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제목을 이렇게 정했었다. '외설적이지만 착한 식당 외서댁 꼬막나라' 꼬막 식당 이야기가 맨 뒤에 등장하긴 하지만, 이 글에 이런 제목을 다는 건 사기성 호객행위라고 생각했다. 미련없이 그 제목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아무 제목도 정하지 않았다. 암튼 이 여행기는 그 연배가 2~30 대인 배낭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작성했다. 그 대상이 아닌 분들은 새겨서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기밀자료도 30년이 지나면 보안이 해제된다. 30 년이 지난 후부터는 기밀자료가 아닌 역사 사료로 취급하는 게 관례다.소설 태백산맥의 시대배경은 한국전쟁 전후다. 한국전쟁은 끝난 지 57 년이 경과했다. 따라서 한국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어떤 입장을 지지하더라도 주저하거나 겁먹을 필요가 없다. 한국전쟁은 어디서 일어난 전쟁이었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근데 싸움의 주체가 좀 애매하다. 이 전쟁은 처음엔 남한과 북한간의 전쟁인 것처럼 보였다. 약 보름이 지난 후엔 북한과 미국간의 전쟁이 됐다. 1950 년 7 월 10 일 대전협정으로 작전권이 미군사령관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전쟁 발발 5 개월 후에는 중국과 미국간의 전쟁으로 또 전쟁주체가 바뀌었다. 1953년 7 월 27 일 조인된 정전협정의 주체는 유엔군을 주도한 미합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형식상 (technically) 이 협정의 주체가 아니다. 기분 나빠도 할 수 없다. Technically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전쟁주체로 인정해 주니까 크게 기분 나쁠 건 없다. 정전협정과정에서 대한민국이 왕따를 당한 책임은 전적으로 이승만에게 있다. 그는 개뿔도 가진 것 없는 주제에 끝까지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이 때문에 미국정부는 이승만의 대통령직 축출을 고려하기도 했다. 누가 먼저 시작한 전쟁이냐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말들이 많다. 군사적 선제공격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현재로선 북한이 먼저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다는 증거가 압도적이다. 보급물자 조달이 어려운 춘궁기를 전쟁시작시점으로 잡았다는 것과 지상군 전력의 주력이 전차부대인 나라가 장마철을 전쟁시기로 선택했다는 것이 약간 이상하기는 하지만 암튼 드러난 증거가 그렇다니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다. 허나 전쟁의 윤리적 책임추궁을 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누가 먼저 주먹을 휘둘렀느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어느 쪽이 무고한 민간인을 더 많이 학살했느냐 하는 문제다. 전자를 묻는다면 북한이 할 말이 별로 없다. 그러나 후자를 묻는다면 한국과 미국의 처지가 딱해진다. 특히 미국은 쥐구멍이 열 개라도 모자라다. 단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더 이상하면 또 어떤 넘이 국정원에 신고할지도 모르니까. 각설하고……소설은 1948 년 겨울 여순항명사건 직후로부터 시작한다. 여순항명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배경 이야기가 필요하다. 참, 여순이란 안중근 열사가 수감됐던 감옥이 있는 중국 여순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라남도 여수-순천의 줄임말이다. 아시다시피 1948 년 5 월 10 일 남한만의 단독총선거가 실시되고 그 해 8 월 15 일 이승만을 국가수반으로 한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출범했다. 분단이 완전히 고착화 된 것이다. 근데……제주도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5.10 총선거가 무산되고 대규모 인민항쟁이 발생한 것이다. 남한만의 단독친미정권을 수립하려던 미군정의 계획은 큰 위기에 봉착했고 곧 초대 대통령에 오르려던 이승만의 야망역시 무산될 위험에 처했다. 제주도에는 인텔리들이 많았다. 일본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일본 유학파도 많았고 특히 이차대전 종전 후 일본에서 노동운동 경험이 있는 좌경성향의 활동가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이들의 영향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전국에서 총선거 보이코트가 성공한 지역은 제주도 한 곳뿐 이었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이걸 용납할 수 없었다. 섬 주민들과 경찰병력간의 첫 대규모 충돌은 총선 한 달쯤 전인 1948 년 4 월 3 일 발생했다. 이 날 밤 격노한 시위군중과 야산대에 의해 제주도내 12 개 경찰지서가 불 태워지거나 크게 파손됐다. 제주도에 있는 경찰병력만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하자 미군정은 서북청년단을 투입했다. 서북청년단은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들의 조직이었다. 그 상층부는 극우 백색테러조직이고 그 하층부는 건달 과 깡패들이 모인 껄렁패 집단이었다. 이들은 경찰과 합세해 섬주민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했다. 