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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일을 맞아......
작성자 clipboard    지역 Calgary 게시물번호 3203 작성일 2010-10-21 12:13 조회수 3401
<sarnia 는 clipboard 의 또 다른 닉네임이랍니다^^> 10 월 26 일은 박정희 씨의 기일입니다. 그는 31 년 전인 1979 년 10 월 26 일 오후 7 시 40 분경, 당시 22 세의 여대생과 25 세의 여가수가 시중을 드는 청와대 옆 비밀요정에서 최 측근 세 명과 술을 마시다 그 측근 중 한 명인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가슴과 머리를 차례로 맞고 피살됐습니다. 당시로서는 한 국가의 비극이자 망신이었지요.   그가 피살된 비밀요정은 중앙정보부의 부장직속조직인 의전과 라는 요상한 이름의 부서에 의해 극비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이 시설은 그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종로경찰서는 물론이고 그 지역이 위수지역인 수도경비사령부 담당 경비단 (제 30 단 당시 단장 장세동 대령) 조차 접근이 불가능한 특수 지역이었습니다.  이 비밀부서의 책임자는 해병대 대령출신 박선호 씨였는데 자기 업무에 대한 회의와 고민이 심각한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대통령 나이의 손녀 뻘에 해당하는 여자들을 일 주일에 서 너 차례씩 발굴해서 공급해야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몹시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대통령으로서 불명예스러운 장소에서 비명횡사 한 박정희 씨의 공과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공과를 구분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말 이지요. 백 번 지당한 말 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지도자의 공과를 평가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공적과 과오를 서로 상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입니다.         1 차 대전 패전국으로서 국가적 파산에 이른 독일이 세계경제공황기인1930 년대에 승승장구한 시기는 묘하게도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시기와 일치합니다. 이 시기에 전쟁 중 파괴된 생산시설 대부분이 복구됐고 국가의 대동맥인 아우토반이 건설됐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 경제재건의 선구자로 치켜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네오나치주의자들이 아니라면 말이죠.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와 폭력지배로 인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결과적으로 26년이 늦어졌고, 그 26 년 (1961 년부터 1987 년 까지) 동안 철저하게 파괴된 민주사회의 문화적 토양을 재건하는데 또 수십 년을 소비했습니다. 불합리와 폭력, 부정과 권위주의의 잔재들은 2010 년 오늘도 대한민국 여기저기서 악취를 풍기며 남아있습니다. 공동체의 피나는 노력으로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요. 박정희 씨와 일부 장교들의 헌법유린행위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경제적 가치로 환산이 불가능한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남긴 셈입니다.       암튼 그 분의 기일이 다가오니만큼 머리 아픈 이야기는 이쯤하고, 그 분의 기구한 인생역정 때문에 대한민국의 국가운명까지 기구해졌던 사연들을 반추하며 고인을 제 방식대로 추모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박정희 씨처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간 분도 드물 것 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참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분이지요. 그만큼 위기도 유달리 많이 겪었던 분 이고요. 첫 번 째 위기는 태아였을 때…… 며느리와 함께 임신한 45 세 어머니는 그를 낙태시키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지만 실패하고 출산합니다. 두 번 째 위기는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원래 교사직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그는 사소한 문제로 교장과 다투고 실직하게 되지요. 만주로 건너간 그는 만주군관학교 입학을 거절 당하자 ‘황국신민 멸사봉공’을 선언하고 혈서를 써서 간신히 천황군대의 장교가 되는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세 번 째 위기는 8. 15 해방, 독립투사들을 토벌하는 관동군 장교로 복무한 그에게 해방이란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을 것 입니다.     네 번 째 위기는 그가 공산주의자로서 남로당 군사책임자로 있을 때…… 여순항명사건으로 조직이 노출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 그는 수사실무자 김창룡 (후에 특무대장)과 백선엽 (후에 육군참모총장) 에게 사정하여 군부 내 남로당 조직원 수 백 명의 명단을 넘겨주고 그 대가로 사형을 면합니다. 수 백 명의 목숨이 그의 배신으로 인해 황천길로 사라진 대신 자신의 목숨만은 구명하게 되지요. 여기서 잠깐…… 전향이란 평소에 해야 그 자주성과 진의를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이지 목숨구명 등 거래가 필요할 때 한 전향을 어떻게 진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배신이라고 합시다. 배신했으니까 나쁜 놈이다. 이런 말이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말 입니다. 다섯 번 째 위기는 물론 한국전쟁…… 1950 년 여름 후퇴국면에서 육군소령으로 복직되기는 했는데 후방으로만 돌아다니는 바람에 전쟁 내내 총알이라곤 구경조차 해 본 적이 없는 당나라 유람객으로 전쟁을 무사히 넘깁니다. 여섯 번 째 위기는 쿠데타 직후. 