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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겸 탤런트 김여진 씨가 전두환를 가리켜 학살자라고 불렀다. 진상규명도 단죄도 사과도 용서도 없이 기억 저편으로 묻혀져 가던 사건 하나를 새삼 일깨워 준 것이다. 김여진 씨는 광주항쟁이 있던 그 해 여덟 살짜리 소녀였었다.
대통령 이명박 씨는 전두환을 가리켜 ‘큰 사돈 어르신’이라고 부른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전두환의 막내아들 전재만의 부인은 이윤혜다. 이윤혜는 한국제분 회장 이희상의 딸이다. 이희상에게는 딸이 셋이 있는데 둘째 딸 이유경은 신동방그룹 회장 신명수의 조카며느리다. 이희상의 막내 딸, 그러니까 이윤혜의 여동생이자 전재만의 막내처제 이름이 이미경이다. 이미경은 효성그룹 회장 조석래의 큰아들인 조현준의 부인이다. 조현준에게는 작은 아버지가 하나 있다. 쉽게 말해 효성그룹 회장 조석래의 동생이 그의 작은 아버지인데 그가 바로 한국타이어 회장 조양래다. 조양래에게는 조현범이라는 아들이 있다. 조현범의 부인 이름이 이수연이다. 이수연은 이명박의 딸이다. 뭐 지금 언급한 가문 외에도 거미줄처럼 엮인 혼맥으로 대한민국 명사들의 이름이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이 이어지는데 다 생략하고, 일단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만 간단하게 총정리하면 전두환의 막내아들 전재만의 동서의 사촌 제수가 이명박의 딸인 셈이다. 그래서 이명박이 사석에서 전두환만 보면 ‘아이고! 큰 사돈 어르신’ 하면서 90 도로 허리를 꺾는 것이다.
전두환이 29 만 원 가지고 퇴임 후 지금까지 23 년 동안 1 년에 만 원 씩만 쓰면서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를 결사 보위하는 막강한 대한민국 로열 패밀리 덕분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그는 지금쯤 대한민국 교도소가 아니라 반인륜범죄자들을 처벌하는 국제전범재판소 감옥에 수감돼 있어야 마땅한 자다.
암튼 그건 그렇고, 영화배우 겸 탤런트 김여진 씨가 광주항쟁 당시 여덟 살이었는데 이명박 씨는 그 해 서른 아홉 살이었다. 그러니까 이명박씨는 김여진 씨의 올해 나이에 그 엄청난 사건을 목격한 셈이다. 그는 대통령이면서도 3 년 째 광주 국립묘지를 찾지 않은 인물이다. 그가 광주 국립묘지를 찾은 적이 있기는 있는데 한 번은 묘소를 참배하고 나오면서 갑자기 실성한 인간처럼 파안대소를 하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었다.
김여진 씨와 이명박 씨를 비교하는 이야기는 이쯤하고 이제 미국 이야기를 조금 하자.
그 때, 신군부에게 자신감을 심어 준 장본인은 미국이었다. 이미 기력을 소진한 공수부대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실의에 빠져 있던 전두환과 신군부에게 미국은 한미연합사를 지휘하는 주한미군사령관의 작전지휘아래 있던 대규모 보병사단을 그들에게 넘겨 준 것이다. 5 월 21 일 도청 집단발포사건 이후 공수부대를 철수시킨 이래 의욕을 잃고 사무실로 출근도 안하고 있던 전두환에게 그 순간의 미국은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5 월 27 일 광주 재점령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신군부의 5 월 27 일 광주재점령 성공이야말로 신군부의 집권을 가능하게 만든 견인차가 되었고 신군부의 집권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다시 12 년이나 늦추어 놓았다.
그 날 새벽 최세창 준장이 지휘하는 제 3 공수특전 여단 소속 11 대대 1 개 지역대로 편성된 선봉 특공조가 조선대학교 뒷산을 조용하게 출발했다. 수류탄과 M16A1 소총으로 경무장한 특공조는11 대대장인 임수원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장악 목표물인 도청과 광주 YMCA 전일빌딩을 공격하는데 필요한 거점을 장악하기 위해 투입된 것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지쳐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특공조 지휘관 임수원 중령은 일주일 전인 5 월 21 일 정오 도청 앞에서 사수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대대장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그 날 그의 부하 사병 한 명이 시위대의 장갑차에 깔려 사체가 박살이 난 채 죽는 모습을 눈 앞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공포스러웠던 그 날 낮과는 달리 오늘 새벽 그의 뒤에는 미국이 보내 준 보병사단 대병력과 대규모 화력이 든든하게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엄군의 광주시 재점령을 위한 이 날의 작전명은 상무충정작전이었다. 상무충정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특공부대로 편성된 제 3, 7, 11 공수특전여단과 공격 및 거점 장악 부대로 편성된 제 20 사단 (사단장 박준병 소장) 소속 3 개 보병연대, 외곽 포위 및 공격지원부대로 편성된 제 31 향토사단 및 보병, 포병,기갑학교 등 광주시내 주둔 3 개 군사교육기관 소속 기간병을 포함해 약 2 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특공부대가 기관총을 난사하며 도청과 전일빌딩 인근으로 난입하던 그 시간에 20 사단 소속 보병연대로 편성된 공격부대의 주력은 수 백 대의 차량에 분승한 채 전차와 APC 장갑차를 앞세우고 광주시내의 간선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GMC 트럭에 분승한 병력 중 앞 뒤의 경계병들은 M16A1 소총 총구를 보도 쪽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움직이는 모든 것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광주 시내로 진격을 시작한 이 대병력을 엄호하기 위해 광주시 상공에서는 제 101 항공대에서 차츨된 일곱 대의 AH-1J 공격용 헬리콥터가 지상으로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저공비행하고 있었다. 이 공격용 헬리콥터에는 분당 750 발을 발사할 수 있는 20 mm 구경 발칸포는 물론 2.75 인치 로켓포와 대전차 토우 미사일까지 장착하고 있었다.
그날 새벽 80 만 광주 시민은 깨어있었다. 살인면허를 받은 2 만 명의 중무장 병력이 이 도시를 에워싸고 섬멸작전을 개시하듯 이 도시로 진격해 들어왔다.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이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에게 제 20 보병 사단에 대한 작전통제권 이양을 처음 요청한 것은 1980 년 5 월 16 일이었다. 광주항쟁이 시작된 시각은 정확히 1980 년 5 월 18 일 오전 10 시였으니 신군부는 광주와는 관계없이 시위진압에 대규모 군병력 투입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이 보병사단을 서울에 투입할 계획이었다가 광주항쟁이 시작되자 주한미군사령부에 다시 전문을 보냈다. 사용목적변경에 관한 허가신청을 한 것이다. 5 월 22 일 주한미군사령부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승인을 거쳐 당시 한미연합사령관인 주한미군사령관의 작전통제를 받고 있었던 이 사단을 한국정부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 전문을 보내줬다.
5 월 27 일 오전 1 시에 개시된 도청 진공작전은 도박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신군부는 당시 정세분석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대규모 공격작전을 감행했다. 이 도박은 퇴로가 없었던 신군부에게는 밑져야 본전이었지만 사실 80 여 만 명의 광주시민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벌인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우려되는 이 작전을 미국은 흔쾌히 승인해 주었다.
미국의 이 허가전문 덕분에 광주 재점령과 이후의 12 년 군사독재가 가능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