섬 주민들도 앉아서 당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자경단과 무장유격대를 조직해 이들에게 대항했다. 그 해 여름 내내 이 섬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된 시체들이 썩는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급기야 미군 공군전력이 동원됐다. 미군 전투기들은 마을 상공을 날아다니면서 무차별 공중사격을 퍼 부어댔다. 미군폭격기들이 마을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그 해 여름 제주도에서는 섬 주민의 3 분의 1 에 해당하는 8 만 여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4.3 자료는 부지기수로 널려 있으니까 그 피해상황을 알고 싶으시면 직접 조회해 보시면 된다. 예기치 않은 섬 주민들의 거센 저항에 당황한 미군정과 그 해 8 월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지상군 투입을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제 14 연대에 제주도 출병명령을 하달했다. 그런데…… 이 부대의 장교와 하사관 그리고 사병들이 이승만 정부의 제주도 출병명령을 거부했다. 출병명령만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란을 일으켜 여수와 순천을 장악하고 인민해방구를 선언했다. 여수 순천과 인근 보성 광양 고흥 등에 그 지역 지식인들과 학생, 좌익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즉시 인민위원회가 조직됐다. 인민위원회는 친일경찰과 관료, 악덕지주들을 색출해 처단했다. 혼비백산한 미군과 이승만 정권은 이 지역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해 일주일 만에 사태를 평정했다. 좌익 조직과 반란군이 산으로 퇴각하자 계엄군과 경찰 우익폭력단체는 좌익 잔류자들과 그 동조자들을 사냥하기 위해 집집마다 이잡듯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체포된 수 백 명이 재판과정도 제대로 거치지 않고 즉결처형 됐다. 이 지역의 좌익활동가들과 지식인 학생 들 상당수가 무기를 든 채 계엄군과 경찰 그리고 반공청년단을 피해 부근 야산으로 피신했다. 그들은 이 곳에서 야산대 즉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다. 바로 이 시점. 1948 년 여순사건 진압 직후 퇴각한 보성-벌교 지구 좌익 활동가들의 이야기가 태백산맥의 출발점이다. 소설 태백산맥은 바로 여기서부터 그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휴, 드디어 이 소설의 출발점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설명 끝났다.
제 1 권의 제목은 '한(恨)의 모닥불' ㅎㅎ 제목부터가 역시 문학적이다. 전혀 센세이셔널하지 않다는 말이다. sarnia 같은 사람은 아마 제목만 보고도 졸음이 올만큼 지루한 제목이다. 역시 소설가는 거짓말을 잘 못 하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소설가들은 제목을 잘 뽑는 전문가들이 아니다. 삼천포 시민들에겐 또 미안하지만 잠깐 삼천포로...... 제목에 관한 에피소드 하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아주아주 오래 전에 한국에 살 때, 어디선가 소설책 두 권을 공짜로 얻어온 적이 있다. 하나는 '고등어'라는 제목이었고, 또 하나는 '감색 운동화 한 켤레' 라는 제목이었다. sarnia 는 이런 제목에 전혀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지라 오래도록 이 책들을 한 구석에 오랫동안 처박아두고 읽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이 두 소설 모두 두 번 이상 읽었을 것이다. 직품성이니 구성이니 완성도니,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그냥 재미있었으니까 두 번 이상 읽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대 비슷한 생각을 공유한 비슷한 또래들의 이야기 였으니까. 고등어 겉표지를 넘기면 승용차 운전석에 요염하고 시니컬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작가 공지영 씨의 사진이 나오는데 고등어를 다 읽고 나서야 그 사진의 의미를 눈치챘다. 아마 이분은 운동권에 몸담았던 시절 칼같은 선배들로부터 이런 소리를 많이들었던 것 같다. "운동이 니 장식품이냐?' 여기에 대해 공지영 씨는 소설가로 성공한 뒤 이런 식의 대답을 '보란듯이'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 그러는 당신들 한테는 운동이 뭐 였는데, 교조적 원칙주의자들. 잘 났어 정말~" 아님 말고. 자자, 다시 태백산맥으로 돌아와서...... 지금 sarnia 의 수중에는 그 소설이 없다. 십 수년 전에 읽은 열 권 짜리 대하소설을 기억만에 의존해서 평론을 하는 건 무리다. 따라서 이 소설 평론은 하지 않겠다. 다만 이 소설이 담고 있는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인 벌교 땅을 밟아본 감회를 생각나는대로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것 정도로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sarnia 는 경전선 기차를 처음 타 봤다. 광주-송정에서 별교까지...... 철로변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굴곡이 많아 기차가 천천히 달린다. 원래는 부전(부산)까지 가려고 하다가 한 순간에 마음을 바꾸었다. 태백산맥 귀신이라도 씌웠던 걸까? 만우절이라면 귀신이 불러서 갔다고 해도 무방할텐데. 아고, 그러고보니까 밀양 영남루를 까먹고 안 갔네. 아랑 누님 미안해요. 바람맞혀서......
