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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을 아시나요
작성자 민초    지역 Calgary 게시물번호 2835 작성일 2010-06-19 11:01 조회수 1663
주 : 6.25 전쟁 60년 돐을 맞이하여 한국 문협 명예회장이며 예술총연합회 수석 부회장이신 성 기조 박사께서 보내온 글입니다 한번쯤 읽어 본다는 것도 그 때를 다시 되 새김 할 수 있을 것 같아 퍼 왔습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民草


성 기 조

6ㆍ25가 60주년이 되는 해다. 6ㆍ25를 사변이라고도 했다. 그 다음에는 전쟁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다 남침이라고도 말했다. 사변이나 전쟁이나 남침이나 총칼을 앞세워 싸워서 죽이고 강토를 초토화한 것은 똑같다. 숱한 이산가족과 전사자들, 그리고 제명대로 살지 못한 죽음을 당한 사람은 숫자로 밝힐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오순도순 잘 살던 집안이나 마을이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고 한데로 밀려나는 것을 숱하게 보아온 나는 6ㆍ25의 참상을 그대로 그려낼 수 없다. 너무도 참혹했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다. 아침을 먹고 약속대로 정구를 하기 위하여 학교로 갔다. 정구부를 맡고 계신 황선생님, 그리고 그 날 함께 정구를 하기로 약속한 멤버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2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롤러로 코트를 밀고 있을 때, 학교 방송실에서는 음악을 내보내고 있었다. 운동장 뿐 아니라 학교 교문 앞에 있는 버스차부에 몰려 있는 사람들까지 어깨가 들썩이게 만드는 행진곡을 틀어 주고 있었다.

한 3십 분 지났을까? 느닷없이 북한군이 삼팔선을 넘어 남한으로 진격해 온다는 말이 다급하게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타고 들려왔다. 신문이나 라디오가 집집마다 보급이 안되었을 때, 학교 방송실의 중계는 시골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소식통이었다. 계속 반복해서 휴가 나온 국군장병들은 모두 부대로 돌아가라는 말에 그 뜻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던 시절, 북한군이 왜 남쪽으로 쳐들어 왔는가도 따져보지 않던 시절에 우리는 전쟁을 만났다. 7월 1일, 내가 살던 예산읍에 까지 인민군이 들어온다는 말과 함께 일제히 소개령이 내렸다.

경찰서에서는 후퇴준비를 했고 군청이나 읍사무소 직원들도 피난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나는 피난가기로 결정한 아버지를 따라 식구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시루뫼 고개를 넘어 청양을 거쳐 부여로, 부여에서 서천을 거쳐 금강을 건넌 뒤 군산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온 식구가 길을 나섰으나 청양에 못 미쳐 아버지와 우리 형제, 남자들 셋만 남쪽으로 내려가고 나머지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정한 뒤 우리 가족은 헤어졌다. 그리고 10월 28일 국군이 수복한 뒤 다시 집으로 돌아 올 때까지 숱한 고생을 했다.

인민재판을 하는 광경도 보았고 죽창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광경도 보았다.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벼 모가지에 붙어있는 낱알을 세는 모습도 보았고 청년들이 징용으로 끌려가는 모습도 보았다. 공산당을 반대했다고 집에 불을 놓고 재산을 몰수하는 현장도 보았다. 눈을 감고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면 마음이나 편할 것이지만 이런 일들을 일일이 보고 난 그때의 심정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도 가졌다.

UN군과 국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남하했던 군인들이 북진할 때, ‘이제는 살았구나’란 생각을 하고 소리 높여 만세를 부르면서도 한편으로 겁이 나기도 했다. 공산당과 인민군이 다시 내려오면 어쩔것인가? 그때의 조마조마한 생각은 말할 수 없다.

역사에서 배웠던 전쟁, 문학에서 읽었던 전쟁의 모습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참혹한 현장을 겪으면서도 목숨만 부지하기 바랐던 그 시절의 내 초라한 모습은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러나 60년 대를 지나 70년 대를 살아오면서 나라 꼴이 잡혀갔고 삶의 희망이 보일 때, 우리들은 굶지 않고 먹는 것만 바랐고 하나라도 배워야 한다는 꿈이 머리와 가슴을 짓눌렀다. 그런 험했던 시기를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가슴을 울리는 전쟁문학도 그리 많지 않다. 수없는 죽음을 보면서도 고매한 인간성을 작품으로 그려 내지 못했다.

