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권토중래
아시아 월스트리트 저널(2006년 8월 4일)
‘(중국의 백두산 공정은) 통일 한국이 간도 반환을 주장할 경우에 대비해 국경을 확보해 두는 데 목적이 있다.’
필자는 만주의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관해 (사)북방권 교류 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북방 저널'과 여러 통로의 ‘간도 되찾기 운동’을 통하여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를 약술한다면, 중국은 공산당 주도로 학술 논문이란 미명하에 만주의 동북 3성에 관한 역사 논문들을 모집하였고, 이런 논문들의 형태로 마다정과 리성을 위시한 현 중국 역사학자들이 고구려와 발해(대진국)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일단락지었다. 그것은 현재의 영토(동북 3성)가 중국 땅으로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소수의 학자들을 제외한다면 동아시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세계인들에게도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계속적인 역사 조작에 들어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인들은 일본의 ‘난징 대학살’ 부인에 대해 일본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뉴스위크나 타임지에 강력한 비난의 글을 쓰고 있는데, 정작 자신들의 정부가 고구려와 발해사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데도 침묵하거나 오히려 학자로서의 양심을 팔아 정부의 역사 위조에 앞장서고 있으니 지식인의 양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 왜곡은 일제의 식민사관만큼이나 해로운 것으로 중국은 일본 이상으로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사실에 대해 새삼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중국이 북한 탈북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주: 예컨대 중국 당국의 가혹한 북한 탈북자 정책에 기인하여, 세 탈북자 모녀가 뿔뿔이 흩어져 중국인들과 강제 결혼을 당했는가 하면, 어떤 탈북 여성은 중국인으로부터 도망치다 잡혀 옷이 다 벗겨진 채 오토바이에 끌려가는 것이 목격되었고 이에 대한 눈물어린 증언이 2006년도에 미국에서 있었음) 아는 사람들은 중국은 아직도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필요에 따라 철저히 짓밟는 공산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필자:"연변의 조선족들의 정체성은 어떤가요? 신문 기사에서는 한국과 중국이 축 구 시합을 하면 4-50대 이상은 한국을 응원하고 30대는 어리둥절해하고 10대 와 20대는 중국을 응원한다고 하던데요."
연변대 교수:"예전 축구시합 때 식당에서 (우리가) 한국 응원하니까 옆에서(중국인 들로부터) 맥주병이 날아오고 그랬습니다. 재미있었지요. 그 날 머리 터지도록 싸우기도 했습니다."
2007년 11월에 필자가 한국학 포럼에서 만난 조선족 출신의 연변대 최 교수와 나눈 질의응답의 일부였다. 동북공정의 연속선상에서 중국이 다음 동계 올림픽을 백두산에서 열겠다는 저의와 그들 스스로 동이족이라고 시인한 배달국의 치우천왕을 이제는 자신들의 사당에 모신 이유는 한국의 경제적 번영(주: 최근 후진타오를 비롯한 요직의 공무원들이 '새마을 운동'을 학습하였고 3년간 3만 명, 장기적으로 35만 명의 공무원을 한국에 파견하여 학습시킬 계획)과 한류의 중국 대륙 석권, 곧 예상되는 한국의 북한 흡수 통일로 이루어질 정치군사 대국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북의 분열을 틈타 비합법적으로 차지하고 있던 한반도 크기에 버금가는 간도를 반환해야 된다는 위기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1909년 조선 정부와는 상관없이 일제는 청나라로부터 만주철도부설권 등 여러 이권을 얻는 조건으로 한민족에 의해서 개간되고 주권이 행사되었던 간도 지방을 청나라에 넘겨주었는데 국제법상 강제로 주권을 침탈한 나라가 맺는 조약은 아무런 효력을 발생하지 않으며, 더욱이 중국과 일본이 1952년 맺은 양국 간 협정에서 ‘1941년 12월 이전에 체결한 모든 조약, 협약 및 협정을 무효로 한다’고 명시하였으므로 국제법 관례상 간도 협정은 효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분명 다른 외교적 증거들도 충분하다. 예컨대 간도에 대한 미국 나스닥 소유의 ‘answers.com'의 의견은 이러하였다.
