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년 전인 2007 년. 월간중앙 4 월호에는 주목할 만 한 특종기사 하나가 실렸다. 한-일 양국정부간에 이루어진 독도밀약의 실체에 관한 기사였다. 독도밀약이란 1965 년 당시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일본의 사또 에이사꾸 수상 사이에 체결된 독도 영유권에 대한 절충협약을 말한다.
이 비밀협약의 실무적 완결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엉뚱하게도 서울 시내 동북쪽 구석에 있는 어느 고급주택에서 기자들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난 두 명의 중년사내에 의해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자투리 정보들을 토대로 sarnia 식 분석기법을 동원하여 당시 성북동 상황을 드라마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65 년 11 월 어느 날,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고급주택가로 손꼽히던 성북동 골목에 위장번호판을 단 검은 색 뉴 크라운 S 한 대가 나타났다. 그 고급승용차는 한 저택 앞에서 조용히 멈춰 섰다.
거의 같은 시간, 외교관 번호판을 단 감청색 머르세데스 한 대가 소리도 없이 굴러오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정차했다.
파리가 걸어가다가 미끄러질 정도로 깔끔하게 세차된 뉴 크라운 S에서 중절모에 안경을 낀 50 대 사내 한 명이 먼저 내렸다. 그 사내는 세련된 행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빈집털이꾼 마냥 좌우를 재빨리 살피더니 그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이어 감청색 머르세데스에서 40 대 후반의 사내가 내렸는데 그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는 법이 없이 단정한 걸음걸이로 그 집 대문을 들어섰다.
두 사내가 들어간 그 집은 소문처럼 비밀요정 같은 곳은 아니었고, 사실은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의 개인주택이었다.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 하면 ‘’어.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맞다. 비자금과 해운산업 통폐합 문제로 전두환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다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던 중, 1987 년 4 월 19 일10 층 자기 사무실에서 투신자살한 그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이다.
암튼 이 날 성북동 박건석 회장의 저택에 나타난 중절모의 50 대 사내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온 사람이었는데, 해방 전 제국일본 만주군 용정 (龍井) 헌병사령부 소속 헌병사령으로 행세하던 나까지마 잇껜 대위가 바로 그였다. 그는 해방 후에 ‘정일권’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다시 복원해서 사용했는데, 당시에는 대한민국 국무총리로 재직하고 있었다,
외교관 번호판을 단 머르세데스에서 내린 40 대 후반의 사내는 사또 에이사꾸 일본 수상의 특명을 받고 서울로 날아온 비밀특사 우노 소스께 자민당 의원이었다.
이 날 두 사람의 협약은 우노 소스께가 가져온 문서에 정일권이 이의를 달지 않고 사인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우노 소스께는 정일권의 사인을 받자마자 놀랍게도 일본 대사관이 아닌 용산 주한미군사령부에 설치된 핫라인을 이용해 도쿄의 수상관저에 이 사실을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월간중앙의 특종 보도 이후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 비밀협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독도영유권문제는 일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하므로, 앞으로 체결될 ‘한일기본조약’에 그 문제를 포함시키지 말 것.
2. 한일 두 나라는 독도를 각기 자국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어느 일방이 다른 일방의 영유권주장에 반론하는 경우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말 것.
3. 앞으로 어업구역을 정할 때, 한일 두 나라가 독도를 서로 자국영토로 인정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해역을 ‘한일공동수역’으로 정할 것.
4. 현재 한국이 독도를 점거한 현상을 유지하지만, 한국은 그 섬에서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시설을 증축하거나 신축하지 말 것.
5. 한일 양국정부는 위의 조항을 준수할 것.
이 다섯 개 조항은 이후 한일 국교수립과정에서 그대로 관철됐다.
독도수역을 울릉도를 기준으로 한 EEZ (배타적 경제수역) 이 아닌 한일공동관리수역으로 설정하되 한국정부가 임시로 관리하도록 일본이 양해한 점, 독도의 관리를 영토수호 개념인 군대가 아닌 해양경찰에 맞긴 점 등은 모두 이 비밀협약에 근거한 행정절차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 독도밀약의 존재로 인해 현재 독도의 국제법상의 지위는 대한민국의 영토도 아니고 일본의 영토도 아닌 애매모호한 것으로 되어 버렸다. 양국이 동시에 영토권을 주장하는 ‘영유권 미정지’ 로 그 국제법상의 위치가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1965 년 한국정부가 일본측이 요구한 독도밀약을 일본측 원안대로 인정해 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돈 때문만이었을까? 당시 대한민국이 너무 가난한 나라여서? 흑흑……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월간중앙의 독도밀약 특종보도가 나가기 딱 1 년 전인 2006 년 3 월, 미국에서는 아주 중요한 외교문서 하나가 공개됐다. Van Fleet Report 가 그것이다.
Van Fleet Report 란 한국전쟁 후반 주한미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이었던 James A. Van Fleet 대장이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특급기밀문서를 의미한다.
