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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교회 안가 죄지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드리는 예수의 위로 |
작성자 내마음의 평화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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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번호 3755 |
작성일 2011-02-20 12:15 |
조회수 21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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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아니 그 딴 말 말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니까.
(주님이 오늘따라 왜이리 짜증을 내시지..)
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내 양을 먹이라.
(양? 양이 어디 있지..)
저.. 혹시 주님.. 양이 어디있세요?
(어이구 저걸 수제자라고..)
이놈아 니도 내 양이다. 니 친구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니 부모 형제가 다 내 양이다. 니가 매일 만나는 세상의 사람들, 특별히 세상의 마이너들,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내 양이다.
그리고 내가 만들어 놓은 그 세상의 것들,
내가 보기에 좋았더라라고 너희들이 썼던 이 아름다운 자연,
너희들이 내게서 재능을 받아 만들어 놓은 세상의 모든 예술과 문화들 모두 내 양이다 알겠니?
가서 먹이라.
(오잉~ 억이라구라구라..)
저.. 친구들 부모 형제들 다 그런대로 잘먹고 잘사는뎁쇼.
마이너들이야 저도 가난뱅인데 무슨 수로 다 먹이..
그리고 세상의 문화, 자연 이딴것들을 먹이라니요..
(혹시 오늘 주님이 아픈게..)
어휴.. 이놈아 나는 멀쩡하다.
(허걱! 말도 안햇는데 어찌 알아찌?)
어휴 저 꼴통.. 베드로야.. 내가 니를 반석이라 한것은
니가 돌대가리라서가 아니고 세상의 내 양들을 떠 받들 사람이 되라고 붙여준 이름이다 알겟니 이 돌아..
양을 먹이라는 것은 생명을 주라는 것이고
생명을 준다는 것은 곧 나를 주는 것이니
세상을 우리 아버지가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이고,
세상의 사람들을 니 몸같이 아끼라는 뜻이다 이놈아.
즉 니가 배고플 때처럼,
사랑에 목말라할 때처럼,
그리움에 아파할 때처럼,
또는 부당한 대우를 받아 괴로울 때처럼
세상의 많은 아파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연민하고
그들을 가엾이 여기며
니가 대우 받고 싶은대로 그들을 대우해주라는 뜻이다.
세상을 원래 창조된대로 사람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한 형제 자매처럼 기쁨의 관계를 나누며
살 수 있도록 정치를 올곧게 하고 경제를 바로하고
사회를 보편타당하게 만들어
문화를 꽃피우며 역사를 바로 세워나가라는 뜻이다.
이게 양을 먹이라는 말의 뜻이다. 알겟니?
이 돌대가리 베드로야.
세상 것이라고 무조건 나쁘다고 여기고 기계적으로 말하는 것들..
세상 것이라고 나쁘고 더럽고 교회가 무슨 성전이라서 저절로 거룩하고
깨끗한 줄을 아느냐?
웃기지도 안으셔들..
그럼 교회에는 아무런 더러운 짓이 안일어나니?
이땅의 교회들을 한 번 봐 !
세상에는 착하고 이쁜 일들이 없니?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만이 내 양인줄 아느냐?
내가 뭐랬느냐.의인에게는 내가 필요없다 했지?
그래 그 잘난 교회 교인들이 모두 진정한 성도들이라면
그들에게는 내가 필요없다.
오히려 내가 부탁하건데 너희들의 그 힘으로, 그 돈으로 내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을 사랑해라. 무엇보다 세상의 사람들을 사랑해라.
그들에게 영생의 뜻 즉 나를 보여주고 나를 실천해라.
그게 내 양을 먹이는 것이다.
근데 너는 여기서 말하는 '내'가 과연 어떤 존재이며 누군지 아느냐?
너..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할려고
했지.?
(아니.. 어떻게 아셨을까.. 귀신같네.. 쩝..)
이놈아 입맛 다시지 마라. 내가 귀신인줄 알았느냐. 나는 귀신을 잠재우는 생명의 존재니라.
귀신이란 무엇이더냐.. 월하의 공동묘지에 나타나는 혼백이더냐.