당시 미국은 박정희를 새 권력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불법 쿠데타로 합법정부를 뒤엎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공산주의자일지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었지요. 재수가 없으려니 북한에서는 황태성을 특사랍시고 내려 보냅니다. 황태성은 박정희가 어린 시절 가장 존경했던 셋째 형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로 뛰어난 공산주의 이론가이자 그의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지요.       황태성 특사사건으로 미국으로부터 축출위기에 몰린 박정희는 형의 친구이자 자신의 멘토였던 황태성을 간첩으로 몰아 죽여버립니다. 스스로의 위기는 모면한 셈이지요. 일곱 번 째 위기는 1974 년 이 해에 긴급조치가 연달아 선포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1973 년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악화된 한일관계에다 반 유신운동이 격화되고 이런 정세동향으로 인해 권력내부에 심각한 균열이 생겨 정권자체가 붕괴위험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권력균열의 한 축인 윤필용과 육사 11 기 출신 일부 장교들(당시 대령-준장급) 이후락 등을 제거하긴 했지만 권력기반자체가 엄청나게 취약해져 버린 것 이지요. 이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그를 구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두 번 째 부인 육영수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부인(김호남)이 있었는데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이가 어린 여대생과 연애행각을 벌이다 전쟁직후 소령으로 복직되자, 이번에는 느닷없이 충청북도 옥천의 거부 육종관의 둘째 딸 육영수와 재혼합니다. 육영수의 아버지 육종관 씨는 이 결혼을 펄펄 뛰며 반대하고 사위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를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긴 그 시대에 어느 아버지가 애 딸린 홀애비 (그 때 그는 김호남과의 사이에서 난 딸 –박재옥- 이 있었음)에게 고이 키운 처녀 딸을 시집 보내겠습니까?     암튼 당시 새로 개관한 국립극장에서 난데없이 날아 온 총알에 맞고 비명횡사한 그의 부인 육영수 씨 덕분에 그는 1974 년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여덟 번 째 위기는 1979 년 그 해 전반에 걸쳐 그의 숨통을 조입니다. 그 해 5 월 30 일 반유신강경투쟁 노선을 견지하던 김영삼 의원이 신민당 총재로 당선됩니다. 김영삼 씨는 1971 년 대선 이후 서로 반목해오던 DJ 동교동계의 지원을 받아, 체제순응노선으로 일관하던 이철승을 물리치고 새 야당총재로 등장한 것 입니다. 이 때 상황에 대해서는 제가 6 년 전에 써 놓은 아래와 같은 글이 있군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이철승을 누르고 당선되던 그날 저는 왠지 모르게 통쾌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반 이 지난 어느 여름날 밤 야당 당사에서 농성 중 이던 여공(당시에는 그렇게 불렀다.)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개처럼 끌려갔을 때 이 정권이 곧 끝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느낌은 신통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줄곧 박정희 혼자 이 나라의 국가원수였기에 다른 사람이 대통령을 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기 힘든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그 해 9 월, 멀쩡한 야당 총재를 밀어내고 정운갑 인가 뭔가 하는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 총재직무대행이라는 직함으로 신문에 등장했습니다. 어떤 놈들이 이런 바보 같은 짓을 꾸몄을까 하는 게 제 관심사였을 정도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정치공작 이었지요. 뉴욕 타임즈와 기자회견을 한 야당총재가 국회에서 제명되고 부마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박정희 씨가 죽었습니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나와 아무 애증관계도 없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렇게 기쁠 수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거액의 외화 밀반출과 보석밀수로 이름을 드날린 적이 있는 우리 학교의 이사장만이 전교생이 모인 채플시간에 나라가 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울먹이며 호들갑을 떨어댔구요. ------- 공적은 공적이고 과오는 과오이듯이 역사는 역사이고 개인은 또 개인 입니다. sarnia의 청소년 시절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한 사람의 기일을 맞아 sarnia 방식으로 그 ‘개인 박정희’를 추모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이 생전에 즐겨 듣고 불렀다는 엔카를 배경음악으로 넣어보았습니다. 친일파 어쩌구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구요. (일제차 몰고 벤또 좋아하는 sarnia 가 설마 박정희 씨가 엔카 좋아해서 친일파라고 하겠습니까?) 그냥 개인 sarnia 가 개인 박정희 씨를 추모한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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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위곰  |  2010-10-21 19:01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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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참 이렇게 과오가 많은 사람인줄 몰랐네요.
근데 제가 느끼기에는 글 전체가 좀 편향되어 있는 느낌이네요