마침 취재거리가 없어 빈둥대고 있던 국내언론사의 어느 특파원 한 명이 버지니아 군사학원 도서관 서고 한 구석에 처 박혀 있던 이 고색창연한 두꺼운 문서철을 발견함으로써 미국과 일본 뿐 아니라 당시 대한민국 정부 역시 암묵적으로 수용한 독도문제에 대한 비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도서관 서고에 굴러다니던 것으로 봐서 오래 전에 기밀은 해제된 문서 같은데 독도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한국 기자에게 발견됐기 때문에 갑자기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국내에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문서를 썩은 도끼자루 취급을 하고 있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이 특급기밀문서가 공개됐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는 그 문서에 나와있는 조약의 내용과 독도 영유권에 대한 미국정부의 공식입장이 일본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연하게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미국과 일본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 이 보고서에 잘 나와 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국제법적 근거는 1951 년 승전국 미국과 패전국 일본간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다.
잠깐 당시의 종전과정을 살펴보자.
대한민국 고딩 열 명에게 ‘2 차 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해방된 해는 언제일까요?’ 하고 물으면 열 명 중 다섯 명은 ‘1945 년 8 월 15 일이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머지 다섯 명은 이날을 다른 날짜로 알고 있거나, 잘 모르거나 아예 질문 자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sarnia 의 말이 아니고, 입만 열면 좌파정권 10 년 동안 아이들 교육을 망쳐 놓았다고 거품을 무는 어느 우익인사가 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대답, 즉 1945 년 8 월 15 일이라는 대답 역시 장학퀴즈 같은 데서는 정답일지 몰라도 기술적으로는 정답이 아니다. 1945 년 8 월 15 일은 일본 전범집단의 두목인 일왕 히로히토가 항복선언을 발표한 날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날이다.
우선 일본이 공식적인 항복문서에 서명한 날은 1945 년 9 월 2 일이다.
잠깐 여담이지만, 이 날 도쿄만에 정박하고 있던 미 항공모함 USS 미주리호 함상에서는 역사적인 항복문서 조인식이 거행됐는데 그 날의 기록영화를 보면 지팡이를 짚고 나온 일본인 노친네 한 명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바로 일본 대표로 나온 두 사람 중 한 명인 시게미쯔 마모루 당시 일본 외무장관이다. 그는 항복문서에 서명한 후 A 급 전범으로 체포돼 도쿄전범재판에서 금고 7 년 형을 선고 받았으나 곧 가석방돼 전후 일본 정계로 진출했다가 외무장관을 한 번 더 해 먹은 인물이다. 그가 지팡이를 짚고 미주리호 함상에 나타난 사연은 중국공사 시절인 1932 년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 파편에 맞아 한 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젠장 나이를 먹는지 자꾸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지니 이야기가 자꾸 삼천포로 빠지려고 한다.
자 각설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서류상의 항복문서 서명은 1945 년 9 월 2 일에 이루어졌고……서류상의 종전은 1951 년 9 월 8 일San Francisco War Memorial and Performing Arts Center (샌프란시스코 전쟁기념 공연예술센터) 라는 길고도 요상한 이름을 가진 건물에서 연합국과 일본간에 평화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졌다.
즉 이 날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연합국과 일본간의 협약 내용이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이 협약에서 연합국을 대표한 미국은 독도를 대한민국에 반환할 도서 명단에 포함시키지 않고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을 인정해 주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의 트루만 행정부는 독도문제를 포함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내용을 한국의 이승만 정부에게 은밀하게 전달했다. 당시 전쟁 중이었던 이승만 정부는 독도문제에 대해서 일체의 공식적 항의를 하지 않았는데, 이 이야기는 다시 말해 미국이 실수로 독도를 반환도서명단에서 제외시킨 것이 아니라, 일본과 공모 하에 전쟁 중이라는 대한민국의 어려운 처지를 이용하여 독도의 일본 귀속을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독도 영유권 유지에 대한 의사표명은 일본이 했을 테지만 협약에 대한 모든 칼자루를 쥐고 있는 미국이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인데, 문제는 미국이 미국이라는 일개 국가의 자격이 아니라 2 차 대전 승전그룹인 연합국 대표의 자격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뭐, 논문이나 기사 쓰고 있는 것 아니니까 더 길데 이야기 할 것은 없고, 스토리가 이쯤 되면 독도문제가 구호만으로는 참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감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번에 독도 발언을 한 일본 외무장관 마쓰모토 다케아키의 가문이 또 휘황찬란하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외고손자다. 다시 말해 그 일본 외무장관의 외고조 할아버지가 이토 히로부미다. 이토 히로부미는 19 세기 말부터 20 세기 초에 걸쳐 총리대신 등을 역임하며 일본을 서구열강과 동등한 지위로 격상시키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인데, 1909 년 10 월 26 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조선 청년이 발사한 권총 세 발을 맞고 사살됐다.
이런 작자들의 발언에 맞서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라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으려면 대한민국은 우선 ‘박-사토 사이에 체결된 독도밀약’에 대한 파기선언을 함과 동시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독도 항목에 대한 불인정 선언을 해야 한다.
만일 대한민국의 어느 대통령이 ‘1965 한-일 독도밀약’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상의 미-일 독도밀약을 일방적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독도에 해양경찰대신 해군을 파견한다면 sarnia 는 그 대통령이 이명박 씨라도 지지를 표명할 것이다,
헌데…… 그렇게 되면 일본은 당연히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것이다.
그 재판에서 이길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답이 없다.
분명한 것은
참 외로운 싸움이 될 것 같다는 짐작이 들 뿐......
2011. 04.02 20 55 (MST) sar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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