거울에 비치는 한 맺힌 여인의 허울이더냐.
아니면 사람 속에 있다 쫓겨 나와 돼지 속에 들어가 나자빠진
희한한 얘기 속의 무슨 도깨비 괴물딱지 같은 것이더냐.
그리고 그게 무서우냐. 그런 건 세상에 있지도 않으니 걱정마라.
눈에 보이지도 않은 사탄 운운하며 사탄과의 영적 전쟁 어쩌고 하는
사기질에 속지마라. 진짜 귀신은 니 눈 앞에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느니..
겉으로는 내 말 책(성경)을 해설해주며, 혹은 들으며
세상의 있는 거룩 없는 거룩 다가진 듯 폼재면서도
제 배 불릴 생각이나 하고,
이웃의 아픔은 내몰라라 하고,
내 자식, 내새끼 잘되는 기도에 철야니 뭐니 하면서도
세상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값싼 동정 조차도 보내지 않는
소위 믿는다는 교회의 이기주의자들, 그들이 곧 사탄이다.
예를 들어 용산 철거민들, 그 춥고 배고픔에 고통스러워하다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 눈곱만치의 연민도 없는 교회 안의 위선쟁이들,
미전도 종족 선교니 뭐니 온갖 요란 법썩을 떨며 싸돌아 다니면서도
정작 밥굶는 어린이들 포함해 우리 이쁜 아이들 모두 차별없이 급식을 무료로 해주자는데
(그래야 진짜 급식 필요한 아이들이 마음을 안다치지)
입에 거품물고 반대하는 있는 놈들..
그놈들이 죄다 여의도 순복음교회니,
소망교회니,
사랑의 교회니, 충현 교회니..
이런 데서 초대형 호화판 신앙생활 하는 넘들 아니냐.
에이 썩어 죽을놈들. 이런 것들이 죄다 귀신이니라.
그럼 '나'는 누구냐?
그래 이놈 베드로야 말잘했구나.
나는 바로 너희들도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자녀중의 자녀,
곧 하나님의 아들이야.
그러면서 나는 너희의 친구이고 형제고 너희의 자매야.
즉 나는 너희들이고 너희는 나란 말이야.
너희가 꿈꾸는 이상이고 꿈이며 너희의 행복이며
진리이고 자유고 정의다 이말이야.
그러니 나를 특정한 부류만의 존재로 여기지 마라. 제발 부탁한다.
그것은 참으로 편협한 짓거리야.
그것은 내가 만든 이 세상을 진실로 분열시키는, 그야말로 사탄같은
사악한 행위야.
나는 세상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요, 그 아들이여 그 영이며
모든 이들의 형제 자매요 ,
세상 모든 이들이 꿈꾸는 길이요 진리며 생명이다 이말이야. 알겠니?
그게 바로 '나' 란 존재의 뜻이다 알겠니?
그러니 섣불리 나를 핑계로 나를 대적하는 무리들과 싸운다느니
나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를 알린다는 이유로
그들의 삶과 역사를 함부로 부정한다든가,
그들의 믿음의 방식과 그들의 문화를 경멸하는 짓은 곧
'나' 를 짓밟는 행위가 된다.
다른게 아니고 그게 바로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임을 알고
함부로 경거망동하지마라 알겠니?
그러니 어쨋든 '그저 니나 잘하세요?' 알겠니?
그러나 한가지 심히 걱정되는 것은 지금 예상하노니 베드로 너의 소위 믿음의 후손들이 나중에 '나'를 가지고 어떻게 교묘하게
지 밥벌이나 하고 온갖 욕심을 채우는 일에 써먹을지 보여서
한숨만 나온다.
아무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세상은 내가 창조한 것이니 원래가 순결하고 맑고 깨끗하며 조화롭고 완벽하다. 니가 이것을 믿는냐? 대답할 필요없다. 만고의 진리니.
그게 바로 내 아버지의 작업이며 내 말이 곧 창조 아니더냐.
그런데 뭐.. 교회는 깨끗하고 내가 만든 그 세상은 더럽다?