내사랑아프리카  |  2010-10-21 19:23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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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편행되어 있는지 히위곰님의 말씀을 듣고 싶군요. 그 동안 편향되었던 것을 좀 바로 잡았다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그 동안은 이런 상식조차 뽈갱이로 몰렸죠. 또 \"개정일\"은 욕하지 않느냐고 딴나라 소리하는 분은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있죠. lakeside라는 분!<a href=http://www.cndreams.com/bbs/zboard.php?no=3174&id=free&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 target=_blank>http://www.cndreams.com/bbs/zboard.php?no=3174&id=free&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a>

clipboard  |  2010-10-21 20:18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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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위곰 님 안녕하세요.

제 추모사에 나와있는 내용은 편향이랄 것 없는 역사적 사실들을 나열한 것 입니다. 특히 그의 개인사에 관련된 것 중 일부는 1975 년 출간된 박목월 의 \'육영수 여사\'같은 관제 서적에도 모두 언급돼 있는 내용이구요. 박정희 자료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조갑제 씨도 동의할 내용들 입니다.

역사란 엄숙한 겁니다. 어떤 개인이 영웅이 될 여지가 없습니다. 역사에 영웅이 있다면 가짜요 사기꾼일 가능성이 많은 것 이지요. 다만 공적과 과오가 있을 뿐 입니다. 제 글 중 가장 중요한 요점은 공적은 공적이고 과오는 과오라는 겁니다. 서로 더하고 빼 보니까 공이 많더라하는 엉터리 선동가들의 사기에 속아넘어가지 말란 것 이지요. 제가 요즘 이런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주의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드라이한 자료들을 읽고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것 입니다. 좌건 우건 경도된 설득 따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 이지요.

그리고 아래 글을 아직 다 읽어보지는 않았는데, 박정희 시간에 김정일 김정은 이야기 꺼내는 것은 국어시간에 산수책 펴 놓고 앉아있는, 즉 공부못하는 학생들의 공통된 특징인 것 같습니다.

hk5672  |  2010-10-21 22:46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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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희희낙낙 거리고 있는줄 알았더니
어느새 다시와서 되먹지 않은 글들을 또 올리고 있군요
어디서 줏어다 짜 맞췄는지 모르겠으나 악의에차고
전체적으로 되먹지 않은 필체가 도다리과에 속하는
배은망덕하고 불순한 패륜아의 행태입니다
이러한 글을 올리면서 새디스트한 쾌감을 느끼는지는 모르겠으나
박정희 통치하에서 호강하며 자라지 않았다며는 아마도
역전의 홈래스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었겟습니다
개눈에는 X만 보인다고 안좋은 껀수만 돌아다니며 줏어온다고
수고가 대단히 많았군요
박정희씨가 정권말기에 차지철이의 농간으로 눈이 어두워 졌던것은
사실이지만 거시적으로 대한민국을 일으켜세운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당신네들 친일파니 공산당이니 잘못 인식된 과거를 물고 늘어지는데
어느정권때 군복무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두환정권때 군복무 한사람들을
싸잡아 한때 전두환이 쫄개 였으니 진보 좌빨 쪽으로 발걸음도 하지말라면
어떻게 생각하겠소 clip 씨가 올린글을 일일이 반론할 가치도 없지만
내 친구중 문경이 고향인사람이 있는데 아버님이 교사 박정희의
제자 였습니다 문경국민학교 졸업 앨범을 가보같이 귀중하게
보관하셨고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며 박정희 선생님이 어린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항일 민족혼을 기억하시더군요 조선인들을 무시하는
일본선생들을 호되게 꾸짖을줄 아는 의협심에찬 존경받는 선생님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을 부정부패 했느니 폭정을 했느니 말들이 많으신데
516 군사혁명이 일어날때 군과 국민들 대부분이 동조 했기에 가능했습니다
특전사와 해병대가 서로 견원지간이라고들 합니다 이 두군대가 서로
경쟁을 하다시피 한강다리를 건너 서울을 장악하며 혁명군을 지원했습니다
박정희가 평소 청렴결백하고 한 나라를 바로 새울만한 강한 리더쉽을
갖추었기에 가능했던 이야기입니다
60년대 이전을 살았던 사람들은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열악했던
대한민국을 기억합니다 아프리카의 캐냐 만도 못했던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력이 없었다면 ,당신네 진보라는 자들 의 행태를
볼때에, 잘 됐으면 아마도 필리핀이나 태국 정도 수준..

