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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종로구 재동에서 얻은 교훈
작성자 clipboard     게시물번호 6879 작성일 2013-12-21 20:47 조회수 4219

 

1988 년 10 월 어느 날 첨 알게 된 멋진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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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동네인 안국동에서 나고 자라 그 동네 이름이 붙은 초등학교를 다녔으면서도 재동 이라는 동네의 이름 유래를 몰랐었다. 어렸을 때는 그저 그 동네에 才童이 많아 재동인 줄 알았었다. 몇 해 전, 한국에 갔을 때 어느 모임에서 우연히 왜 재동의 이름이 재동이 되었는지 알게 됐다.

재동은 율곡로를 사이에 두고 운현궁을 남쪽으로 마주보는 골목길 일대를 말한다. 서쪽에는 안국동 북쪽에는 가회동 동쪽에는 원서동이 있다조선시대 임금이 주로 살던 창덕궁과도 지척이다.

벌써 감을 잡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수 백 년 동안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 끔찍한 일이 많이 일어났던, 매우 운수불길한 동네 이름들이다재동 이란 이름의 유래역시 피비린내나는 어떤 비극적인 사건에서 비롯됐다.

재동의 지명이 한자로 무슨 재를 쓰는지 생각이 안 나는데, 그것과 관계없이 재동의 재는 ash (불타고 남은 재) 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재동의 재가 왜 ash에서 비롯됐는지를 알려면 1453 10 10 일 발생한 계유정란의 전개과정부터 알아야 한다. 

조선시대 단종 때 왕위쟁탈전이 벌어졌다. 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왕위찬탈 사건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옛날 교과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고, 사극 드라마나 이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담은 관상같은 영화에서도 그런 식으로 묘사한다.

과연 이것이 전적으로 올바른 인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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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서 안 하는 짓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스타벅스 커피를 사 먹는 거고, 또 하나는 극장가서 영화보는거다

이번엔 두 가지 다 했다. 마침 한국에 나와 있던 누나와 함께.

아는 누나가 아니고 친누나..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아둔한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으면 국민이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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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여 년 전 사고방식과 권력욕을 가진 퇴물들이 되돌아와 민주주의 기본정신을 훼손하고 유린하는데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소양도 통제할 능력도 없는 사람이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으로 앉아있을 때 무슨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지 경고했던 말이다 

5 백 여 년 전 수양대군과 그 종파구성원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왕이 무력하면 백성들이 피를 본다

왕과 대통령, 조선시대의 백성과 근대국가의 국민은 전혀 다른 위상과 의미를 지니지만, 또 왕실 쿠데타세력과 권신들의 갈등관계를 오늘의 상황에 빗대는 것도 외람된 비유지만, 굳이 비교를 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조선시대는 절대군주제라 보기 어렵다. 왕과 사대부가 권력을 분점하고 서로를 견제하던 통치구조였다. 이 세력균형이 무너져 권력독점 또는 권력 불균형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피바람이 일어났다.

재미있는 것은 왕의 권력이 강화되었던 태종이나 연산군때는 사대부들이 주로 피를 본 데 반해 사대부 권력이 왕권을 압도할 때는 일반 백성들이 가혹한 피해를 당했다. 세도정치로 인한 부정부패로 나라 도처에서 광범위한 수탈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단종 때 역시 왕과 사대부간의 세력균형이 결정적으로 무너진 때였다. 모든 권력은 세종의 고명대신이었던 황보인과 김종서와 그 종파가 장악했다. 병권은 물론이고 왕의 고유권한인 인사권마저 전횡했다. 그들은 왕의 인사대상명단에 노란점 표시를 해 그 사람을 임명하도록 어린 왕을 협박했다.왕이 어리더라도 대비가 있으면 수렴첨정이라는 수단을 통해 왕실이 대신들의 월권을 견제할 수 있지만 그때는 수렴첨정을 할 대비조차 없었다.

