화를 얻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