Scorpions  |  2010-10-21 22:54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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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형인 박상희, 그는 뼈속까지 좌익이였던 사람이며 민중을 마음에 담고 있었던 사람이였죠. 해방전 기자로서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가담했었고 해방후 대구항쟁 당시 선산 구미 일대를 담당하며 항쟁을 주도 하던중에 경찰의 발포탄에 사망합니다. 그의 사상적 노선은 오늘날 보수들에게 지탄의 대상이겠죠. 하지만 박정희의 형이라는 사실 하나로 그는 보수들 사이에서 터부시되는 존재라는 겁니다. 또한 그의 사위는 김종필이라는 보수의 거두이니 누가 그를 빨갱이라며 손가락질 하겠습니까. 그냥 덮어두지. 천하의 조갑제가 박정희어천가에 존경스러운 인물로 표현했을 정도니...자 그럼. 권양숙여사의 아버지로 넘어가서...여사의 아버지 권오석은 박상희와 비슷한 경력을 가진 분인데요. 남로당 선전부장을 하면서 전쟁당시 인민재판도 주관한 사람이죠. 같은 좌익이지만 이분은 진보주의자 노무현의 장인이다 하는게 문제였죠. 보수들이 가만 않있죠. 신문지상에 큼직하게 기사가 나오더군요. 노무현의 가족관계를 주절주절 장인이 어쩌구 하면서...웃기는 일이죠. 누구는 누구의 형이라 그냥 지나쳐주고 누구는 누구의 장인이라 깔때까지 까자. 이게 한국언론의 현주소에요. 박정희...연구에 연구를 더해도 애매모호한 인물이에요. 그 사람을 너무 잘 알던 사람들, 그러고 보니 다 죽었네요. 김형욱, 김재규, 차지철, 박종규 그리고 육영수까지...그를 잘 알던 사람들 다 일찍 죽어나갔으니 그의 존재는 후세에 신화로 감싸질수 밖에 없죠. 허무맹랑한 신화로...아니면 전설의 고향이던가..

Scorpions  |  2010-10-21 23:08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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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k님 그 당시 군인들과 국민들이 동조를 했다구요? 특전사 해병대가 서로 경쟁하면서 한강다리를 건넜다구요? 청렴결백한 사람이 왜 정상적인 민주적 절차를 생략하고 군대를 동원해서 쿠테타를 합니까? 님께 추천도서 있습니다 전설의 고향 박정희편 \"내무덤에 침을 #$%\" 조갑제 저. 완벽한 전설로 탄생되는 박정희를 만날 수 있습니다.

히위곰  |  2010-10-21 23:30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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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원래 박정희란 사람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정치적 견해도 뛰어나질 못합니다 여기서 활동하시는 몇분만큼... 그래서 그분들만큼 요목조목하게 지적하지는 못하겠구요.물론 전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아무 감정 없습니다. 공적이랑 과오랑은 구별되는거니깐요.
얼마전에 어떤분이 쓰신글과 답글들 통해서 과오도 엄청나다는걸 알고 나서부터요.저한테 답글 원하는분이 계셔서 말하는거지만.. 글 보면서 참 똑똑한사람이 반박하기 힘들게 이죽거린다는 느낌 받았습니다. 처음 시작부분은 객관적으로 엄격하게 봐주어야 한다고 하시구선 일방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 비판하시는것같구... 마지막에 아니라고는 하시는데 추모라면서 엔카 동영상 올려놓으면... 저는 동영상 보면서 참 기분이 이상하더라구요.
똑똑하신분이 이런 감정적인것까지 계산 못하셨을까요?

호수  |  2010-10-22 01:01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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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잘 모르겠습니다만, 1026사태가 일어 났을때 전 중학생이었으니까, 갑자기 시골동네에 간첩이 나타났고, 대통령도 죽었다는 소리에 학교에 조기가 걸리고, 그때는 진정 그분이 누구인지 정말 몰랐습니다. 촌동네에서 그냥 대통령이니까 물론 좋겠지...

나이들어 좌우 이념의 혼란기에 청춘을 보내면서 과연 무엇이 중요한지 무조건 보수에 반대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다만, 4천년 대한민국 역사에서 어느 지도자가 전체 한국인의 50% 이상을 중산층으로 만들었는 지, 그리고 오늘날 저 잘났다고 떠들수 있는 사람들은 어느나라 출신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지...

인간 개인을 보면 누구나 초라합니다. 다만 그가 무슨 생각과 무슨 의지로 일을 하냐에 따라 역사는 달라집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최근 60년간을 보면 정말 남들의 변화 속도에 10배는 더한 것이 한국입니니다.

논쟁은 좋습니다. 발전의 토대가 되니까요. 그러나 좀 더 한국이라는 국가와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이 보다 여유롭게 사는 방향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어떨까 싶네요.

오늘날 한국이 있는 것은 가난을 벗어나자는 명제와 그것을 묵묵히 따른 국민들의 의지와 노력의 결과라고 봅니다. 제발 서로를 욕하지 마시고, 서로를 북돋아 좀 더 발전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0-10-22 02:16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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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위곰님은 겸손하신 분 같군요. 한국 사람치고 박정희에 대해서 듣고 읽은 바가 없겠습니까? 여전히 남북이 분단되어 있고, 이념적 냉전이 유일한 곳이라 쉽게 의견의 일치를 보기란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박정희 사망이 30년 정도 밖에 되질 않았지만 상식의 선에서 이해하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꼭 전문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열심히 자료를 찾아 읽지 않으면 자기 이야기를 하기 힘듭니다. 이것은 박정희에만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한국 전쟁 역시 그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이 더 잘 한국 전쟁을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의 우리가 한국 전쟁을 더 종합적으로 체계적으로 알 가능성이 많습니다. 일단 중국이나 구 쏘련에서 나온 자료 접근도 용이하고, 미국 비밀 군사 자료도 열람 가능한 것이 많아졌구요. 당시 국제 관계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구요.

