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 2003년에 쓴 글입니다. -아프리카 올림
정신 없이 바쁜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우리는 잠 못 이루는 밤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자기 삶에 대한 이러한 성찰은 내가 “왜 사느냐?”하는 의문을 묻는 것입니다. 삶의 의문이 깊어 질 때, 잠 못 이루는 밤도 무한정 길어지게 됩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거나 다 큰 자녀를 멀리 떠나 보내거나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먼 나라로 보내고 그/그녀가 남은 자리를 되돌아 보면, 그/그녀가 남긴 자취가 너무나 커서 허망한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실존적 공허” (existential vacuum; Frankl의 용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텅빔”을 경험하는 것은 단순한 외로움 (loneliness)일 수도 있겠지만, 삶의 의미의 상실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Ninian Smart
종교학자 니니안 스마트 (Ninian Smart)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참되게 경험되는 대상”(objects which are real)과 “단순히 존재하는 대상 (objects which exist)” (Smart 1973, 54)을 구분합니다. 어떤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할 수 있으며,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데도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존재하는지 증명할 대상이 아님에도 의미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신” (God)이라는 개념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근원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즉 “real” 하게 경험합니다.
빅터 프랜클
스마트의 이 말은 세계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정신분석가였던 빅터 프랜클 (Viktor Frankl)의 [인간의 의미 추구: 의미요법 입문/ 또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실존주의로](Man’s Search for Meaning: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 또는 From Death-Camp to Existentialism)을 떠 오르게 합니다. 이 책은 나찌 수용소에서 죽음의 위기를 넘나들며 자신이 경험한 것을 분석한 것입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도 삶의 가능성과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의 독특한 개념 “의미요법” 즉 logotherapy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Logos”는 의미를 말하고, therapy는 환자에게 의미 (logos)를 찾도록 하는 치료의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이 책을 약 18년 전에 한글 번역본을 통해서 읽었는데, 이 번에는 영문판을 구해서 다시 보았습니다. 이유는 단지 제가 한글판을 지금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저의 친구와 함께 이 “logotherapy” 개념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프랜클의 logotherapy는 다름 아닌 우리가 삶의 의욕을 상실한 사람에게 사는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삶에는 의미를 갖도록 하는데 방해를 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러한 의미상실의 순간에도 삶이 의미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주는 것이 바로 logotherapy의 역할입니다.
프랜클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죽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심지어 그는 “모든 치료는 그것이 아무리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하더라도 logotherapy, 즉 의미요법이어야 된다”라는 명제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삶에서 살아야 하는 의미를 잃는다는 것은 바로 육체적 죽음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죽음, 궁극적으로는 삶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프랜클이 수용된 나찌의 죽음의 수용소 (death-camp)는 바로 그냥 “존재한다” (exist)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위협이 둘러싼 곳에 던져진 사람들은 살아야 한다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 수용소 죄인들이 무엇을 꿈꾸었을까요? 그 꿈들은 달콤한 빵이나 케이크일 수도 있고, 한 모금의 담배일 수도 있으며, 따뜻한 목욕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 (wish-fulfillment)이 수용소의 처참한 현실 (reality)과 극명하게 대조(terrible contrast)를 이루었을 때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될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 남을 것입니다. (Frankl 1966, 27).
이런 험한 상황을 극복하는 예를 프랜클은 다음과 같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캠프 수용과정 속에서 헤어진 자신의 아내에 대한 명상 (meditation)을 통해서 그는 인간이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The truth-that love is the ultimate and the highest goal to which man can aspire). 그는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바로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구현된다 (the salvation of man is through love and in love)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는 사람도 단지 일순간이나마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연상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36). 이 작은 연상에서 조차 자살이나 죽음의 충동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소중한 일면일 것입니다.