그래서 내가 다시 너희 곁으로 가는 날 너희는 구원받고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세상이 더럽다고 내가 말하더냐?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시더냐?
원래 세상은 너희들의 보금자리요 너희들이 사랑하고 행복해할
터전이니라.
함께 평화를 누리며 보존하며 조화로운 삶을 이루어가는 천국이니라.
그런 것을 너희들이 욕심을 부리고 혼자 가지려 하고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남보다 차별되게 대우받고 차별되게 누리려 하다보니
엉망진창이 되기 시작한거다.
세상 탓 하지마라. 원래 세상것 세상것 하고 욕하며
지혼자 거룩한 척하는 그놈이 가장 속되다.
세상이 더럽다고 말하면 곧 그것은 나를 욕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 세상을 위해 세상에 왔고
세상을 사랑하며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여 왔을 뿐 아니라,
그중에서도 너희들이 더럽다 나쁘다하는 창녀와 도둑과
가난뱅이 거지들과 함께 밥먹고 포도주 마시고
함께 누워 자고 했는데
그런 세상을 욕하고 그런 세상의 마이너들을 경멸하면
곧 내 얼굴에 침뱉는 행위가 됨을 알아라.
내가 예루살렘 교회 성전을 뒤엎은 것을 모르느냐?
내가 지금 세상에 가면 예루살렘 교회처럼 엎어질 교회가
수두룩 빽빽한데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그 안에서 기도하는 넘들 중에는
'제발 아버지여 주님을 보내지 마소서.. 그냥 이대로 살게 해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넘 들 많을게다.
교회가야 복받고
교회가서 헌금해야 착한 종이 되고,
그리고 교회를 위해 봉사해야
(세상의 참된 평화나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고)
구원받고 나로부터 칭찬 받는다고 나는 말한 적도 없거니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교회를 권력화해서 잘먹고 잘살려는
일부종교인들의 감언이설일뿐이고
교회 키우고 싶은 자기 생각이고 지 사정일 뿐이다.
교회가 나를 위하여 예배하는 장소라며?
그러면 소박하게 하면 되지.
뭐한다꼬 으리으리 삐까번쩍하게 지어서
엄청난 돈으로 목사 호화생활 보장하고 끼리끼리 놀고 먹는데에다
그 아까운 돈을 쓰냐. 그게 나를 위하는 것이라고? 지금 개그 하냐?
교회 안다녀도, 예수를 몰라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나처럼 세상을 조화롭고 평화로우며
고루 행복한 사회, 억압과 부당한 지배가 없는 사회,
사랑과 화해가 충만하여서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그런 화목하고 기쁨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각자 처한 위치에서 열심히 성실히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모두 천국의 자녀들이고 그들이 곧 내 교회의 성도들이다.
그들이 너희 모두가 경멸했지만 내게 칭찬받은 사마리아 여인이고,
강도만난 사람 구해준 선한 사마리아인이며
믿음좋다 칭찬받은 비유대(당시로서는 이교도) 백부장이다.
나더러 주여주여 한다고 모두 천국에 갈 줄 아느냐고 내가 말한 거
기억나니? 명심해라.
지금보니 주여주여 큰소리로 목쉬어가며 외치고 눈물콧물 다쏟아내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내 눈에는 모두 자기 신앙 만족을 위해 자기 감정에 도취된 사람들로
보인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베드로 네 믿음의 후손 중에 한 사람이 오늘 교회 안갔다고,
농땡이 부렸다고 죄인되는 것 아니니 걱정 말라고 알려줘라.
그것은 모두 교회를 자기 탄탄한 직업의 토대로 생각하는 목사들이나
교회를 자기의 믿음을 과시하며 교회에서 받은 직위를 누려보려는
일부 믿음 있는 척 하는 현대판 신 바리새인들같은 직분자들,
소위 내가 말했던 독사새끼들, 회칠할 무덤에나 들어갈 녀석들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 아이가 오늘 쉬어서 안식하고 평안하냐. 그럼 되었다.