그러면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1차 자료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2차 자료라도 열심히 읽는 수밖에 없습니다. 클립보드님께서 지적하셨지만, 조갑제의 박정희 해석이 우리와 의견일치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분이 박정희 자료를 많이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같습니다. 조갑제 님이 극우 논객이 된 것이 그냥 하루 아침에 된 것이 아니죠. 나름대로 그 만큼 자료 발굴의 노동을 하고 발품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글 쓰신 분들 중에 열받아 인신공격하시는 극우님들이 많으신데 공통점은 공부를 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울 것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hk님의 글은 참 흥미롭습니다.

\"내 친구 중 문경이 고향인 사람이 있는데 아버님이 교사 박정희의 제자였습니다 문경국민학교 졸업 앨범을 가보같이 귀중하게 보관하셨고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며 박정희 선생님이 어린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항일 민족혼을 기억하시더군요 조선인들을 무시하는 일본선생들을 호되게 꾸짖을 줄 아는 의협심에 찬 존경받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위의 것은 흥미 정도가 아니라 쎈세이셔널한 것입니다. 조갑제님의 무덤 침 책은 여러 권으로 되어 있고 또 품절이라 아쉽게도 못 사봐서 그런데, 이 분이 당시를 어떻게 묘사했는지 궁금하군요. 박정희가 그렇게 항일정신을 고취한 선생님이셨는데 갑자기 친일의 선봉대가 되었는지에 대한 전환에 대한 인과성을 살펴봐야 되기 때문입니다. 고민거리를 주신거죠.

즉, 1932년 대구사범을 졸업한 박정희가 1940년까지 만 3년 동안 문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민주의 신경 군관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 교장인 나구모 주이치가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비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었다\"라고 생도들을 모아놓고 했다던데, hk님의 진술을 따르자면, 박정희는 완전히 싸이코가 아니면 위장술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이 무렵 그는 박정희 자기 이름을 일본식 다카키 마사오라고 했다가 곧 완전히 일본식 이름으로 오카모토 미노루로 개명을 합니다. 이 자는 또 1942년 10월 일본 육군 사관학교로 편입을 합니다.

자, 그럼 어느 것이 박정희의 생애에 대한 더 합리적인 인과성입니까? 역사란 인과성이 생명인데, 교사로 민족혼을 고취시키던 민족주의자가 갑자기 3년 정도 채우고 일본 군사학교에서 5년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1944년 7월 만주군 제 8단에 배속됩니다. 아마도 해방이 되지 않았다면, 박정희는 철저히 일본군 군인으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박정희와는 반대로 일본의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간신히 탈출하여 광복군이 된 장준하와 김준엽은 어떤가요? 친일분자였던 박정희가 가장 두려워 한 인물은 장준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친일과 독립이라는 두 개의 양립할 수 없는 길을 서로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군사 독재자와 민주투사라는 정반대의 길을 계속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1975년 장준하는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그는 독재자 박정희의 친일경력을 제기 했다고 국가 원수 모독죄로 옥살이도 하셨죠.

HK님, 그 박정희 존경하는 것도 좋고, 님의 친구 \"아빠\" 말씀 듣고 흥분하시는 것은 좋은데, 독재자 박정희를 싫어한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의 모델이셨던 장준하 선생의 자서전인 [돌베게]나 장준하의 친구였던 김준엽 교수의 자서전 [長征]도 안 읽어 보셨으면 좀 읽어 보시죠. 장준하 선생이 살아 계셨더라면 박정희를 엄청 친일분자라고 꾸짖었을 것 같은데, 설마 박정희와 대척점에 있었던 장준하 선생도 \"개눈\"이라고 비하하시지는 않으시겠죠? hk님 인신공격은 대단하십니다. 지난 번 나오셨던 분하고 비슷하시네요. hk님 댓글 읽으면 으시시합니다.

philby  |  2010-10-22 09:51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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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선생 때려치고 군관학교 간 것은 거들먹 거리는 왜놈들 꼴 보기싫어 나도 한번 해보자 하고 간거지 무슨 원대한 포부가 있어 간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혈서 쓴 것도 일본에 대한 지극한 충성심이라기 보다 식민지 청년이 육사들어가 출세 할 길이 그것 밖에 없으니 그렇게 한거지요.