당시 그는 아내의 생사여부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형체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Love goes very far beyond the physical person of the beloved)는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내 앞에 현존하든 않든, 또는 그의 생사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37). 프랜클 역시 수용소에 있으면서 자기의 아내와 만날 수 있는 어떠한 수단도 얻지 못했습니다. 설령, 그의 아내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아내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아내와 갖는 마음의 대화를 막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에 깊이 각인된 것은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다” (Love is as strong as death)는 명제, 즉 죽음이 정복할 수 없는 대상이라면 사랑 역시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의 절대적 힘과 버금갈 정도로 강력하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진실이었습니다 (38).
불행히도 프랜클의 아내는 수용소에서 사망했습니다. 오히려 나찌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면 프랜클에게 무엇이 “real” 한 것일까요? 그의 아내의 죽음에 대한 소식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살아 “경험”되는 아내의 이미지일까요? 프랜클의 다음의 말은 그가 얼마나 고통과 죽음의 현장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고 있는지 알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아니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현장인 아우슈비쯔 (Auschwitz)의 강제 수용소에서 그가 처절하게 찾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현장의 사람이자 목격자인 프랜클은 이렇게 말합니다. “삶에 의미가 있으려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 고통은 제거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이다-심지어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이나 죽음처럼 말이다. 고통과 죽음 없이 삶은 완성될 수 없다” (If there is a meaning in life at all, then there must be a meaning in suffering. Suffering is an ineradicable part of life, even as fate and death. Without suffering and death human life cannot be complete, 67).프랜클에게 이러한 고통과 죽음에 대한 성찰은 바로 삶의 참된 의미를 향한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자기 성찰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다음의 이야기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수용된 동료 죄수 중에 간수로 차출된 사람이 1945년 3월초 프랜클에게 상담을 요청합니다. 그가 2월에 꿈을 꾸었는데, 3월 30일에 전쟁이 끝나서 해방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다가 오는 순간에도 전쟁이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3월 29일, 이 사람이 갑자기 아파 고열증세를 보였습니다. 3월 30일, 그가 꿈을 통해서 얻은 예언의 날, 즉 고통과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해방의 그날, 그는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키며 정신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3월 31일, 그는 장티푸스로 죽고 맙니다 (75-76). 그가 죽은지 약 한달 후 4월 29일 독일이 항복을 했습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신념을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삶의 희망을 포기하는 것 (giving up hope)은 바로 존재하는 것을 희망 가운데 “real”하게 경험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집니다. 결국, 그에게는 “exist”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과 삶이 무의미해질 때, “exist”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단순히 “존재하는 것” (exist)으로부터 의미있는 삶으로 “real”하게 경험하도록 안내합니다.
사족을 하나 달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톰 행크스 (Tom Hanks) 가 출현한 영화 [Cast Away]를 못 보신 분은 한 번 시간을 내시기를 권합니다. 이 영화는 비행기가 추락하여 무인도에 표류하여 지내는 주인공 Chuck Noland에게 무엇이 삶에서 “real” 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마지막 희망과 그리움의 대상으로 4년간의 삶의 투쟁의 빛, 즉 그의 생존의 의미가 되었던 그의 마음 (memory) 속의 동반자 아내 Kelly, 그러나 자기가 죽은 줄 알고 재혼하여 남의 여인이 되어버린 현실 속의 여인과의 차이를 연상해 보십시오. 제가 말씀드린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궁금하신 분은 꼭 보시길 바랍니다. 이 영화 속에 제가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결론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언급하지 않은 그의 가공의 친구 Wilson의 역할에 주목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데,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살아 남는데 (survival)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살아 남을 이유 말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 가는 길은 바로 삶의 기술(art of living)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살아야 된다는 아주 작은 의미만을 가진 사람도 죽음이 위협을 하지 못합니다. 작은 의미 자체, 즉 살아갈 수 있다는 목적이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자살로 맺어지는 죽음보다도 강한 것입니다.
<References>
1. Frankl, Victor E. 1962. Men’s Search for Meaning: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 Boston: Beacon Press.
2. Smart, Ninian. 1973. The Science of Religion & the Sociology of Knowledge.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