겨우 해낸 것은 먹고 사는 것만 해결하는데 급급해서 죽이고, 속이고, 거짓말하고, 빼앗고, 뺐는데만 정신을 쏟았다.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은 흩어지고 거짓말하고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꽉 차있었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북쪽 집단들이 꾸미는 일을 빠짐없이 체험하고도 그들과 손잡자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두둔하는 사람들도 속출한다. 민족이 분열하면 그 결과가 무엇인지 알만한 사람들이 자신의 야욕 때문에 두 눈을 감는다. 어찌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그들과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과 손잡자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슬픈 일이다.

6ㆍ25가 북침이라고 말하는 사람, 그들의 노선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라꼴은 말이 아니다. 이런 무서운 현실을 속속들이 담아내는 거대한 문학작품이 나와서 민족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학만이 역사를 소상하게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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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풍크  |  2010-06-19 11:33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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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선생님의 글은 아니지만 선생님의 나라걱정하시는 마음이 이해됩니다. 더 이상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들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는거 같아 걱정입니다. 뿌리가 흔들린다는 것은 전쟁재발의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는 얘기니까요. 저희는 겪어보지 못했지만 전쟁의 비극은 상상이 됩니다.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하겠지요.

내사랑아프리카  |  2010-06-19 12:51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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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 선생님께 질문있습니다. 저를 좌파로 생각안하신다고 말씀하셨었는데, 이제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군요. 이념논쟁으로 만나지 않는다면 더 좋았을텐데, 그리고 지금도 저는 이념 논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퍼오신 글을 보면 요즘 젊은이들이 625를 잊고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민초님께서 경험하고 이해하신 625는 어떤 것인지 알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625를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저의 조부모, 부모님은 그것을 경험한 세대이며, 큰 피해자며, 어릴 때부터 저의 할아부지한테 귀가 닳도록 피난 가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부의 아들인 저의 큰아버지도 그 때 돌아가셨구요. 저의 이모부도 인민군들에게 잡혀 가셨다가 탈출하셨고, 저의 고향인 경남 함양은 625의 참상을 직접 겪은 곳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듯이 625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냐 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겪은 분들 중에는 극력한 반공주의자가 되기도 하며, 어떤 분들은 평화주의자가 되기도 합니다. 잘 아시는 사회 비평가이신 이영희 선생은 당시 육군 장교 출신이었습니다. 이 분이 나중에 중국에 대한 글을 쓰셨으며, 빨갱이 교수로 몰렸었죠. 문익환 목사는 UN통역관 출신이었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유학중이셨던 분이 귀국하여 통역관이 되신거죠. 장준하 선생은 광복군 출신으로 일제와 맞서 싸울 준비를 하셨던 분이었고, 친일파에다가 당시 남로당 출신인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은 후 반공군사독재와 맞서 [사상계] 잡지를 만들어 싸우다가 젊은 나이에 의문의 죽음 (타살로 추정)을 당하시지 않았나요? 일제시대부터 민족의 독립과 정신을 고취시킨 함석헌 선생도 [씨알의 소리]를 만들어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나라가 산다라고 하시며 저항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지 않았나요?

저는 민초님의 글을 존중하지만,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제목이 625전쟁을 아는지 물어 보셨기에 저희가 어떻게 알아야 되는지 알려 주십시오. 여기에 비판적인 글을 쓰는 분들이 주로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분들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625의 참상을 제대로 모른 철부지로 생각하지는 않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실례했습니다.

