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 한 이민자의 삶이 여기에 있습니다. 수취심 가득한 마음이나 이민을
저 보다 늦게 온 후배님들 이렇게 살아온 이민 선배도 있다고 각인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으리요, 가끔은 민초의 사무실을 찾아와 이민 생활의 자문을 바라는 사람도 있기에 이 기사를 옮겨와 봅니다. 해 놓은 일도 없는데 하고 싶은 일은 많습니다. 이 창을 찾는 독자님들 성원과 사랑 지도를 바라며 토끼해의 토끼의 지혜와 깨끗한 마음으로 건승과 만복을 빌어 봅니다. 민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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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5번째 시집 낸 加동포 이유식 씨
| 기사입력 2010-11-19 07:01 | 최종수정 2010-11-19 08:43
"공부하러 갔다 사업가로 성공..이젠 시를 쓰고 싶어"
2007년 `민초 해외동포문학상' 제정해 3년째 시상
(서울=연합뉴스) 강진욱 부장대우 = "1974년 박사학위를 따러 캐나다로 건너갔다가 생계 때문에 결국 학위는 못 따고
사업가가 됐습니다. 이제는 시인으로 남고 싶습니다."
2007년 자신의 호를 따 `민초(民草) 해외문학상'을 제정해 동포 문학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캐나다의 동포
사업가 이유식(70)씨는 19일 연합뉴스와 만나 "한 때 진취적이고 성취를 갈망하던 시어(詩語)가 이제는 디아스포라적
존재의 의미를 갈구하는 쪽으로 기운다"며 이렇게 말했다.
캐나다로 건너가기 전 그는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제연구센터에서 일하며 인하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 출강했다. `
꽤 괜찮은 직장'을 그만두고 캐나다로 간 것은 3년 정도 공부해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외환관리법이 엄격해 그와 아내, 아들이 각각 200달러씩, 600달러만 갖고 나갈 수 있었다. 캘거리에 거처를
잡고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의 아내가 둘째를 임신했는데 임신 5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그는 결국
학업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는 곧바로 행상을 시작했고 철을 가공하는 공장에 가서 직접 쇠를 가는 작업도 했다. 이어 캐비닛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다음에는 유화(油畵)를 수입해 행상을 했으며 캐나다 경제의 흐름을 파악한 그는 종업원 7명을둔 고물장사를
매입 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한국인으로서 국위도 선양하고 돈도 벌 수 있는 사업으로, 1976년부터 국산 인삼을 캐나다에
들여오는 무역을 시작했다. 당시 캐나다는 건강식품 산업이 성장 일로에 있었다. 인삼은 인삼뿌리 즉 root 만 팔리는
시장을 감안 처음으로 인삼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출시하면 백인 사회에 판매할 수 있다는 것을 착안 한국의 신풍
제약으로 부터 제품 (캡슬, 파우다, 타부렛)을 만들어 수입을 해 도 소매를 겸한 사업으로 확장해 나갔다
`인삼 무역'은 일단 성공했고 그의 말대로 국위 선양에도 일조했다.
그는 이어 부동산 사업에도 뛰어들어 한때 주택과 빌딩을 합쳐 약 50채를 소유한 적도 있다. 지금도 `유리 투자주식회사'
라는 부동산 투자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그는 이후 15년여 기간 사업에 매진하며 나름의 성공 가도를 달렸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92년 첫 시집 `록키 산마루의 노을'을 내자 한국의 동아 일보 시 담당 객원 기자박선욱 시인이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한국에 와 세검정의 어느 여관에서 박 시인과 밤을 새워 술을 마시며 인생을 논했다"고 전했다. 그 인터뷰가
계기가 돼 그해 여성동아의 12월의 인물로 선정되어 그의 삶과 시에 대하여 장장 8페이자가 실린적도 있다.이어
민족문학작가회의 신경림 이사장을 만났고 2002년 말까지 회원으로 활동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를 나온 그는 2006년 수필가 윤 주홍 박사와 관악 문협회장 조 성국 시인의 추천으로 한국문인협회에
가입했고, 이듬해 "민족과 조국을 위해 나름의 역량으로 뭔가 기여하고 싶어" 자신의 호를 따 `민초 해외문학상'을 제정했다.
평론가 임헌영 교수 및 김 봉군 교수가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2011년에는 서울대학 명예 교수인 오 세영 시인이 심사위원장을 맡기로 되었다
상금 3천 달러에 항공료와 숙식비, 시상식과 식후 파티까지 적지 않은 돈이 들지만 그는 동포문학상을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
"중국 문화혁명 시기 우파로 몰려 25년간 노동교화형을 받고도 시를 쓰며 생명을 연장했다는 옌지의 조선족 노시인
조 룡남 선생이 2회 수상자였는데, 시상식에서 해외동포가 주는 문학상을 받아 감격스럽다며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3회째에는 전 이화 여대 교환 교수로 6년간 한국에 있다가 돌아온 왜스턴 온타리오 대학 명예교수 이 동렬박사가
수필로 수상을 했다.
이 씨는 사업가와 시인 외에도 여러 단체장을 많이 맡았다.
1979년 캐나다한인총연합회를 창립, 부회장과 이사장, 회장을 지냈고 1987년에는 박병헌 재일한국민단 단장 등과 함께
일본 도쿄 미야코 호텔에서 해외한민족대표자협의회를 창립했다.
1993년에는 한반도통일연구회 이사로 일했고 지금도 한국통일문화진흥회의(이사장 민병천 전 동국대 총장) 서부캐나다
지회장을 맡고 있다.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3, 4, 5기 위원을 연임했지만 "실질적 기여는 없고 자리다툼만 하는 꼴을 보기 싫어서" 6기에 자진
사임했다.
"이런저런 활동을 많이 하고 여러 직책을 맡고 나니 정신적 소모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감정적 순화가 필요해 요즘은 시를
쓰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이어 캘거리 문인협회를 창립하고 1,2, 3,대 회장을 연임하고 현재는 명예
회장으로 남아 교민 정서 함양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얼마 전 안혜숙 '세계한인작가연합' 대표가 운영하는 `다트앤'에서 다섯 번째 시집 `이방인(異放人)의 노래'를 펴냈지만
써 놓은 시가 아직 많다. 이방인의 `방'의 한자를 '邦'이 아닌 `放'으로 쓴 것은 디아스포라를 막연한 떠돌이가 아닌 `더 큰
세계로의 해 放'으로 보려는 그의 시적 Metaphor 가 담겨 있다.
그의 호 `민초'(民草)는 그가 캘거리에 간지 얼마 안 돼 험난하게 살던 시절, 그의 K대학 은사로 40여 년 사제의 정을 이어온
김동기 K대학의 석좌교수이며 학술원 회원이 지어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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