이 동네는 모텔도 진보적이고......
미용실도 진보적이다. 이 진보적(?) 인 동네 아이들은 62 년 전 이렇게 외치고 다녔을까? "인민유격대 화이팅"
이런 말을 읽은 기억이 난다. 순천에서 인물 자랑하지말고 별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고...... 그래서 그런지 대한민국 형님들 중에는 벌교 출신이 많단다.
대한불교천태종 제석산 흥교사 sarnia 의 종교배경은 기독교다. 그런데도 교회보다는 절에 들어설 때 마음이 편해진다. 언제부턴가 일요일에 교회에 가느니 차라리 팀홀튼이나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마시면서 음악 듣고 책 읽는 게 정신건강과 인격함양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sarnia 는 유신론 무신론 이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의 존재란 어차피 sarnia 의 머리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이다. 좀 쉽게 말하면 말도 안된다는 이야기지. sarnia 의 관심은 하나님 등등 초월적 신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게 아니라 자아의 본질과 기원에 관한 것이다. 혹시 무당 소화 누님은 뭔가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 sarnia 는 염상진 아저씨나 김범우 아저씨같은 인물보다는 소화 누님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뭔가 더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더 올라서......
부용교는 소화다리라고도 부른다. sarnia 는 지금까지 소화다리를 소설속의 인물 소화 (무당의 딸 빨치산 정하섭의 애인) 와 관련이 있는 줄 알았다. 근데 그 소화가 아니라 일왕 소화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여순 사건 당시 인민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친일경찰, 관료, 우익단체 회원들이 이 다리에서 살해돼 다리 아래 개천으로 버려졌다. 계엄군이 진주한 후에는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많은 수의 좌익활동가, 학생, 그리고 무고한 민간인들이 잔혹하게 살해돼 역시 이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 이 작은 개천은 시체로 뒤덮히고 강물은 피빛으로 변했다. 바로 여기가 밤이면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눈을 피해 남편과 자식의 시체를 수습하려 몰려든 아낙네들의 숨죽인 통곡소리로 가득했던 그 비극의 현장이다.
남도여관이다. sarnia 의 기억으로는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간부 임만수가 이끄는 토벌대 지휘본부가 숙식을 하던 곳이다. 나중에 들어온 올곧은 성격의 계엄군 지휘관 심재모로부터 불벼락을 맞고 모두 여관에서 쫓겨난다. '지금이 어느땐데 경찰 토벌대가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느냐' 는 이야기였지. 맞죠?
염상진이 이끄는 유격대와 벌교의 경찰병력이 격렬한 총격전을 벌이며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본정통 거리다. 염상진의 동생 염상구는 동네건달이다.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공부 잘했던 형 염상진에 대한 열등감과 증오심이 동생 염상구로 하여금 정 반대의 길을 걷게 만든 것일까? 그는 청년단 감찰부장이 되어 벌교의 좌익 가족들을 괴롭히고, 형 염상진과 총구를 맞 겨눈다. 염상진 염상구의 비극은 소설 속 이야기만이 아닌 엄연한 현실 이야기 이기도 하다.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손정도 선생을 기억할 것이다. 손정도 선생은 창덕학교 설립자 강돈욱과 조선국민회를 결성했던 김형직과의 인연으로 강돈욱의 외손자이자 김형직의 아들인 소년 김성주 (후에 김일성으로 개명한 북한 주석)의 후견인을 맡았던 인물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북한 주석 김일성은 기본계급, 즉 노동자 농민 출신이 아니다. 기독교적 종교 배경을 지닌 짱짱한 부르조아 인텔리겐차 집안 출신이다) 이 손정도 선생의 큰 아들은 대한민국에서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고 손원일 장군이고 작은 아들은 재미교포 친북인사 고 손원태 박사다. 큰 아들은 남쪽의 국립묘지에 작은 아들은 북쪽의 애국열사릉에 각각 묻혀있다. 염상진 염상구 형제에 비견할만한 한반도의 비극을 상징하는 형제이고 그 형제의 아버지가 아닐까?
무당 소화 누님 집 뒤에 보이는 건물이 조정래 문학관이다.
혹시 아직 태백산맥을 안 읽어 보신 분들에게는 일독을 권한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수기에 가까운 이 태 의 남부군과 함께 대한민국 현대사의 일면을 생생하고 적나라하게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한다. 작가들의 '사상'이나 이념적 경향성이 마음에 안들면 거꾸로 읽으면서 간접적 팩트 (소설이니까) 를 건져보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같다. 참고로 sarnia 가 현대사와 관련된 팩트들을 가장 많이 건져올린 곳은 극우 활동가가 된 전직 기자 조갑제의 취재자료들이다.