예를들어, (내가 워낙 비유를 좋아하니 예를 많이 든다고 짜증내지 말고 이해해라)
일하는 것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인데 그 일로 인해 먹는 것도
못먹을 지경으로 일한다거나
그일로 인해 먹는 것이 괴로운 그런 일을 하면 안되듯이,
그래서 그저 먹고 살정도면 쎄가 빠지게 일을 안해도,
즉 가끔은 휴가를 가도 되듯이..
우리가 믿음생활하는 것이
앞에서 내가 말한 세상의 평안과 사회정의를 위한 것도 있지만
그속에서 다 각 개인이 정신이 평안하자고,
영적으로(나는 이 말보다 '마음으로' 라는 말이 더 좋다)
행복하자고 교회가는 것인데
때론 그냥 단순하게 교회 안가고 집에서 쉬어서 평안하고
행복하면 되었지 무엇이 더 필요하냐.
오히려 교회 안왔다고 무슨 믿음없는 사람,
신앙의 뿌리가 없는 사람 취급하는 그것 때문에
억지로 교회가는 것이라면
그게 더 불편하고 진정한 안식이 사라지는 것 아니냐.
그건 믿음하고 아모 관계도 없지 않느냐.
그러니 베드로야 니가 우쨋든동 사람들을 잘 가르쳐라.
엉터리 사이비 신앙인 안나오게.
내가 심히 걱정이 된다.
거짓과 위선을 누구보다도 싫어하신 분이 예수인데 그 예수를 제발 있는 그대로 잘가르치고 잘 배워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사람들이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세계평화와 공동체적 기쁨이 입만 열면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깨어지는 불상사가 더이상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교회 나가야 참다운 교인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은 사라지고 유대 제사장 중심주의 곧 사제중심주의로 돌아간 것에 다름이 아니다.
사람이 중심이며 사람의 행복이 곧 믿음의 본체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며 그 것을 세상에 가르치고 보이기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곧 신본주의 반대는 인본주의가 아니다. 기독교에서 신본주의란 곧 인본주의를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가 곧 나인 것이다.
예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잘 읽어보라.
우리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위대한 존재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다.위대한 이땅의 존재로.
다만 사람의 탈을 쓰고 벌레만도 못하게 살면 안된다는 뜻이다.
그런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들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위로 경고를 주는 것일 뿐,
우리가 뭐 태어날 때 부터, 또 모든 이 땅의 사람들이
그런 존재로 났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을 경계해라.
그 사람이 남을 벌레로 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믿음이 좋은 척하는 많은 사람들이
무리들 앞에서는 스스로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여기고
무릎꿇는 것이 무슨 겸손의 요체인 줄로 착각하고 있지만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소위 제사장, 서기관스러운 짓, 즉 일종의 음모다.
성도들을 우매한 무리로 한정시켜 놓고
성경해석과 교회운영에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교회로부터의 온갖 이권을 독점하려는 음모.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잘 새겨들어라.
암튼 신본주의의 반대는 사탄주의다.
즉 인간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믿음이 아닌 것, 그것이 곧 사탄의 세계이고,
그런 위선적이고, 약간 어렵게 말해서 제국주의적 속성을 지닌 지배적인 믿음으로 건설하려는 왜곡된 공동체가 소위 그들이 말하는 선교에
숨어 있는 경우가 많으니 잘 따져 보아야 한다.
즉 인간을, 성도를 하염없이 연약하고 무지하고 몽매하며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고 가르치는 것은 그들 소수 종교권력가들의 음모이다.
잘 분간해야 한다.
오늘 세상을 위해 세상 사람들을 위해 그 평화와 행복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그것이 예수의 기도요, 삶이니
우리의 기도와 삶 역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것이 크리스천의 삶이다.