민초  |  2010-06-20 06:04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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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슈풍크님 저의 마음을 이해 하실려함에 감사를 드림니다.
2) Dr,kim 의 마음도 이해를 합니다.
민초는 이념이란 말 자체를 싫어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이념의 뜻도
잘 알지 못합니다. 몇해 더 살아온 인생의 경험에서 우리는 왜 이러고 있을
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예 컨데 2차 세계대전이 끝이 나고 오스트
리아라는 나라도 이념 분쟁으로 그 나라가 동강이 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소왈 식자라는 분들과 정치 지도자라는 분들이 모여서 우리가 이념 논쟁을
하면 국토가 쪼 갈라지니 이념이란 말 이념을 주장하는 지식인과 정치지도
자가 없는 통일된 나라를 만들자는데 뜻을 모아 오늘의 오스트리아를 만들
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2차대전후 남북의 지도자들이
모여 이런 대화를 할 수 없었나 하는 아쉬움과 지도자의 빈곤 참 애국자의
빈곤이 없었나 하는 점을 슬퍼하는 입장입니다. 소왈 먹물이 쪼금 들었으면
자기의 주장만 옳고 남의 주장은 다 트르다는 흑 백 논리가 오늘을 만들었
지 않았나 하는 비애를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이창에 이념이라는 논쟁이 없기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대한민
국 국민 전부가 나라가 통일될때까지 이념이라는 단어를 불식하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해 본답니다.
3) 6,25 전쟁은 위의 성 기조 박사가 제게 보내준 메일 그대로 저는 인식하고
있기에 우리 후진이 그 진실과 참상을 진솔하게 알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첨가 한다면 김 영삼 대통령때 모 대학에서 석 박사 공부를 하는 분들이
한 승주 외무 장관을 초청 특강을 한적이 있었지요 그 때 유일하게 저의
질문은 북한이 핵을 만든다면 통일이 되면 우리 것이 될 것인데 우리가 왜
북한의 핵탄 제조를 반대하느냐는 질문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
면 참 순진한 사고였다는 생각이 였습니다. 그 후 김 대중과 노 무현 대통령
을 거치며 돈 없던 북한이 우리 돈으로 핵을 만들었고 그 핵은 우리의 조국
의 형제 자매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북한 백성들은 아직도 아사 상태입니다
햇빛도 돈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북한임을 저 자신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단 한가지 변하지 않는 것은 적화 통일을 위한 목적만 변하지 않고 있슴을
어찌 하리요. 아무리 돈을 주고 햇빛을 쪼여도 옷을 벗지 못하는 것은 역
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4)6.25 전쟁 때 시골 우리 마을에 인민군이 주둔하였었지요 땅 마지기나 있다
는 지주 계급으로 몰려 어머니를 뒷산으로 모셔가 총살을 시킬려는 장면을
보고 그 때 내 나이 만 9살에 울기도 많이 울었던 기억은 평생 지울 수 없습
니다 어머니를 그렇게 총살코자 뒤에서 조정을 한 사람은 같은 일가 집안의
사람이 였지요. 그러나 그것도 잊고 한 때는 북한이 핵이 있으면 우리가 강
국이 된다는 정서를 갖인적도 있었고 김 대중 노 무현 정권을 지지 한적도
있었지요.그러나 흘러온 역사앞에 다시 생각을 반추하게 함을 부인하지 않습
니다.
5)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서는 이념 분쟁이 없어야된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
니다. 민초는 보수도 진보도 아니며 그 뜻도 잘 모르면서 dr.Kim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면 행여 인격을 무시하는 격이 될 것 같아 생각나는 대로 두
서없는 생각을 써 보았습니다.양찰하시기 바랍니다

민초  |  2010-06-20 06:54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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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의 연장선에서 한마디 더 남기고 싶음은 조국이나 이민 사회에서나 소위 좌파니 진보니 하는 이념 논쟁을 좋아 하시는 분들 어이 하여 북한의 3대 권력세습에 대하여서는 비판이 없고 북한 국민들 굶어 죽이며 핵을 만들어 같은 동포들을 겨냥하고 있슴에는 왜 비판이 없는지 답답하답니다. 남 북의 잘못됨을 똑 같이 비판하고 옳은 길로 가게 해야 되는데 무조건 한쪽은 나쁘고 한쪽은 옳다고 두둔하는 좌파와 종북은 옳지 못하다는 단견입니다 이념이 무엇입니까 정치가 무엇입니까 모든 국민이 편히 먹고 살고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에 이념을 마추어 투쟁도 하고 건설적인 길을 계척코자 노력하는데 지침의 역활을 해야 되지않나요 한쪽은 나쁘다는 흑백 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근시안적 사고라는 생각을 해 보기에 첨언을 해 봅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0-06-20 08:10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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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선생님, 답변감사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어른들의 증언을 통해서, 역사책을 통해서, 그리고 두 번의 미국의 걸프전과 아프가니스탄 전을 통해서 전쟁의 참화를 느끼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죠.