대부분의 역사책에는 수양대군이 왕의 자리를 넘보았다고 적고 있지만, 그건 너무나도 단순한 소리같다. 우선 그를 비롯한 문종의 형제들, 즉 단종의 삼촌들은 왕의 자리를 넘보기는 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바쁜 상황이었던 게 분명하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안평대군은 황보인에게 아부했고,수양대군은 아예 고명사은사 (단종 즉위를 명황제로부터 승인받기 위해 파견된 특사)를 자청해 북경으로 기약없는 여행을 떠났다. 말이 고명사은사지 요샛말로 하자면 구속을 피해 미국으로 도망간 것이다.      

사실 계유정란은 무모한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좌의정 김종서와 병조판서 조극관의 지휘를 받는 수 천 명의 훈련된 경군이 물샐틈없는 경계망을 펼치고 있는 서울 한 복판에서 껄렁패나 다름없는 백 여 명에 불과한 무사들로 쿠데타를 성공시켰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가 거의 단신으로 적 진영의 우두머리인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서 (이건 정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부터 격살하여 적의 지휘계통을 일시에 붕괴시켜 버렸기 때문에 그 말도 안되는 기적이 성사되었을 것이다 

그는 왕의 자리가 탐나서였다기보다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배수진의 선택을 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 다시 재동으로 돌아가서,,,,,,

재로 온 동네를 덮어야 할만큼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재동에서는 그 날 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내려오는 이야기는 그 날 밤 가장 먼저 온 가족과 가노들이 떼죽음을 당했던 김종서의 집이 재동이었다고 하지만, 김종서의 집은 재동이 아니라 서대문구 충정로다. 충정로에 있는 농업박물관에 김종서의 집터 표지석이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그 날 밤 단종이 누나인 경혜공주의 집에 있었는데 쿠데타 세력이 위조한 가짜명패 (명패= 임금의 소집영장 -입소영장이 아니고-)를 받은 신하들이 경혜공주의 사저로 모였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경혜공주의 사저는 지금 헌법재판소 (구 창덕여고 자리) 부근이었다.

아마도 두 번 째 이야기가 맞을 것이다. 어쨌든 그 날 밤 경혜공주 사저 안 마당에서 칼과 창으로 난도질을 당한 채 죽어나간 사람들이 흘린 피가 마당 가득 연못을 이루었는데,진동하는 피비린내를 지우기 위해 엄청난 양의 재를 가져다 그 위에 덮었다고 해서 그 동네 이름이 회동이 되었다가 나중에 재동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재동 살육작전을 지휘한 총책임자는 살생부의 저자 한명회였다 

열 두 살 소년이 왕위에서 쫓겨나 죽음을 당한 것만 불쌍하고 안타까워하기보단 조선시대 왕권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제도적으로 돌봐 줄 사람(대비) 조차없는 판단능력이 부재한 어린 아이가 왕위에 있을 때 권력균형이 어떻게 무너져 그 피해가 일반 백성들에게 어떤 형태로 돌아갈 수 있는지, 결과적으로 어떤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 보면 계유정란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의 다른 면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갑자기

조선의 단종과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 1 위원장,

이 세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떠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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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비린내의 진원지

해만 지면 들려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원귀들의 울음소리 때문에

창덕여고 학생들이 "무서워서 못 살겠으니 우리 이사가요"

하는 바람에 학교가 어디론가 이사를 갔다는 소문이......

(믿거나 말거나)

 

헌재 재판관들은 귀들이 어두워서 그런지 아직 그런 불평이 없다.

내내 졸기만하다 해지기 전에 일찍 퇴근해서 그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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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3-12-21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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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피바람은 지도자가 무능해서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민의 지지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지도자는 본인이 나서서 피바람을 일으킵니다. 이승만이 그랬고, 박정희가 그랬고, 전두환이 그랬고, 노태우는 그래도 덜 했습니다. 김영삼은 덜덜했고, 김대중과 노무현은 아주 덜했습니다. 이명박은 깜죽거리다가 그래도 사대강, 종편등 수익모델을 그래도 창출했고요. 박근혜는 채총장, 윤검사 안찍어 냈으면 정권이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끝나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부정선거에 기반한 정권이라 정통성이 흔들거리니까요.

clipboard  |  2013-12-21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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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의 문제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완고한 정치집단의 문제인데, 박이 그들의 절대적인 사상적 영향하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일사볼란한 통제시스템과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를 절대적으로 선호하는 박의 성향상 자기가 시기를 판단하여 그들을 견제하거나 주변세력을 교체할 의지나 능력은 없어보이니까 이게 비극이지요.