결국 교회를 가고 안가고는 본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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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준
| 2011-02-20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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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ght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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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1-02-21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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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님의 글을 보니 크리스챤으로서 많이 부끄럽고 찔립니다. 정호승의 시 \"서울의 예수\"가 보이고 최근에 빌려 본 [전태일 평전]에서 진정한 십자가를 지신 작은 예수, 즉 예수 정신을 살다가 불꽃되어 스러져 가신 전태일 선생이 생각나는 글입니다. 이 글은 신학적 진술이 아님에도 진정으로 \"신학함\" (doing theology)을 드러내는 글입니다. 이렇게 예수 사상과 실천을 보여주는 글은 참 오래간만입니다. 부끄럽고 그리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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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1-02-21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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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동안 남이 아주 요약한 전태일 선생에 대한 글을 보었었는데, 그 분이 남긴 일기나 산문을 맥으로 해서 나온 [전태일 평전]을 몇 주 전 읽고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2년 수준의 교육과 아주 짧은 기간의 야학을 통한 중등 교육이 전부인 그가 오직 스스로 깨쳐 당시 평화시장의 여공들의 비참한 노동 현실을 보며, 법대생이나 볼 법한 한자 투성이의 [근로기준법] 책을 독파하고 살신성인으로 사랑을 실천하신 전태일 선생. 그래서 저는 전태일 열사는 진정한 우리 시대의 \"선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갈릴리라는 변방 출신으로 지금도 어느 종교 계열이나 학파인지도 전혀 그 계보를 알 수 없으나 당시의 지배게급으로서의 성직자 계급인 사두개인과 평신도 엘리트 계급인 바리새파들과 논쟁하면서 죄인으로 낙인 찍한 사람들과 버려진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처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데 전력을 다하다가 끝내는 기존 체제를 위협하는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예수. 이 분 역시 자생적으로 \"깨침\"을 한, 이른바 민중으로 살다가 민중과 더불어 \"예수운동\"의 모범을 보이신 분.
그래서 두 분은 서로가 참 많이 닮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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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d
| 2011-02-21 07:04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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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이리 글을 맛깔나게 쓰시는지요
넘 잼나게 읽었습니다
동감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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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의 평화
| 2011-02-22 09:32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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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준 님 // thanks !!
아프리카님 // 부끄럽다니요.. 님으로부터 받은 많은 영감이 제 생각의 바탕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학한다는 것 말입니다. 신학은 결코 목회자나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 모든 믿는 사람들은 진정 신학에 대해 고민해야한다는 것. 그것이 곧 믿는 믿음의 올바른 행위와 직결되어 있기에.
저도 전태일에게서 일찍이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 분이야말로 금관의 예수가 아닐까 하며.. 감사드립니다.
Wind 님 //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우리는 그간 성경 말씀이나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딱딱하고 진지하며, 너무 지루하게 말하고 들어왔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일단 들어서 재미있으며 속이 후련한 그런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제사장, 바리새인들 앞에서 감히 말 못하던 것을 우리 예수께서는 목수출신이었지만 누구보다도 권위있게, 깊이있게, 또한 속시원하게 정곡을 찌르며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먼저, 다시 처음과 같이 필요한 것은 성경과 하나님, 예수님의 세계에 대해 누구나 자유롭게, 찍히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 없이, 마음껏 이야기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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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1-02-22 10:23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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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이 있는 곳에는 항상 movement와 institution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운동이 갖는 이념은 제도화되었을 때 제대로 실현될 수 있는데, 제도화는 이 운동이 갖는 이념을 배반하는 경향이 많으니까요. 예수는 크리스챤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크리스챤이라고 부릅니다. 이 딜레마는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숙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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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
| 2011-02-24 06:22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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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평화님의 해박한 성경 해설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신앙에 심취하지 않고 있는 저 같은 사람에게 정말 마음의 평화를 안겨주는
좋은 글입니다. 비유에도 종류가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격조있는 풍자는
한 편의 서사시 입니다.
계속 좋은 글 읽기를 기대해 봅니다.
겨울 감기 조심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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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의 평화
| 2011-02-24 07:33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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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님// 그래서 포이에르 바하는 진정한 예수 운동은 안타깝게도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고 하면서 바울이야말로 예수운동을 왜곡한 장본인이라고 하였던가요.
