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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상실한 분을 위한 프랜클의 메시지
작성자 내사랑아프리카     게시물번호 3631 작성일 2011-01-28 16:35 조회수 2006

참조: 2003년에 쓴 글입니다.  -아프리카 올림                       

정신 없이 바쁜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우리는 잠 못 이루는 밤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자기 삶에 대한 이러한 성찰은 내가 “왜 사느냐?”하는 의문을 묻는 것입니다. 삶의 의문이 깊어 질 때, 잠 못 이루는 밤도 무한정 길어지게 됩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거나 다 큰 자녀를 멀리 떠나 보내거나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먼 나라로 보내고 그/그녀가 남은 자리를 되돌아 보면, 그/그녀가 남긴 자취가 너무나 커서 허망한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실존적 공허” (existential vacuum; Frankl의 용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텅빔”을 경험하는 것은 단순한 외로움 (loneliness)일 수도 있겠지만, 삶의 의미의 상실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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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nian Smart

 

종교학자 니니안 스마트 (Ninian Smart)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참되게 경험되는 대상”(objects which are real)과  “단순히 존재하는 대상 (objects which exist)” (Smart 1973, 54)을 구분합니다. 어떤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할 수 있으며,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데도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존재하는지 증명할 대상이 아님에도 의미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신” (God)이라는 개념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근원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즉 “real” 하게 경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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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랜클

 

스마트의 이 말은 세계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정신분석가였던 빅터 프랜클 (Viktor Frankl)의 [인간의 의미 추구: 의미요법 입문/ 또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실존주의로](Man’s Search for Meaning: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  또는 From Death-Camp to  Existentialism)을 떠 오르게 합니다. 이 책은 나찌 수용소에서 죽음의 위기를 넘나들며 자신이 경험한 것을 분석한 것입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도 삶의 가능성과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의 독특한 개념 “의미요법” 즉 logotherapy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Logos”는 의미를 말하고, therapy는 환자에게 의미 (logos)를 찾도록 하는 치료의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이 책을 약 18년 전에 한글 번역본을 통해서 읽었는데, 이 번에는 영문판을 구해서 다시 보았습니다. 이유는 단지 제가 한글판을 지금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저의 친구와 함께 이 “logotherapy” 개념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프랜클의 logotherapy는 다름 아닌 우리가 삶의 의욕을 상실한 사람에게 사는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삶에는 의미를 갖도록 하는데 방해를 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러한 의미상실의 순간에도 삶이 의미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주는 것이 바로 logotherapy의 역할입니다.

 

프랜클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죽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심지어 그는 “모든 치료는 그것이 아무리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하더라도 logotherapy, 즉 의미요법이어야 된다”라는 명제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삶에서 살아야 하는 의미를 잃는다는 것은 바로 육체적 죽음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죽음, 궁극적으로는 삶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프랜클이 수용된 나찌의 죽음의 수용소 (death-camp)는 바로 그냥 “존재한다” (exist)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위협이 둘러싼 곳에 던져진 사람들은 살아야 한다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 수용소 죄인들이 무엇을 꿈꾸었을까요? 그 꿈들은 달콤한 빵이나 케이크일 수도 있고, 한 모금의 담배일 수도 있으며, 따뜻한 목욕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 (wish-fulfillment)이 수용소의 처참한 현실 (reality)과 극명하게 대조(terrible contrast)를 이루었을 때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될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 남을 것입니다. (Frankl 1966, 27).

 

이런 험한 상황을 극복하는 예를 프랜클은 다음과 같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캠프 수용과정 속에서 헤어진 자신의 아내에 대한 명상 (meditation)을 통해서 그는 인간이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The truth-that love is the ultimate and the highest goal to which man can aspire). 그는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바로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구현된다 (the salvation of man is through love and in love)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는 사람도 단지 일순간이나마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연상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36). 이 작은 연상에서 조차 자살이나 죽음의 충동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소중한 일면일 것입니다.

 

당시 그는 아내의 생사여부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형체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Love goes very far beyond the physical person of the beloved)는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내 앞에 현존하든 않든, 또는 그의 생사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37). 프랜클 역시 수용소에 있으면서 자기의 아내와 만날 수 있는 어떠한 수단도 얻지 못했습니다. 설령, 그의 아내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아내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아내와 갖는 마음의 대화를 막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에 깊이 각인된 것은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다” (Love is as strong as death)는 명제, 즉 죽음이 정복할 수 없는 대상이라면 사랑 역시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의 절대적 힘과 버금갈 정도로 강력하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진실이었습니다 (38).