저는 민초님께서 존경하신다는 김구선생의 넓은 아량을 여전히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이 공산주의자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또 순진한 분도 아니었습니다. 백범일지에 쓰셨듯이, 상하이에 계실때부터 공산주의를 알고 경험하신 분이지만, 당시 남북이 갈라진 것을 무척 안타까워하셨지 않습니까? 우리같이 후대들은 그 분의 행동을 낭만주의적이고 순진한 발상과 행동이라고 평가할 지 모르겠지만, 그 분은 이승만과 박정희같이 권력에 탐욕하는 분이 아니었기에 더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는 남북문제는 민초님처럼 적대적 이념보다는 대화와 화해, 경제적 협력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통일이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릴 적 배운 중공이 지금은 대만과 정치적으로는 대립관계에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협력 관계에 있지 않습니까? 이른바 공사주의의 이념인 적화통일을 중국 역시 문을 열지 않았습니까? 중국의 한 국가체제주의는 대만을 적화통일한다는 공산주의 이념 때문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중화주의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기업에 큰 위협은 대만과 중국의 경제 합작이라고 하구요. 쏘련으로 대변되는 공산주의는 지금은 해체되어 러시아는 거의 자본주의에 편입되어 있는 상태이구요. 이 번에 공중폭발한 나로혼가 하는 것도 러시아 기술진의 도움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남한 정부에 비판적 개인이나 세력이 친북종복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저도 친북종복주의자겠군요. 저는 북한의 일당 독재체제가 해체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며, 김정일 세습에 대해서 누구보다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 체제 변화가 밖에서 외친다고 해서 쉽게 한 체제가 바뀌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국제관계에서 그 체제를 해체하려고 북한을 봉쇄하고 제제하면, 북한이 고립이 될지언정 체제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중국의 일당체제를 해체하라고 중국이 무너지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중국이 닉슨 독트린 이후 문호를 개방하면서 이 사회가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었는지는 민초님께서 누구보다 잘 아실 것입니다. 만일 닉슨이 중국은 여전히 공산주의 국가이니 일당체제를 버리지 않고, 인권상황을 개선하지 않은 이상 경제적 교류는 결코 없다고 했다면, 아마도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현재 쿠바와 미국의 관계를 보시면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렇다고 쿠바가 망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남한이 퍼준 것 가지고 북한이 핵개발에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북한 경제가 작다고 하더라도 남한이 퍼준 것으로 대포동 미사일도 쏴고 핵개발도 했겠습니까? 남한이 퍼주지 않아도 북한이 그 정도의 경제력은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금강산 관광은 cancel되었고, 개성공단은 교착상태에 있습니다. 사람마다 국제관계에 대한 제각기 다른 이론을 갖고 있겠지만, 저는 햇볕 정책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한반도의 평화와 미래의 평화적 통일을 보더라도 햇볕정책은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북한의 인권상황을 주시하며, 개선을 요구하고, 탈북자에 대한 복지도 계속 강화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소박한 생각입니다. 상하이 놀러가서 입 딱 벌어지고, 백두산 방문해서 중국 곰 쓸개 먹는데 혈안이 된 한국 사람들, 그럼 중국의 일당 독재와 인권 비판도 함께 하셔야죠. 북한의 인권상황은 현 체제가 붕괴되거나 개선되지 않은 한 개선되기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 자체의 인권개선 역량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중국의 인권 상황도 중국인들의 인권개선 역량에 달려 있겠죠.

