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2004년 9월 19일에 아마 여기 씨엔드림에 올린 글입니다. 지난 번에 박근혜 향수로 리싸이클링 했었는데, 이 번 글도 재활용하는 셈입니다. 이 글을 쓸 때는 노무현 정권 때였는데 지금은 이명박 정권 시대라서 좀 낡았을 것입니다. 제 나름대로 한국 현대사의 문제를 정리한 것인데, 이 글을 쓸 때 저는 당시 박정희 신드롬을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동적 인식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정권이 바뀌어 이명박 정권을 박정희-이명박으로 잇는 연속성으로 여러분들이 찾고 있군요. 반동의 defenders가 "us vs. them"이라는 흑백적 사고를 참 열심히도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아주 재활용하기 쉬운 이념적 틀이지요. 박정희가 개발독재의 선두주자였다면, 이명박은 이러한 개발독재가 낳은 괴물이라기엔 좀 그렇고 자연스러운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죠. 아직도 개발독재와 근대화의 상관성이 유효하다는 것은 한국이 여전히 마지막 남은 냉전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못되먹은 정권이 새해에도 냉전적인 밥을 먹고 살리라 생각하니 끔찍합니다. 명박산성의 성주님이 us vs. them식의 이항 대립쌍을 올해도 활용할 것을 보니, 한반도의 긴장의 끝이 도무지 보이질 않습니다. 이런 정부 하에서는 정부에 대한 선한 비판도 종북주의자가 되며 좌빨이 됩니다. 그렇다고 그런 낙인찍기에 두려워 할 사람도 없구요. 새해 첫 날에 이런 재활용 글을 올리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사회를 보는 인식에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일단 올립니다.
새해에는 남북의 긴장이 완화되어 평화의 촛불이 밝혀지길 기원하며... 아프리카 올림.
박정희 향수 신드롬
1. 향수
우리는 삶이 고달플 때 행복했던 과거로 되돌아가려 합니다. 이런 과거의 회고를 “향수” (nostalgia)라 일컫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누구나 잊지 못할 추억들을 갖고 있습니다. 연애 시절 사랑하는 님과 만났던 잊지 못할 장소, 느낌 그리고 그 과거를 더듬어 시간의 덧없음을 맞서는 “삶의 고고학” (archeology of life) 을 향수라 이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향수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70-80년대, 나이 어린 소년, 소녀들이 고향 마을을 뒤로한 채, 구로 공단, 마산 수출자유지구, 부산 사상 공단으로 그리고 청계천공장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습니다. 삯 월세 내기도 쉽지 않은 월급이었지만, 그래도 고향 부모님께 돈을 보내고, 때론 붕어빵에 즐거워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추석이면 선물세트를 사들고 고향마을로 달려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을 보고, 어린 시절 마을 뒷동산에서 어둠이 멀다 하고 놀던 시절을 그리며 눈물을 흘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은 다시 풀어보면, 개발 독재라는 뜻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기실, “잘살아 보세”의 구호는 “결과적으로” 농촌을 살리는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관 주도로 진행되는 근대화는 산업화/공업화였고, 이러한 주도는 도시화의 물결을 낳았습니다. 70년대 급격히 일어난 이농 현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새마을 운동은 농촌을 새마을로 만드는 운동이라기 보다는 도시화의 전이 과정이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후 농촌은 공업화 산업화의 과정에서 철저하게 무시된 희생양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향수를 이야기할 때, 도시에로의 이농 현상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논할 수 없습니다. 도시는 시골에서 형성된 “사회적 결속” (social ties)이 철저히 무시된 곳입니다. 아는 사람없는 타지에 홀로 버려져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바로 도시 생활이었습니다. 모두가 정든 고향을 버리고 온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당시의 이런 외로운 사람들이 갖는 향수의 가장 큰 수혜자는 서울, 부산, 대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대형 기독교회였을 것입니다. 교회는 캐나다나 미국의 이민 사회처럼 잃어버린 사회적 결속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 셈이지요. 한국을 떠나 이국 만리에서 사회적 결속을 회복하는 지름길은 이민 교회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듯, 당시 세계 최대의 교회, 세계 최대의 장로교회, 세계 최대의 감리교회는 농촌에서 잃어버린 사회적 결속을 회복하는 통로의 “일부”가 되었고, 이 통로는 열악한 노동 조건을 잊는 “진정제” (sedative)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맑스가 “종교는 아편 (opium)이다”라고 했을 때, 이것은 아편이 몸을 망치는 역할보다는 아픈 상처를 잠시 잠재우는 의약품의 기능을 한다는 뜻이 적절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박정희의 개발 독재 과정에서 돈을 벌러 도시로 떠난 사람들의 외롭고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주어 조악한 현실을 잊게 하는 진정제 역할을 한 셈이지요.