언젠가 사관 김일손의 후손이라고 하신 것 같은데, 계유정란에 대한 본문의 시각은 그 분과 많이 다를지도 모릅니다 ^^

토마  |  2013-12-21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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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권은 결국 민주노총을 처들어 갔네요. 이건 해법도 여럿 있었을것 같은 문제인데요. 이제까지 망쳐논 문제들을 다 어떻게 해결하려고 저 모양이죠? 정말 끌려내려오고 싶어 환장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3-12-21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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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그런 것 저는 전혀 관심없고요. 클립보드님이 언급하셔서 농담삼아 언급한 것입니다.

저의 경험상, 맹해 보이는 사람이 알고 보니 실속 다차리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들) 정말 무섭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었습니다. 저는 김정은이나 박근혜나 사리 판단을 할 수 없는 나이는 이미 훨훨 지났다고 보구요. 이것은 단순 무능력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구요. 그들은 권력본능으로 어떻게 붙어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옆에 그렇게 그런 인간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선호도가 바로 그런 인간군상들의 반영체라는 것이죠. 저는 경상도 악센트가 당연히 있지만 긴장하면 진짜 갱상도 악센트가 나옵니다. 힘의 궁지에 몰릴 때, 김정은이나 박근혜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권력생존본능에 이들은 뛰어난 사람들이고, 우리는 그 결과에 신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체주의적 사고로 훈련받은 사람은 안변합니다.

이것은 \"몸\"으로 체득된 바의 반응이고, 또 그들이 생존하는 것은 클립보드님도 지적하셨지만 social habitus의 소이연입니다. 사담 후세인은 결코 예외적 인물이 아니라 권력은 죽음에의 유혹이죠. 문자 써서 좀 그런데, 죠르쥬 바따이유가 죽음과 에로스의 상관성을 이야기했지만, 저는 권력과 죽음은 에로스보다 더 강력히 끌리는 것이죠. 즉 갈데까지 가는 겁니다. 박정희도 그랬습니다. 토마님의 위의 언급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합니다. 합장

clipboard  |  2013-12-21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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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홍경식 이 두 넘,, 기어이 선을 넘어가는군요.
박근혜 퇴진이 아니라 전면적인 박정권 타도투쟁에 돌입한다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philby  |  2013-12-22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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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생각나는대로 두서없이 씁니다. 김종서의 집은 서대문(돈의문) 밖에 있었지요. 조선초기 헐었다 지었다를 반복하다 세종(?)때 새로 지으며 새문이란 별명을 얻은게 서대문입니다. 그 나머지 황보인을 비롯해 살생부에 있던 대신들 재부분은 재동에 살았구요.

기록에 의하면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간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자청해서 피난간 것 아닙니다. 원래 안평대군이 가려고 했는데 안평이 가면 명나라와 무슨 묵계를 맺을까 수양쪽에서 절대 반대해서 수양이 간겁니다. 수양은 명나라 관리들과 친분을 맺으며 쿠테타 일어 났을 때 승인 받는 물밑 작업을 했지요. 한확의 역할이 컸습니다. 누이들이 둘다 황제의 후궁이었으니까.

그리고 수양대군이 김종서 척살할 때 필마단기로 간것이 아니라 무사들은 서대문 일대에 쫙 깔아 놓았지요. 김종서는 여진족과 전투에세 혁혁한 공을 세운 역전의 용장으로 쿠테타에 소문을 듣고 병력을 집 근처에 집결 시켜두었습니다. 역사 해석은 각자 다를 수 있고 상상은 자유지만 어느 정도 객관적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philby  |  2013-12-22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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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을 보면 세종도 수양대군의 욕심을 알고 견제를 한 기록이 나옵니다. 물론 조선시대가 절대왕정은 아니고 사대부와 권력을 분점했는데 그것은 정도전 작품이지요. 실제 권력은 사대부가 갖고 왕은 권력 교통정리 하는 정도.
태종이 왕자의 난을 두번이나 일으키면서 정도전을 제거한것이 사대부가 갖는 권력을 빼앗기 위한 수단이었지요. 그러나 아무리 사대부와 권력을 분점한다 해도 왕이 갖고 있는 재량권이 무한대라서 사대부와 권력 균형은 충분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경국대전을 비롯한 법전이 많이 있어도 법 적용에는 왕의 재량권이 절대적이었으니까요.