 

불행히도 프랜클의 아내는 수용소에서 사망했습니다. 오히려 나찌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면 프랜클에게 무엇이 “real” 한 것일까요? 그의 아내의 죽음에 대한 소식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살아 “경험”되는 아내의 이미지일까요? 프랜클의 다음의 말은 그가 얼마나 고통과 죽음의 현장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고 있는지 알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아니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현장인 아우슈비쯔 (Auschwitz)의 강제 수용소에서 그가 처절하게 찾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현장의 사람이자 목격자인 프랜클은 이렇게 말합니다. “삶에 의미가 있으려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 고통은 제거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이다-심지어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이나 죽음처럼 말이다. 고통과 죽음 없이 삶은 완성될 수 없다” (If there is a meaning in life at all, then there must be a meaning in suffering. Suffering is an ineradicable part of life, even as fate and death. Without suffering and death human life cannot be complete, 67).프랜클에게 이러한 고통과 죽음에 대한 성찰은 바로 삶의 참된 의미를 향한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자기 성찰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다음의 이야기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수용된 동료 죄수 중에 간수로 차출된 사람이 1945년 3월초 프랜클에게 상담을 요청합니다. 그가 2월에 꿈을 꾸었는데, 3월 30일에 전쟁이 끝나서 해방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다가 오는 순간에도 전쟁이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3월 29일, 이 사람이 갑자기 아파 고열증세를 보였습니다. 3월 30일, 그가 꿈을 통해서 얻은 예언의 날, 즉 고통과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해방의 그날, 그는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키며 정신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3월 31일, 그는 장티푸스로 죽고 맙니다 (75-76). 그가 죽은지 약 한달 후 4월 29일 독일이 항복을 했습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신념을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삶의 희망을 포기하는 것 (giving up hope)은 바로 존재하는 것을 희망 가운데 “real”하게 경험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집니다. 결국, 그에게는 “exist”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과 삶이 무의미해질 때, “exist”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단순히 “존재하는 것” (exist)으로부터 의미있는 삶으로 “real”하게  경험하도록 안내합니다.cast%20away.jpg

사족을 하나 달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톰 행크스 (Tom Hanks) 가 출현한 영화 [Cast Away]를 못 보신 분은 한 번 시간을 내시기를 권합니다. 이 영화는 비행기가 추락하여 무인도에 표류하여 지내는 주인공 Chuck Noland에게 무엇이 삶에서 “real” 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마지막 희망과 그리움의 대상으로 4년간의 삶의 투쟁의 빛, 즉 그의 생존의 의미가 되었던 그의 마음 (memory) 속의 동반자 아내 Kelly, 그러나 자기가 죽은 줄 알고 재혼하여 남의 여인이 되어버린 현실 속의 여인과의 차이를 연상해 보십시오. 제가 말씀드린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궁금하신 분은 꼭 보시길 바랍니다. 이 영화 속에 제가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결론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언급하지 않은 그의 가공의 친구 Wilson의 역할에 주목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데,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살아 남는데 (survival)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살아 남을 이유 말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 가는 길은 바로 삶의 기술(art of living)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살아야 된다는 아주 작은 의미만을 가진 사람도 죽음이 위협을 하지 못합니다. 작은 의미 자체, 즉 살아갈 수 있다는 목적이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자살로 맺어지는 죽음보다도 강한 것입니다.

 

<References>

1. Frankl, Victor E. 1962. Men’s Search for Meaning: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 Boston: Beacon Press.  