근데 장준하는 박정희를 사람으로 여기지를 않았습니다. 장준하는 학병 나갔다 탈출해 독립군 들어갔는데 아무 생각없이 출세나 하려는 관동군 장교 박정희가 사람으로 안 보였을겁니다.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대통령 될 수 있으나 박정희는 안된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박정희는 참 희안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안동일 변호사, 강신옥 변호사 증언에 의하면 수청든 여자가 200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대부분이 연예계통 여자이지만 반반한 간호장교들도 수청 들러 갔다니... 참.
그런 사람이 낮에는 농부들하고 논두렁에서 막걸리 마시고.

그나저나 요즘엔 내가 땅을 딛고 사는 캐나다 생각하며 곤혹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저는 피에르 트뤼도 수상의 정치적 이상과 행적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트뤼도 수상이 주창한 복합문화주의가 갖고 있는 부작용을 볼 때마다 난감합니다.

예를 들어 딸을 명예살인한 시크교도들이 \"캐나다 형법보다 종교법에 회부해달라\"고 주장하거나 비기독교인 부모들이 학교에 와서 \"우린 예수 안 믿으니까 크리스마스 트리 치워달라\"고 요구 하는 것...

복합문화정책이 서로 다른 걸 인정하면서 융합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융합은 안되고 서로 다른 것만 부각된 것 같아 본래의 의미를 잃는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는군요.

다른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토마  |  2010-10-22 10:10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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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비님 오랜만에 뵙네요 (뵌적은 없지만 여기서 글을 뵙는것도 뵙는거니까요.)

마지막에 쓰신 말 적극적으로 동감합니다. 마침 위에 지란지교님께 이와관련해서 여쭈어 놓은게 있는데요... 제 의견을 여기서 짧게만 얘기한다면, 저는 네덜란드의 3당이 된 PVV당과 같은 정당은 절대 지지하지 않겠지만 반이슬람/반이민의 기치를 든 이 정당이 3당으로 도약하게 된 이유는 분명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는 무슬림들이 부추긴면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비근한 예로 맘에 들지 않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그 영화감독을 살해하는 일따위가 일어나는 것이죠. 네덜란드처럼 tolerant 한 사회에서 살려고 선택을 했다면 그 tolerance 규범을 그들이 받아들여야 할것입니다.

카나다에서 사는 새로운 이민자들도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할 것같습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0-10-22 10:11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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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합니다. 1932년은 박정희가 진학한 해고, 졸업한 해는 1937년입니다. 올린 글을 지우고 다시 올리려고 하는 순간 Philby님께서 글을 올리셔서 새로운 댓글을 답니다.

다문화문제는 무겁고 큰 주제라서 별도로 글을 올리셔서 논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클립보드님, youtube 동영상, 이 글을 클릭할 때마다 작동해서 신경이 많이 쓰이는군요.

내마음의 평화  |  2010-10-22 18:30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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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에 대해서는 정말 호불호가 확실합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마치 조선일보 같지요. 추종하는 사람과 폐간하려는 사람.
그러나 박정희씨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가장 뿌리에서부터 왜곡시킨 장본인이며
지역감정을 악랄하게 이용하기 시작한 정치인이며
친일파가 각계 각층에서 비로소 어깨를 펴고 득세할 수 있도록
길을 열은 친일파 중의 친일파라는 것입니다.

공이고 과고를 떠나서
그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민족 정기에 끼친 죄악만으로도
역사 앞에 씻을 수 없는 죄인임에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clipboard  |  2010-10-22 19:09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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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got rid of &autoplay=1, sorry about that. sorry for english as well my office com does not support korean font.

have a good evening:)

clipboard  |  2010-10-22 21:27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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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 자료검색을 통해 세세한 부분을 확인해야 하는데 기억에만 의존해 쓰다 보니 몇 군데 오류가 보이는군요. 박정희 교사가 신경군관학교 입학이 거부되자 재차 응모하면서 지원서에 동봉한 편지에 혈서를 쓰게 되는데 그 내용이 제가 본문에서 언급한 ‘황국신민 멸사봉공’이 아니라 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라고 썼답니다. (1939 년 3 월 31 일자 만주일보) 박정희 라는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 의외인데 아마 창씨개명 (태평양 전쟁 이후 본격 시행) 이전이라 그건 것 같군요.

대구사범과 문경보통학교 시절 대체로 침울하던 박정희는 신경군관학교시절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1942 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위만주국 황제 푸이로 부터 금장시계를 하사 받고 일본육사 3 학년에 편입, 57 기로 졸업합니다.

그는 대체로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였지만 아울러 일본에 대한 충성심 또한 남다르지 않았다면 조선인으로서 이런 특전을 누린다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 입니다.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문경 교사 시절 장학사의 삭발령에 대들어 술상을 둘러 엎을만큼 민족의식을 발휘했다면 이런 특전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겠지요, 나중에 장발단속을 한 그의 긴머리 혐오증에 비추어봐도 삭발령에 반발했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 소리구요.