이것은 지나친 표현이겠지만, 교회 성장은 경제 성장주의와 맞물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행한 수 없는 탄압과 억압의 오욕은 경제 성장의 기치 아래 노동착취와 인권탄압의 현실을 잊게 했고, 교회는 그런 현실을 잊고 정당화하는 진정제로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인권선언을 하고, 산업선교를 통해서 노동현실을 고발하고, 전태일열사가 나와 몸을 불살랐건만 이 진정제의 맛을 멀리하기에는 이미 그 중독의 도가 지나쳤다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노동자들은 고향의 향수, 자기의 삶의 근원이자 통로가 된 시골과의 사회적 관계를 종교적 활동을 통해서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현재 우리가 갖는 70-80년대의 향수는 무엇일까요? 근대화 작업을 통해서 전통문화가 사라진 시골마을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면, 이런 시골의 결속력을 잃어버리고 도회지에서 새로운 삶에서 얻은 사회적 결속력에 대한 향수일까요? 아니면 문자 그대로 잘 살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일까요?
2. 개인적 향수와 사회적 향수
개인적 삶이 힘들 때, 과거로 돌아가듯, 사회도 그러합니다. 중국인들은 힘들 때, 중국문명의 원형(archetype)인 요순 시대를 회상하였습니다. 또 새로운 개방 정책으로 현재 중국을 만든 등소평에 대한 향수는 중국이 경제적 위기를 겪을 때마다 반복해서 부활할 것입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힘들 때 고조선 시대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중국의 당/송/명의 시대로 되돌아 가곤 했습니다. 명이 망하고 청이라는 소위 “오랑캐” 국가가 들어서자 조선 사람들은 진정한 중국은 대륙에서는 사라졌고, 그것을 계승한 국가는 바로 조선 밖에 없다는 “소중화” (小中華)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소중화 사상은 오랑캐 이전의 당송명으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향수라 할 수 있습니다.
18-19세기 (1760-1860)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 혁명 이전의 유럽인들은 현재의 자기들이 퇴보된 로마 문명에 살고 있다고 여기면서 늘 고대의 로마 문명을 동경했습니다. 과거의 황금시대 (golden age)나 영광스런 과거 (glorious past)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국가나 민족에게 나타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종교적 황금기, 순수한 신앙의 시대가 있었다고 하는 회고적 신앙을 우리는 종교적 “근본주의” (fundamentalism)라고 부릅니다. 이성의 시대 (age of reason)라고 할 수 있는 계몽주의를 거치고, 달나라에 까지 사람이 다녀 오고, 양자역학이니 불확정성 원리니, 인터넷을 통한 지구의 마을화니 해도, 종교적 근본주의는 그 이전의 황금 시대로 돌아가려 합니다. 한번도 신의 존재 유무를 의심하지 않던 시대,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돈다는 것이 진리로 받아들여지던 시대로, 지구의 역사가 수십억 년이 되었건만 우주의 역사를 성서가 제시하는 5천년 역사로 동일시하는 시대로 되돌아가고자 합니다. 물리학으로, 화학으로, 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도 뱀이 사탄이었다고 철저히 믿는 그런 사람들이 원하는 황금시대가 바로 종교 근본주의가 지향하는 과거에로의 향수라고 할 수 있지요.
3. 박정희의 비자율적 근대화 운동과 박정희 향수 신드롬
우리는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대표되는 개발 독재를 한국의 현대사에서 과소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군사 정권에 의해 형성된 것이긴 하지만, 이것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이룹니다. 19세기 말의 동학혁명은 한국인이 처음으로 민족적 자각을 한 시기이며, 유교 사회로 표상되는 전근대적 사회와 결별하는 전환점이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소중화론의 향수에 잠들어 있던 사람들에게 서학에 대한 반발로서의 동학, 부정부패에 대한 반항, 외세에 대한 반외세적 민족적 자각 의식이 동학 운동을 통해서 서서히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불행히도, 우리 민족은 동학혁명의 실패 후,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일본에 종속되어 36년간이라는 인고의 식민지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지배 이데올로기로 6백 년을 견뎌온 유교는 노망이 들어 죽어 버렸고, 같은 기간 탄압으로 지리멸렬한 불교는 민족적 대안을 제시해 주지 못했으며, 경건주의와 보수주의로 무장한 신생 수입품인 기독교는 한국 민족의 현실을 담기에는 그릇이 너무나 작았습니다. 그런 과정에 우리 민족은 근대로의 전이라는 중요한 전환기를 일제의 탄압이라는 오욕의 시간으로 채워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조선말-일제-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통틀어 자율적인 근대화의 경험을 거의 해보지 못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굴종과 노예의 근대화 과정이 바로 한국의 근/현대사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공산주의/자본주의 이념이 낳은 남북 분단의 비극과 전쟁은 한국 민족을 과거와의 연속성에 놓기 보다는 철저한 분리를 초래하게 합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대이동, 전통적 친족 관계와 경제 구조의 급격한 변화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격동의 한국사를 몸으로, 피로서 경험한 것입니다.