2. Smart, Ninian. 1973. The Science of Religion & the Sociology of Knowledge.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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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치독  |  2011-01-29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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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랭클의 저 책은 제가 고등학교 때 종교수업시간에 처음 접했던 것입니다 (Catholic school 을 다녔거든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발전시킨 프랭클 박사의 \"의미치료(logo-therapy)\"에 대한 저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생물학적\' 삶 자체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이란 그 자체를 일정 기간동안 계속 유지하는 것\'일 뿐, 삶에 내재된 가치(intrinsic value) 같은 것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삶의 의미란 개인에게 부여되는 것이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저절로 의미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의미가 개인에게 부여되는 방법은 타고나면서부터 부모로부터 물려받기도 하고 (이를테면, 왕족의 후예라든지 몇 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 개인이 스스로 의미를 찾기도 합니다. 물려받은 인생의 의미를 버리고 나만의 의미를 찾아 사는 사람도 많죠. 예컨대, 배스킨 라빈스 창립자의 아들은 초국적 아이스크림 회사를 물려받을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하고 BC 주의 작은 섬에서 직접 음식을 재배해 먹으며 환경운동가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군요. 배스킨 라빈스를 창립한 그의 삼촌은 심장마비로 50대에 돌아가셨고, 그의 아버지는 당뇨와 고혈압으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것으로 압니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 당연한 결과겠죠. ㅎ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기도 합니다. 의미는 삶에 방향을 제시해 주고 힘을 불어넣어주는 강력한 동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선택할 때는 가급적이면 시간이나 물리적인 환경에 쉽게 변하지 않는 게 장기적으로 좋을 것 같습니다. 재밌는 예를 들어보자면, 예쁜 여자랑 사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사는 Playboy 사장 Hugh Hefner는 여자가 아무리 예뻐도 20대 때 몇 년 잠깐 피고 꽃처럼 시들게 되니 여자를 계속 바꿔서 지금은 증손자뻘 되는 여자랑 또 결혼을 하겠다네요. 변화가 잦은 것에 의미를 두게 되면 그 만큼 비용을 많이 치뤄야할 심적,경제적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제 자신을 보면, 특별히 삶에 어떤 별다른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지만 여태껏 살아온 것을 보면 여러가지로 운이 좋았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생길지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 그리고 언젠가는 죽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그렇게 한 번 살아볼 수 있었던 엄청나게 특별한 기회를 가졌던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땐 죽고나면 어떻게 되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밤잠을 설칠 때도 있었죠. 지금은 지구라는 행성에 태어나 가끔 맛있는 삼겹살과 소주를 즐기며 1년에 한 번씩 로키산에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정말 감사려고 노력합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1-01-29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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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치독님, 카멘츠 감사합니다. 제가 프랜클을 안 것은 대학 1학년 때니 사반세기 전이군여. 당시 저보다 두 학년이 위인 형을 우연히 만났는데 무슨 화두같은 것을 던지다가 서로가 프랜클과 프란쯔 카프카에 폭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는 정말 친한 친구가 되었죠. 그 형은 프랜클에 더 빠져 있었고 저는 카프카에 완존히 빠져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불어를 했는데, 카프카 글 읽을 욕심으로 독일어를 수강하기도 했었죠. 프랜클의 의미요법은 죽음의 수용소같은 생명을 위협하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수용소에서 동료 유대인을 상담하면서 그것을 실증적으로 경험한 것이겠지요. 이렇게 극단적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는다면 살아 남을 이유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도 프랜클의 태도를 갖는다면 살아가는 의미는 더 깊어지겠지요.

당시에 나찌와 전쟁을 경험하면서 프랜클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저는 에리히 프롬을 들고 싶군요. To have or to be의 문제를 깊이 고민한 사람이니까요. 그는 이러한 소유냐 존재냐의 문제를 나찌즘 이해로 확장시켜 사회심리적 문제까지 다루게 됩니다. 이와 비슷한 사람이 종교 철학자 폴 틸리히라는 사람입니다. 그 역시 나찌를 경험하면서 생명이 비존재 (nonbeing)에로의 문제를 성찰하게 됩니다. 그래서 비존재의 위협에 맞서서 존재 (being)를 향한 용기, 그래서 그는 [존재에의 용기] (Corouge To Be)라는 책을 쓰게 됩니다. 신없는 상황을 처절하게 경험한 유대인들의 경우는 나찌즘 이후의 신의 문제를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성서, 또는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구약성서에 나타난 신 이해로 유대교를 평가하면 큰 오산이지요.

위에서 말한 니니안 스마트의 주장처럼, 대상이 그냥 대상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real하게 경험되는 대상, 그것은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 산책할 때 스쳐지나가는 나무 한그루 한그루, 그리고 돌멩이, 바람, 그리고 책을 통해서 얻는 새로운 통찰 그리고 존재의 언어, 이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진다면 우리는 퐁요한 상징적 세계 (symbolic cosmos)에 살고 또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와치독  |  2011-01-29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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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님 덕에 항상 마음의 양식 얻어갑니다. 어제부터 눈이 많이 내리는데 운전 조심하세요. 주말 잘 보내시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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