예수는 기독교를 창시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회복함으로서 시대를 변혁하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즉 당시 유대교가 지닌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낡은 해석과 율법이 더이상 새로운 시대, 즉 이스라엘 민중이 요구하는 새로운 사회와 세계에 맞지 않았기에
예수께서는 이를 혁명적으로 바로 잡으시려 한 것이었고 바울은 탁월한 지적 능력에 의해 그것을 체제 순응적으로 박제화한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바울에 의해 시작된 크리스천 운동은 예수의 삶을 따라사는 변혁적이고 혁명적인(종교적으로 말해서 회개에 의한 거듭남의 삶) 모습을 배제한 채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일종의 우상화 하여 운동성을 싸그리 제거하였기에 어떻게 보면 바울이 속했던 계급적인 입장의 해석에 꼭 알맞게 재구성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예수를 우상화하는 의미가 아닌, 그야말로 이와같은 예수 운동의 변혁적인 측면을 따라 실천적으로 살아가야 비로소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초님// 저는 우선 성경 지식이 전혀 해박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을 읽으며 앵무새가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으로 정독하려할 뿐이지요. 과분한 칭찬에 감사드리지만 다소 부끄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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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1-02-24 16:39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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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님, 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movements=>institution로의 전이를 말씀드린 것은 기독교 뿐 아니라 모든 집단 운동이 갖는 보편적 유형 (pattern)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엔 저의 개인적 신념이나 가치가 배제된 것이죠. 읽어야 된다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고 출처를 밝히는 것이 저의 습관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이 문제는 미국의 종교 사회학자인 Thomas O\'Dea가 그의 책 [Sociology of and the Study of Religion: Theory, Research, Interpretation] 제 13장 \"Five Dillemas in the Institutionalization of Religion\", pp. 240-255에서 잘 다뤄지고 있습니다.
예수 운동 (Jesus Movments)의 초기 사상은 철저한 종말론적 관점에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 자신이 곧 세계 파국이 오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바울 역시 그의 생애 전에 파국이 오리라고 믿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는 역사적 예수 역시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신약성서의 최초 문서는 바울이 쓴 데살로니가 전서 (약 50 CE )이고 사복음서는 그것보다 20에서 심지어는 50년 후에 기록된 것이라서 이 복음서에 바울사상의 영향이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한국에서는 민중신학자 안병무 교수에 의해서 많이 이뤄졌습니다. 안 교수는 기독교의 제도화의 사회학적 측면보다는 교리적 변화에 더 관심을 많이 가졌고, 이에 바탕하여 바울을 비판하였습니다.
바울의 한계라면 그가 로마 시민이었다는 것과 그의 선교 대상이 주로 흩어진 유대인 (diaspora)이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에 있던 유대인의 수가 로마 제국에 흩어진 유대인의 수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제기억으로는 1/3 정도로 소수였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흩어진 유대인을 대상으로 주요 선교를 했다는 것이며, 당시 유대적인 요소로 베드로 등에게 남아 있던 할례 제도도 탈팔레스틴 측면에서 폐기시켰으며, 제사음식의 섭취 여부도 역시 이런 맥락에서 무시한 측면이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운동을 왜곡시켰다기 보다는 모든 종교가 갖는 운동=>제도로로의 전이에 갖는 한계를 드러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같습니다. 바울의 공헌이라면 부족 또는 민족신앙으로 남아 있을 유대종파인 예수 운동을 보다 더 보편적인 종교인 기독교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바울의 한계라면 그가 당시 기독교 운동 중에서 가장 앞섰던 이론가라서 당시 베드로 등등의 이론가가 아닌 실천 위주의 사람들을 평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는 자기 이론에 상당히 우월한 의식을 갖고 있었고, 그러한 이론이 당시의 주류 담론으로 되길 바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서신서에서 쓴 이단 등등의 말은 바로 자기와 다른 이론을 견제하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좀 교조주의자였습니다. 세계종말과 파국을 그 역시 예상했다는 면에서 교조주의자가 아니었었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 기독교가 문제는 어쩌면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몰리고 아타나시우스가 승리한 탓일 수도 있습니다.
콘스탄틴 이후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수가 이단 문제가 아닌 자유 경쟁 관계에 있었다면 세계 기독교 역사의 지형은 완전히 달랐을 것입니다. 최근에 잊혀진 기독교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테 이것을 통해서 최기 기독교를 재건하는 노력도 필요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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