소설 속 외서댁은 유격대 강동식의 아내다. 청년단 감찰부장 염상구는 좌익가족을 수사하고 감시한다는 명분으로 예쁘게 생긴 외서댁을 괴롭히고 강제로 성관계를 한다. 쉽게 말해 빨갱이 아내를 협박해 강간을 한 것이다. 몰래 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외서댁과 의 섹스를 자랑하고 다닌다. 그리고는 외서댁과의 섹스를 ‘꼬막맛’에 비유한다. 이 식당이름 ‘외서댁 꼬막나라’는 소설 속 ‘섹스의 느낌’에서 그 컨셉을 가져왔을 것이라는 게 sarnia 의 짐작이다. 그게 아니라면 소설 속 인물 외서댁이 이 식당 원조 할머니가 아닌 다음에야 '꼬막' 과 연결될 이유가 전혀 없다.
이 식당 맛도 압권이고 친절하기도 했다. 꼬막정식을 처음 접하는 sarnia 는 당연히 먹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먼저 나온 꼬막찜을 먼저 모조리 까 먹었다. 그것을 본 주인 아주머니가 서빙하는 안경 낀 청년 하나를 야단쳤다. “아따, 이 셜 아자씨 꼬막을 다 까 잡솨버렸네, 이 아자씨한티 살명 말씀 안 드렸다냐?” 그리고는 한 접시 서비스로 더 가져다 주셨다. 꼬막찜은 먼저 까 먹는 게 아니라 나중에 밥과 김이 담긴 큰 그릇이 나오면 거기다 양념과 함께 넣어서 비벼 먹는 거란다. 젠장, 그걸 알았나. 일인당 만 원이다. sarnia 가 대한민국에 머무는 동안 한 식사 중 top 5 안에 들어갈만한 식사였다고나 할까. 가격대비로만 따지자면 단연 top 1 이다. 세 명이 한끼먹고 40 만 원이 날아간 남산 중턱 여관밥집에 비한다면야......
sarnia 는 그 날 저녁 순천만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해가 질 무렵부터는 비가 오기 시작해 제법 많은 비가 내렸는데 그냥 내리는 비를 맞고 산책을 했다. 2000 원 짜리 플라스틱 비옷을 하나 사기는 했는데 바람이 많아이 불어 무용지물이었다. 할 수 없이 비옷으로는 카메라 가방만 감싸고 나는 그냥 비를 맞으면서 걸었다. 근데 이 포스팅이 역사 이야기인지 소설 이야기인지 아니면 식당 소개인지 긴가민가한 분들을 위해 다시 말하지만, 그 세 가지 다 아니다. 그 세 가지가 함께 에덴의 동쪽 ost 와 공존할 수 있는 여행기다. 여.행.기.!! ----------------------------------------------------------------- 참, 제주 4 .3 항쟁을 다루고 있는 위키에서 아주 기본적인 오류를 발견했다. 당시 제주도 주둔 9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계급을 중장으로 잘못 표기해 놓은 것이다. 당시 연대장은 중령 계급으로 보임됐다.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위키의 대수치이니만큼 빨리 교정하기를...... 중령은 Lt. colonel 이다. Lt. General 은 중장이고. 말 나온 김에 형제의 비극에 버금가는 동기의 비극을 소개한다, 바로 4.3 항쟁 당시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진압군 사령관 제 9 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부장겸 유격대 사령관 감달삼 (본명 이승진) 의 이야기다 이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일본 후쿠야마 예비사관학교를 다닌 동기다. 뭐, 썩 친한 친구라는 말은 없지만 같은 조선인으로서 서로 알고 지냈던 모양이다. 4. 3 당시 김익렬 중령은 사관학교 동기이면서 적의 수장인 김달삼과 협상해서 사태를 평화적으로 수습하려는 노력을 벌였다. 제주도를 야만인들이 사는 섬 정도로 보고 초토화 작전을 구상하고 있던 미군정에 의해 김익렬이 제 9 연대장 직에서 해임되면서 양측의 평화협상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아래는 잘못된 계급표기 기록이 있는 위키 본문 http://en.wikipedia.org/wiki/Jeju_Uprising Lt. General Kim Ik Ruhl, commander of the South Korean force on the island, attempted to end the insurrection peacefully by negotiating with the rebels. He met several times with rebel leader Kim Dalsam (South Korean Worker's Party Member) but neither side could agree on conditions. The government wanted what amounted to a complete surrender and the rebels demanded disarmament of the local police, dismissal of all governing officials on the island, prohibition of paramilitary youth groups on the island and re-unifi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General Kim Ik Ruhl was suddenly recalled to Seoul over his conciliatory approach with the rebels and was surprised when his replacement mounted a sustained offensive against the rebels by the end of the summer.[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