전쟁을 잊을 틈도 없이 한국은 여전히 혼란의 와중에서 새로운 질서를 향한 열정으로 몸부림치고 있을 무렵, 516 군사 쿠데타는 우리에게 자율적 문화보다는 타율적 문화의 씨앗을 뿌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동학혁명 당시 보류된 근대화를 낳은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과정이 어찌 되었건, 그러한 근대 인식은 박정희의 개발 독재를 통해서 많은 변화를 가져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가지붕을 기와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 길을 닦고, 공장을 짓는 행위는 단순히 외부적 변화 만을 가져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사물을 보는 우리의 인식의 전환과 변화를 동반합니다. 근대화는 전통과의 단절과 아울러 미래를 향한 개발/경제 지상주의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군사 문화와 개발 독재가 낳은 근대화는 마치 유기체로서의 세계관이라기 보다는 기계로서의 세계관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들고, 뜯어고치고, 몰아 부치면 된다는 개발 독재는 어쩌면, 한꺼번에 사회를 뜯어 고치겠다는 공산주의 혁명과 요상한 닮은 꼴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현실 사회주의가 1989년 마지막 깃발을 내렸듯, 이러한 개발 독재와 군사 문화는 1987년 민주화의 피를 통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 문화가 만들어 놓은 구획화된 (compartmentalized) 우리의 의식은 여전히 잊혀지지 않은 향수가 되어 우리 몸에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유산은 이미 수 십 년간 형성된 몸의 메커니즘입니다. 이러한 몸의 작동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자율보다는 타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정적들을 철저하게 탄압하였습니다. 박정희 이름만 잘 못 불러도 잡혀가는 시대였습니다. 언론은 관제 언론화되었으며, 출판은 철저히 검열되었고, 집회는 무조건 불법화 되었으며, 어떤 사회 조직도 그의 정권에 반대된다고 판단되면, 해체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개발 독재는 역사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실재입니다. 우리가 현대사의 자식이듯, 우리는 박정희 개발 독재의 자식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가 낳은 경제적 성장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가 뿌린 정경유착이나 군사 문화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현재의 박정희 향수의 사회적 조건 (social condition)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는 이유기도 합니다.
박정희 향수는 두 이면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수구/극우/기득권 세력의 향수입니다. 이것은 향수라고 하기 보다는 그 동안 자기들이 지켜온 기득권을 지키려는 단말마의 몸부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민주화 운동하는 사람들을 감옥에 쳐놓은 자도 있고, 노동 운동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몰아 부친 자도 있습니다. 그들은 인터넷의 사이버 공간처럼 “경계없는 경계” (never-ending boundaries)에 심각한 장애 (chaos)를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민주화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실현되었고, “개혁”이란 말이 때가 묻어 개똥보다 못한 말로 바뀐 현재의 용법 (usage)이 증명해 줍니다. 70년대 80년대 그토록 꿈꾸던 “민주화”와 “개혁”이란 말이 뒷간 신세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군사 정권의 사슬에서 벗어나 자율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들 수구 세력들은 새로운 사회, 변화된 세계에서 새로운 질서 (order)를 찾기 보다는 오히려 이것을 “혼돈” (chaos)으로 보고 과거로 회귀하려고 합니다. “박정희”에 대한 몇 마디 비난이 감옥행이고, 시국선언이 징역 3년이고, 해방신학 책 소지가 빨갱이가 되는 시절을 그들은 너무나 그리워합니다.
둘째, 삶이 고달픈 사람들의 하소연입니다. IMF 때보다도 더 힘들다는 한국의 살림살이의 질곡에 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의 환경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습니다. 박정희 때는 노동착취의 대상이 되고, IMF 때는 일차적 희생자의 대열에 서야 하고, 불경기다 하는 현재는 실업의 공포와 생활고를 겪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생활이 힘들수록, 보릿고개를 극복하게 한 박정희가 그립습니다. 그래서 노무현보다는 그래도 김대중이, 김대중 보다는 김영삼이, 김영삼 보다는 노태우가, 노태우 보다는 전두환이, 전두환보다는 박정희가 더 낫다는 요청은 현재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 알려 줍니다. 이것은 박정희를 그리워하기 보다는 현재의 삶의 어려움이 박정희라는 매개를 통해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박정희 향수 신드롬을 통해서 현재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 알게 됩니다. 위정자들이여 민의 울부짖음을 들을지어다!
4. 향수에 빠지기 전에
향수는 감정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잊고 잠시 동안 과거에 살게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경제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현재는 박정희 시대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과거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날아 왔습니다. 경제적 성장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공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현재 우리의 존재와 삶을 “박정희만”이라는 절대화의 기준으로 잰다는데 있습니다. 과거사나 과거 인물의 절대화는 정치적 근본주의를 낳은 시발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돌아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과거가 현재를 좌지우지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향수는 향수로 족합니다. 한국은 지금 박정희가 뿌린 회고담이 넘실대고 있습니다. 바로 박정희 향수 신드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향수가 집단적 히스테리로 변할 때, 이것은 새로운 전체주의 또는 정치적 근본주의를 더욱 더 강화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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