객관적 자료에만 입각해 냉정하고 상식적인 이야기만 합시다. ‘제자 아버님’의 덕담 같은 것이 끼어들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hk5672  |  2010-10-23 08:40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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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구원\' 과 \'거듭난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요즘 구원 받는다고 하면 여러가지 조건 들이 많이 붙습니다
성경 몇 구절은 외워야 구원 받는다고들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구약을 읽어 보면 목숨 부지 하는게 구원이었습니다
일제시대 2차 대전 당시 젊은이들이 전쟁에 총알받이로
끌려 가는게 의무였고 사지에 끌려가서 개죽음 당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보는게 인간의 본능이었겠지요
그당시 장준하씨 같이 학도병들이 전장을 이탈해서 독립군 광복군을
찾아 간 사람들이 죽음을 피해서 도주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격동하고 미래를 예측을 하기 어려웠던 그당시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수 있겠습니까 박정희가 일본군이 패망하는것을
확인한 후에 광복군을 찾아갔다고 기회주의자라는 오명을 붙여 자신의
죽음까지 불사하며 물고 늘어졌던 장준하씨가 옳은 행동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가 있고 무심코 다가선 줄이 잘못되어
인생이 뒤틀려 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중도에서 잘못선 줄을
이탈했다고 그사람의 평생을 평가 해서는 안되겠지요
박정희의 만주군 동료들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인들이 모인자리에서
일본은 망해야 될 나라이며 기회가 되면 광복군에 합류해야 될것을
자주 언급했다고 합니다 박정희가 교사 로 재직중에 만주사관학교를 선택하게 된데는 ,다분히, 자신을 몰아 부치던 일본인 선생들 순경들 관리들에 대한
보복적인 차원이었습니다 학교에서 한국민족혼이 담겨있는 노래를 가르치고 태극기 그리는것을 가르치는 조선인 선생을 일본인들이 가만히 보고있지 않았습니다 결정적으로 교사직을 그만두게 된 사건도 문경에서는
전설과 같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인 체육선생이 운동장에서 조선인 학생들을 학대하는것을보고 붙은 시비가 싸움이 되어버렸는데 체격이 왜소한 박정희가 많이 맞았고 , 하다하다 안되니 일본선생의 XX을 잡고 놓지 않아 병신이 되버렸다는겁니다 박정희가 사관학교를 선택하게 된데는 남다른 향학열도 있었다고 봅니다 대구사범을 열등생으로 졸업한 박정희가 만주사관 을 수석으로 졸업해서 일본 사관을 나왔다는데는 그당시 국립대학이라고 할수있는 사관학교에서 무상교육을 받을수 있었고 자신을 무시하던 일본인들보다 나아져야 겠다는 강한 집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에 일본군 장교복에 칼을 차고 문경에 나타난 박정희에게 일본 순사와
관리들이 모두 찾아와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향수가 있습니다
박정희가 일본노래를 좋아했다고, 전두환이 나까소네와의 회식에서
일본 노래를 불렀다고 비하하는 글들을 많이 보았었는데
일본 사람들은 한국노래 좋아하지 않습니까 저는 캐나다에서도
일본인들이 윤수일의 아파트를 열창하는것을 보았습니다
박정희가 70대 중반부터 저지른 독재에 대한 평가를 반론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사람의 대통령 장기집권을 좋아할 국민이 누가 있겠습니까
저 역시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한때 자신이 살았던 국가의 지도자를 쉬파리떼 같이 달라붙어 매도 해서는 안되겠지요

clipboard  |  2010-10-23 22:02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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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이나 해석의 차이야 어쩔 수 없지만 현대사와 관련된 진술과 관련해서는 사소한 부분이지만 hk 님께 이의를 한 가지 제기합니다.

\'차지철의 농간에 박정희의 눈이 어두워졌다\' 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을 왜곡할 우려가 있습니다. 차지철의 농간에 박정희가 당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의 농간에 차지철이 이용당했다고 봐야 정확할 것 같습니다.

이제 토론도 다 끝나가니까 격식 집어치우고 옛날 이야기하듯 가볍게 하겠습니다. ,

박정희 통치술 중 가장 중요한 비법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측근들을 분리 지배한 것이고 또 하나는 물불가리지 않는 충복을 적시에 쓰고 적시에 버리는 것 입니다. 그 물불가리지 않는 충복 중 가장 수명이 길었던 게 차지철이지요. 스스로 가치판단을 하지않고 무조건 충성하면서 비밀을 지켜주는 차지철이야말로 권력자가 사용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충복이었을 겁니다. 그는 실제로 \'각하가 곧 국가다\'라는 철학으로 박정희를 섬겼습니다.