수양대군이 왕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문종 때부터, 문종이 몸이 약해 오래 못 살 것을 알았거든요. 그리고 쿠테타는 병력이 많고 적은 것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성패를 가름하는데 큰 요인은 안됩니다. 5.16이나 12.12 병력이 적어 막지 못했나요? 병력수는 방어하는쪽이 훨씬 많았지요.

philby  |  2013-12-22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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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민(民)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왕권과 신권이 발란스를 이뤘을 때 비교적 살기가 좋았는데 왕권이 강하냐, 신권이 강하냐는 지배계층의 관심사지 백성들은 등 따습고 배부르면 왕권이 강하던 신권이 강하던 관심 없지요.
조선말 세도정치가 나라 말아먹은 것은 이미 기강이 문란했기 때문인데 상상도 못할 부정부패... 국가라는 하드웨어가 운용하는 소프트웨어가 몽땅 망가진 상태입니다. 세도정치 아니라 왕권이 강화 되었어도 그렇게 기강이 무너진 상태에서는 망할 수 밖에 없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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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계유정란을 자세히 다루기 위해 작성한 글은 아니지만 언급하시니 좀 더 이야기를 할까요.

수양이 명에 간 이유는 복합적입니다. 여러가지 이유들 중 무엇을 부각시키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밖에 없죠. 단종 즉위 직후부터 수양이 명으로 떠나게 된 시기까지의 정국부터 살펴보면 그 복합적인 이유들간의 관계가 해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정국구도는 고명대신과 안평대군의 정치적 결합입니다. 흔히 고명대신들이 안평을 왕위에 욕심이 적은 덜 위험한 인물로 평가했기 때문에 그를 선택했다고 하는데, 그보다는 김종서와 안평간의 개인적 친분이 두 세력간 결합에 더 원초적인 요인을 제공했습니다. 세종시절 안평은 김종서와 함께 육진을 개척하고 국경부근에서 여진족을 함께 토벌하는 등 일찍부터 개인적 친분을 맺은 사이였습니다.

사실 수양이 고명대신들의 견제대상이 되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왕족을 대표하는 최고 연장자 (양녕대군을 제외하면) 로서 단종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런 상황에서 만일 왕족이 단결하면 고명대신들의 영향력이 급격히 감소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로서는 이런 이유로 수양을 제거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세종의 여덟 형제들부터 서로 갈라놓는 공작을 편 것 입니다.

수양의 명나라 여행이 향후 쿠데타 성공에 결과적인 도움을 준 부분은 두 가지인데 말씀하신 명 관리들과의 찬분을 돈독히 한 것이었고 둘째는 고명사은사 서장관으로 수양을 따라 간 신숙주와의 친교를 통해 집현전 학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첫째보다는 둘째 부분이 계유정란 이후 집권까지 가는 과정에서 수양대군에세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봅니다. 신죽주를 가리켜 변절자네 뭐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수양의 사람이었고 내색을 안 했을 뿐 그가 보좌에 오르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그를 따르는 집현전 학사들에게 내색을 안 했던 이유는 어쨌든 조선이 왕도정치를 펴는 나라로서 엄연히 국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를 표현하면 그대로 사대부로서의 명분을 잃어버리는 일 (쉽게 말해 역모가 되는 일)이 되기 때문인데, 이는 신숙주 뿐 아니라 누구나 마찬가지였지요. 그 껄렁껄렁한 한명회 조차도 계유정란후 말단 관리 임명을 거쳐 나중에 동부승지인지 뭔지를 하면서 끝까지 단종에게 전하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 하며 형식적으로나마 받들어모신 것만봐도 왕도정치에 대한 당시 사대부들의 명문중시가 얼마나 컸던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수양이 자청해서 명으로 떠난 이유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죽음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고 봅니다. 권람 등 그의 참모들은 반대했지요. 당장 오늘 내일이 어떻게 변할 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장장 6 개월이나 되는 장도에 오르는 건데 무엇을 기약하고 무엇을 계획적으로 도모할 수 있었겠습니까? 남은 가족들이 불안하니까 황보인의 아들과 김종서의 아들, 게다가 고명대신파의 중간보스인 이조판서 민신까지 부사 부서장관 등으로 임명하여 인질처럼 데리고 갔던 거지요. 장남 도원군을 환확의 딸과 결혼시킨 이유도 나중을 도모해서라기보단 당장의 목숨부지를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환확은 자신의 두 남매가 명황제의 측실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명의 관리 (광록시소경) 이었기 때문에 혹시나 수양 자기는 죽음을 당하더라도 자기 아들 하나는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을 것 입니다. 아무리 역모사건이라해도 명 관리의 사위를 함부로 죽일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간당간당한 희망을 부여잡은 거지요.