‘간도에 대한 주장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도 사용되는 다음 지도는 20세기 초 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도좌 대목구(주: 교구가 생기기 전 단계로 전통적으로 각국의 행정 구역과 일치) 지도이다. 이 시기에 한국은 세 개의 대목구 즉, 서울 대목구,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1911년에 세워진 대구 대목구, 교황 베네딕또 15세에 의해 1920년에 세워진 원산 대목구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원산 대목구는 한국 북부뿐만 아니라 간도를 포함한 만주의 동부 양쪽에 걸쳐 있었다. 이는 한국 북부가 만주라는 역가설의 증거가 되기보다 만주 동부가 한국이라는 증거가 된다.’
이제 간도를 되찾아야 되는 이유를 살펴보면, 첫 번째로 간도땅은 배달국과 단군조선, 고구려와 발해의 중심무대로서 수천 년 동안 한민족의 생활무대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를 모토로 배달국의 1대 환웅이 그곳 백두산 지역에 도읍을 정한 이래 단군 조선과 고구려의 오랜 삶의 터전이었으며(주: <삼국유사>와 <한단고기>를 위시한 사서들은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백두산 지역에 도읍을 정한 이는 1대 단군 왕검이 아닌 배달국-신시 시대-을 연 1대 환웅이었음을 보여주며 이러한 전통은 고구려에도 이어져 을지문덕 장군의 경우 신시의 전통에 따라 매년 10월 3일 삼신-삼위일체 하느님-께 예를 올렸음), 더욱이 조선과 청나라가 병립하던 시기에 무주공천이던 간도땅을 먼저 차지하고 개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은 바로 한민족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그곳에는 아직까지도 한국어와 한글을 쓰고, 같은 피를 나눈 이백만 조선족들(주: 동북 3성 거주 한인수)이 자치주를 이루며 혹은 흩어져서 조국과의 재결합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중국 당국 또한 '조선족자치주'라는 어중간한 형태로 본토와 분리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간도 회복은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순간 추진해야 될 또 하나의 역사적 과업으로 남게 된다.
통일 한국은 계속 고찰하겠지만 이미 경제적으로 G7 수준, 군사적으로 상임이사국 수준, 문화적으로 아시아의 중심 문화인 한류의 나라, 역사적으로 아시아의 패권 국가였던 단군 조선과 고구려의 법통을 잇는 국가로 변모되어있을 것이므로 중국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으며, 더욱이 영국이 백오십 년 동안 조차했던 홍콩을 외교 조약에 따라 중국에 반환시킨 것을 상기시키며 백년밖에 되지 않은 간도를 반환할 것을 당당히 요구해야 할 것이다. 이런 국제 외교의 조율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서 중일간 간도 조약의 무효성을 인정한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이 주는 이점을 십분 이용할 수도 있겠다.
요약하자면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순서에 따라 먼저는 개개인과 식민 사학계의 중화사상과 식민사관 청산, 두 번째는 중대사를 앞두고 있는 남한 내에서 지역을 초월한 일치, 세 번째는 남북한의 역사적 통일, 끝으로는 한민족의 유구한 삶의 터전이며 한민족이 개발한 간도와 그 땅의 조선족을 끌어안는 권토중래의 순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역사상 처음 있는 대국화의 길이 아니라 한민족이 천년 동안 잃어버렸던 단군 조선과 고구려의 주도권과 영광을 되찾는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 한국이여, 옛 땅 간도여, 한민족이여!
"너를 억누르던 자들의 후손이
허리를 구부리고 너에게 오리라.
너를 멸시하던 자들이 너의 발 아래 엎드리리라."(이사야)
*다양한 에피소드와 상세한 내용은 <바람에 휘날리는 태극기>로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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