월남전 당시 존슨 행정부로부터 더 많은 참전조건을 우려내기 위해 당시 국회 외무위원장이던 차지철을 참전반대론자로 만들어 이용한 것이나 1975 년 중정으로부터 건네받은 김영삼 사생활 사진들을 차지철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신민당내 반김세력인 이택돈 이택희 등을 이용해 김영삼을 순치시키는 공작을 짜낸것도 그 누구 다른 사람이 아닌 박정희 자신이었습니다. 이 공작역시 성공해 김영삼은 신민당 중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정희와의 영수회담에 응하게 되지요.

흔히 1979 년 중정의 삐딱행보를 김재규의 온건한 노선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도 단편적인 시각입니다. 권력의 행보와 위험감지에 가장 민감하고 정확한 조직이 바로 중정입니다. HK 님 연배가 어떻게 되시는 지 모르지만 혹시 1978 년 12.12 총선 (1979 12 12 사태가 아니고) 을 기억하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엄청난 금권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이 신민당에 1.1 % 패배한 그 선거요. 이미 이 때 후기 유신공화국의 경제정책을 사실상 지휘하던 김정렴 비서실장이 사퇴하면서 박정희 경제학은 파산선고를 하게되 됩니다. 중정의 삐딱노선은 김재규 개인이 아니라 그 조직의 논리에 의해 이미 이 정권이 오래 못 갈 것 이라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 이지요. 박정희는 이 점을 간파했기 때문에 차지철을 통해 중정을 무리하게 견제하려 했던 것이고 이 과정에서 \'비밀요정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 이지요.

박정희라는 인간을 너무 감상적으로 보시는 것 같아 잠깐 가볍게 옛날 이야기 했습니다.

hk5672  |  2010-10-24 07:47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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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에서 박정희의 70대는 70년대 입니다
차지철을 가볍게 보시는데 그당시 2인자로 대권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전두환을 직속부하로 두고 하나회를 관리 하면서 박정희의 눈을 가리고
온갖 나쁜짓을 도맡아 하던 사람이었는데 죽고 나서 동정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출신부터 비천했고 대위 계급장 에서 박정희 덕에 바로 금벳지를 달았는데 모두가 차대위로 불렀지 능력을 인정 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훗날 청와대 경호실 조회 열병 사열식 이란것을 만들어 청와대 공무원 수도경비사 군인들을 동원하고 각계각층 인사들을 초대해서 자신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고 과거에 자신을 비하하던 인사들을 차례대로 불러 모욕을 주었다고 합니다 박정권 말기 온갖 폭정과 비리는 그사람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lakeside  |  2010-10-26 18:16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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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가 박정희를 나쁘게 말한다고 해도
그는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뛰어난 지도자 중의 한사람 임에는 부정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가 재임 중에 잘못한 점도 있었으나 그의 과오에 비하여 공로는 실로 엄청남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김일성과 비교를 하면서 그는 독립투사요 박정희는 일본 군관 출신임을 강조하며 은연 중 김일성을 영웅화 하려는 사람들은 그즐이 집권하면서 이룬 것을 비교해 본다면 박정희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해방 후 전쟁을 겪으며 그 어려운 시절에 박정희라는 위인이 나타나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사실에는 부정하기 힘들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인권을 탄압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북한과 남한을 비교해 보십시오.
같은 민족이 다른 지도자 다는 체제 하에서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
그기 가고 민주화된 대한민국...
이제 국민들도 마음 놓고 불만을 말 할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지금 똑똑히 보십시오.
10년 동안 햇빛 정책과 친북 정책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문제가 터지면 북한에 강경대응을 한 것이 잘못 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어려움의 원인은 북에 잇는 게 아니라 미국이나 남한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핵무기를 개발한 것은 잘한 것으로 말하는 사람들.....
당신들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6,25를 해방 전쟁이라고 하다가 그게 아니면 남한이 일으킨 전쟁이 아니면
남한에서 유도한 전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통일된 공산주의 조선에 재캐나다 사회주의 동맹단원의 깃발을 힘차게 휘두르며 입장하고 싶은 건 아닌지요?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사람들을 교육시키겠다고.....
남들을 모두 나보다 무식하다고 생각하는 과오는 더 이상 계속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냥....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말하면 되는 거죠.
가르치려 들지는 마셨으면 합니다.
김대중을 찬양하는 사람이 있고 죽도록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며
노무현이 자살했을때 박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통곡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박정희를 민족의 원수로 생각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나와 다르다고 멍청하거나 나쁜 사람으로 보시나요?
모두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들이 나보더 못하다는 생각은 그냥 속으로만 하시길 바랍니다.
여기....
캐나다....
한국에도 모두 똑똑한 사람들이 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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