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가신다기에 생각나는 이것저것을 적어봅니다. 저는 논객도 아니고 전문지식도 없고 방대한 자료를 취합하여 분석할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가시는 분의 드러나는 목적도 중요하지만, 저의 짧은 경험으로 이외에도 저와 같은 이런 생각도 있다는 것을 전해드리는 것이지요.
제가 베트남에 세 차례 가보았는데 1993년에서 1995년까지 매년 한 차례 1주일 이내의 짧은 여행이었지요. 며칠 머물다보니 일뿐만 아니라 잠시 관광도 하였는데, 구찌터널, 대통령궁, 그리고 붕타우가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도 북쪽의 하롱베이, 그리고 호치밍 인근의 메콩강이 최고의 관광명소라는데 아쉽게도 가보진 못했습니다. 구찌터널은 땅속 깊이 수백킬로미터나 되는 좁은 땅굴을 구축하여 장기간 대미항쟁에 이용되었지요. 굴속에 숙소와 주방시설뿐만 아니라 무기고, 야전병원, 지휘관 회의장소 등 다양한 삶의 터가 산재합디다.
1975년에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아마도 상당기간 베트남은 반대파 처벌 등 전쟁 후유증을 겪게 되고, 경제는 침체하고 많은 베트남인들이 보트 피플로 다른 국가로 탈출하게 됩니다. 첫 베트남 방문 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마침 베트남계 미국인이 제 옆자리에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지요. 그 분은 당시 40대 후반, 자신이 보트 피플로 미국에 이주하였고, 처음으로 베트남 고향에 다녀온다고 하였습니다. 그 분은 남북 베트남이 통일된 후 거의 20년이 지났지만 달라진게, 그리고 경제적으로 나아진게 하나도 없어 실망이 컸다는 얘기였습니다.
아마도 제가 첫 방문한 1993년이 개방과 개혁의 초기단계가 아니었던가 짐작되고, 그 분도 몇 년 후에는 베트남의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1993년에는 호치밍 시내가 자전거로 뒤덮였는데, 다음해는 반 정도가 오트바이, 그리고 다시 한해가 지나면서 거의 오트바이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았지요. 당시 대만의 타이페이가 오트바이 천국이라 했는데, 호치밍이 이를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하여튼, 이후 베트남은 경제적 성장을 지속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베트남이 동남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견하였습니다. 1억에는 못미치지만 적지 않은 인구에, 근면하고 똑똑한 국민성으로 인근 국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 캐나다에도 많은 베트남인들이 진출하였고, 특히 일전에 보니 알버타주 의회 부의장이 보트 피플의 베트남인이더군요.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베트남에 가시면 과거의 반미만 보지마시고 베트남 통일 이후 어떻게 화합을 이루고, 다시 개혁과 개방을 통하여 경제발전에 동참하였는지도 보셨으면 합니다. 한때 북한이 중국을 개혁 개방의 모델로 보기보다는 베트남이 더 적절하지 않느냐는 전문가의 언급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중국과 베트남의 개혁 개방 정책의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는 저는 잘 모르지만... 물론 베트남도 지금 문제점을 안고 있지요. 얼마 전 자칫 심각한 외환위기를 경험할 뻔 하였고, 현재의 일당체제는 언젠가 해체되어야 할 정치적 과제이고요.
한 가지 추가한다면, 여행 당시에 베트남인은 전쟁을 치렀던 한국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한국은 당시 미국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 냉전의 구조였기에 크게 마음 상하지 않는다며, 그리고 자신들 베트남은 승전국이지 않느냐고 반문하더군요. 미국에 대해서도 자신들은 승전국으로서 의연하게 대처한다더군요. 그리고 미래가 더욱 중요하고 미국과 좋은 경제적 파트너로서 발전을 희망한다고 하였습니다. 개인과 개인의 이야기였으니 전체를 대표한다고는 할 수 없고요..
세상은 변하는데 반미에 너무 초점을 맞추는 모습이 아쉽더군요, 이집트 민주화도 반미에만 초점을 맞추면, 반미의 선봉인 리비아, 이란, 미얀마의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은 어떻게 설명이 되나요? 동서를 막론하고, 잘살고 못살고를 떠나, 모두들 자유, 민주, 경제적 부의 진전를 희구하지 않습니까? 긴 역사는 이를 향한 자그마한 발자국들이 모여서 성취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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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입장에 관계없이 정돈된 글을 좋아합니다. 자기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려는 최선의 노력이 배어있는 말이나 글은 그 자체로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논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을 상대방이 읽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들면 그 사람이 뛰어난 논객인 셈이지요. 베트남은 처음 가는 나라입니다. 처음 가는 나라에 대해 통일 이후의 흐름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베트남은 개인적으로 (개인적으로 보다는 가정사적으로) 좀 특수한 인연이 있는 곳 이기도 합니다. 사촌형과 사촌매형이 참전했었지요. 사촌매형은 해병대 파월교관과 대대장으로 근무했었는데 얼마 전 소개한 적이 있는 그 여군 아이의 할아버지입니다. 사촌형 역시 제가 어린 시절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투부대에서 많은 교전을 치른 모양인데 언제 LA 에 가면 그 때 한 그 이야기들이 진짜인지 뻥인지 물어볼 생각입니다. 이제 환갑도 한참 지났으니 좀 진지하게 이야기 해 주겠지요.