민초님의 글에는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제가 볼 때 가장 이념적이시며, 반공극우 이념이 반영되고 있습니다. 만일 민초님의 이념을 현실 남북관계에 적용한다면, 현재 이명박 정부의 냉전이념과 천안함 사태 이후 전쟁을 불사한다는 그의 주장과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의 소박한 생각에 현재 남북관계의 우선은 냉전이 아니라 화해와 교류입니다. 남한 정부가 북한 고립정책으로 계속 밀고 나간다면 두 가지 결과 중의 하나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북한과의 냉전 고착으로 고립된 북한은 계속 이런 체제를 계속 유지하거나, 언제 급격히 체제가 붕괴되면서 대량의 난민 발생으로 남한이 감당하지 못할 상태로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한이 바라는 것도 아니고 다른 주변강대국들이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거의 자본주의화되어 가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있는 북한이 남침해서 남한을 먹는다는 가설은 거의 현실성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냉전과 고착에서 가장 큰 수혜자는 남한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것은 누구든 인정할 수 있는 가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명박 정권은 지금 그 길을 가고 있고,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실용외교를 한다고 하면서도 단 한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사람 때문에 남북관계가 20년은 후퇴되었습니다. 말씀이 괜히 길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피터팬  |  2010-06-20 10:14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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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6.25를 몸으로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전쟁의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하고 삽니다. 아주 모르는 철부지는 아닐거라고 감히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념 논쟁을 차치하고라도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햋볕정책에 공감하는 발언을 하면 무조건 좌니 붉은 색이니 하는 매도가 부담스럽습니다. 옛말처럼 없을때는 나랏님도 욕한다는데 하물며 민주국가에서 의견 하나 떳떳하게 말하지 못한다면 그 무슨 기가 막힌 노릇 아니겠습니까.
성기조님의 글이나 민초님의 글에서처럼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고 또다른 전쟁의 비극은 막아야 하겠지만, 냉전시대와 같이 무조건의 대립이 과연 동족상잔의 비극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시켜 줄 수 있지 의문입니다. 통상적으로 공격력이 수비력의 3배이상이 되어야 싸움에 확실한 승산이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북한정권이 무모한 도발을 할 수도 있겠지만, 대한민국이 국가 경제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상황에서는 결국 어떤식으로든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을수 밖에 없으므로, 극단의 대립으로만 치닫지 않는다면 햇볕정책이든 무엇이든 간에 우리의 의도대로 이끌어 갈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문학이 역사를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학만이 역사를 소상하게 그릴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대로 된 전쟁문학이 없는 것, 민족을 감동시킬 거대한 문학작품이 안 나온 것은 시대가, 아니 권력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문학 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과 창작이 시대상을 철저하게 반영하지요. 그러나 문학의 경우는 시대상을 제대로 그리지 못 할 수 있을 겁니다. 정권이나 권력에 글이라는 매개체로 쉽게 노출될 수 밖에 없으니 그만큼 제재와 탄압도 많겠지요. 6~70년대에 사회참여가 활발했던 문인들이나 민족문학에 속했던 문인들의 창작활동이나 사회활동이 철저하게 부서졌던 것을 상기해봐도, 서슬퍼런 군사독재 아래에서 제대로 된 전쟁문학이 혹은 위에서 언급하신 거대한(?) 문학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사회에 핑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좌파이던 친북이던 그런 사람들에게 핑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많은 문인들의 목적의식 부재와 사회 참여의식의 부족과 책임/의무에 대한 불성실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슈풍크  |  2010-06-20 22:36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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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6.25 60주년을 맞아 그 전쟁의 비극과 앞으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할 길을 생각하고 분열된 국론을 하나로 만들어 나가자는 충고의 글이신것 같은데 너무 과민반응을 일으키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극을 경험하신 어른들께서 나라 걱정하시는 것에 강하게 비판을 한다는 게 이해가 잘 안됩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0-06-21 12:19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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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중립적인 것이란 \"결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하물며 인간의 감성을 건드리는 문학이야 일러 무삼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일차적 목적은 현상의 서술입니다. 이런 면에서 문학과 역사학의 거리는 멀지 않습니다. 역사가 연대기적 기술에 머물지 않듯, 문학 역시 이야기의 주관에 한정시킬 수 없는 일입니다.

비평가들이 조정래의 [태백산맥]를 문학의 금자탑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죠. 그는 이 책을 통해서 허구적 인물을 통해서 한국 전쟁 당시 겪을 법한 일을 가장 잘 형상화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역사적 기술로 가능할 법한 당시의 시대상을 허구라는 도구로 재현했다는 것이죠.

소설이라는 허구가 그럴진대, 좀 엇나간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성기조님은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또 문학비평가로서, 현상의 서술에 더 엄격하셨어야 할 터인데, 비록 그것이 개인적 경험에 대한 서술이라도, 이른바 글쟁이로서 넘어야 할 선을 너무 많이 넘으셨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딴 것은 모르겠지만 저는 이와 같은 분의 글의 기조를 갖는 분에게 문학이론을 배운다면 학생으로서 견디기 힘들 것 같습니다.

antink  |  2010-07-01 19:01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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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 아프리카님, 소위 한국사회에서 진보를 내세우는 논객들이 대학에 들어가서 강연등의 형식으로 시국연설 하는 것을 들어보고 그런 말씀 하셔야 균형감감이 결여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을겁니다. 한겨레 신문 기자출신들, 진중권, 유시민 등이 얼마나 모질게 편향적인 시각으로 우파를 까는지 몰라서 그러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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