매년 한국 갈 때마다 끼워 넣기로 동남아 여행을 합니다. 휴가를 한국에서 보내는 셈이지만 한국에서는 일종의 업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따로 사 오일 시간을 내서 ‘진짜 휴가 삼아” 다녀오는 것입니다. 올해는 라오스와 미얀마를 가려다가 최근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가깝게 지낸 형제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그 나라를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거지요. 뭐, 다른 거창한 이유는 없습니다.
배트남 전쟁을 바라보는 정치적 입장을 전개하는 방향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오늘은 긴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지는 않군요. 그래도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지나가면 섭섭하니까……가해자론이나 용병론 이런 거 말고 참전 동기만 잠깐 짚고 넘어가도록 하지요.
보통 우리가 알고 있기에 한국은 미국의 강요에 못 이겨 참전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란 거죠. 미국의 한국군 참전요청이 거론되기 훨씬 전인 1961 년 11 월에 박정희 씨 (당시 최고회의 의장)가 미국을 방문했는데 이 때 박정희 씨가 먼저 케네디 에게 한국이 참전할 수 있도록 검토해 달라고 처음으로 요구했다고 합니다. 케네디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박정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매우 흡족해 하기는 했다고 합니다.
백악관이 흡족해 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그들이 이 때 박정희를 미국에 불러들인 이유와 관계가 있는데, 미국이 좌익으로 알고 있었던 박정희의 사상검증을 하고 싶어했던 거죠. 이 시험에서 박정희가 합격점을 받을만한 모범답안을 내 놓은 겁니다. 박정희가 이 때 월남전 참전을 제안한 것은 경제발전을 위한 승부수니 뭐니 그런 게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축출당하지 않고 군사쿠데타를 인정 받기 위해 그런 제안을 한 것 입니다. 그런데 박정희의 제안은 1963 년 11 월 22 일 케네디가 암살되고 민주당 우파 린든 존슨이 권력을 승계하면서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베트남이 1992 년 이후 도이모이 정책을 도입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은 훌륭한 일 입니다. 그들은 1976 년 이웃 캄보디아 폴포트 정권 내부의 좌편향기회주의자들이 저지르는 비행과 망동을 목격하면서 반면교사 삼아 배운 것이 많았을 것 입니다. 저는 베트남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 베트남계 미국인이 말씀한 대로 승전국의 입장에서 의연할 수 있고, 경제적 번영에 도움이 된다면 미국과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 그 나라의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세상이 변해 개혁의 대상으로마저 보이는 그 黨이 중심이 돼서 과거에, 즉 제국주의자들이 그들의 조국을 유린할 때, 목숨을 걸고 항쟁했고 목숨을 걸고 항쟁한 덕분에 그 전쟁에서 승리한 지 36 년이 지났으니까요.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세월이 가면서 관계의 의미가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지 과거의 역사를 잊어도 좋다는 의미는 결코 아닐 것 입니다. 미래가 더욱 중요하고 미국과의 좋은 파트너가 되기를 원한다는 말과 침략전쟁-전쟁범죄를 잊겠다는 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이죠. 반미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역사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까 미국의 문제들을 지적할 수 밖에 없는 것 이겠지요.
좋은 정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찌터널은 그렇지 않아도 꼭 가 보려던 참이었습니다. 전쟁박물관과 독립궁도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고요. 시간이 허락한다면 호치민에서 혁명수도 하노이까지 달리는 통일열차를 타 보고 싶군요. 하롱베이는 이구동성을 칭찬하는 절경인 모양인데, 저는 태국에서도 그랬지만 자연 경치보다는 사람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갖고 싶습니다. 딱히 자연경치보다 사람 사는 모습에 흥미가 더 있다, 뭐 이런 이야기라기보다는 머무는 시간이 워낙 짧은 만큼 기억에 남을 만한 ‘인연’을 좀 더 많이 만들고 싶어서이겠지요.
어제 몇 분 댓글에 인사도 드릴 겸 씨엔드림에 접속을 시도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이 자리를 빌어 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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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래 제 굴에 잘못된 부분이 있어서 역시 이 자리를 빌어 교정하겠습니다. 1965 년 10 월 16 일 부산항을 출발한 번개부대는 수기사 26 연대가 아니라 기갑연대 (현재는 기갑여단) 였습니다. 수기사 보병연대인 26 연대는 혜산진부대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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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 자료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 기억에만 의존해서 쓰다보면 연도 수치 지명같은 것을 표기함에 있어 오류가 종종 발생하는데, 지난 번 은하 2 호 발사일을 4 월 5 일 대신 9 일로 표기한 것도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먼에는 도이모이 정책 실시년도가 잘못됐군요. 1992 년이 아니라 1986 년 입니다. 이 해 등장한 구엔 반 린 공산당 서기장이 도입한 정책 (여분으로 생산된 쌀 판매허용과 관련한)이지요. 1992 년은 한국이 베트남과 수교한 해인데 \'연상착각\'을 일으켜 또 오자를 냈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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