계유정란 당일 밤, 서대문 김종서의 집에 가면서 무사들을 주변에 깔기는 했지만 당시 김종서가 지방군까지 끌어모아 자기 집과 도성 안팍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전히 단기필마나 다름 없는 무모한 짓이었습니다. 실제 자기 자신은 가노 \'임어을운\'만 동행했고 김종서의 집 주위에 쌀린 무사라고 해봐야 양정 유숙 등 하급무관들이 지휘하는 수 십 명에 지나지 않았으니 단기필마나 다름없다 할 밖에요. 어차피 승산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직접 적 수뇌를 기습타격하는 전법을 쓴 것 입니다.

주목할만한 것은 명분에 목숨을 거는 집현전 학사들이 계유정란에 동조했다는 것 입니다. 그들 중 일부가 나중에 단종 축츨에 반대해 사육신 사건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들이 수양대군을 동정하고 김종서 제거에 동조한 걸 보면 그 당시의 정치구도를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완벽한 악과 완벽한 선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도 아침에 생각나는대로 써 보았습니다.

philby  |  2013-12-22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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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에는, 그 실록을 쓴 사람들은 세조쪽 사람들이지만 사은사로 가는 이유중 하나로 정권에 관심이 없다는 걸 보여주자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내부에서도 일부가 사은사 가는 걸 반대도 했지만 사은사로 가는 것이 장래로 보아 낫다는 결론이 있었겠지요.

그리고 신권이나 왕권이나 지향하는 바는 국리민복인데 사대부들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공자 맹자가 귀에 딱지가 앉을만큼 많이 이야기했지요. 백성이 중심이 되어야한다. 왕권이나 신권이나 국리민복보다 개인의 영달이나 사사롭게 권력을 쓰는게 문제인데 김종서 황보인등 고명대신들의 권위는 세종-문종을 통해 나온 것이니 나름 명분이 있었지요.

황표정사를 비롯해서 고명대신들이 정권을 농단했다는 것은 계유정난 일으킨 쪽에서 만들어낸 명분이지요. 세종-문종을 이어지면서 다져진 기틀로 설령 단종이 무능했다 해도 조선은 당분간 별 탈 없이 굴러 갔을겁니다. 그것은 성종때까지 조선이 비교적 안정된 바탕에서 굴러 온 것으로 추론할수 있습니다.

물론 단종이 무능했다는 증거도 없고 고명대신들이 사사롭게 부정부패에 권력을 남용했다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 좀 더 생각해 볼 것은 세종은 요주의 인물 1호 수양대군, 2호 안평대군을 지목한 것이지요. 수양대군이 실패 했다 해도 안평대군이 어떻게 나왔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이래 저래 단종은 삼촌들 때문에 어려웠을 겁니다. 왕이 될 팔자가 아니었을지도...

불문율 중에 하나가 왕이 18세 되면 섭정이나 수렴첨정을 거두는데 왕이 조숙하면 좀더 빨리 친정을 하지만 수안평대군이 주공처럼 조카가 성인될 때까지 성실하게 보필만 했을지... 모를 일이지요.

하여튼 왕권이 룰과 법칙에 의해 전수된 것이 아니라 폭력적 방법에 의해 이루워진 것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리고 세조는 죽기전에 공신세력을 정리했어야 하는데, 태종처럼 말입니다. 그걸 못해서 공신세력이 비대해질대로 비대해서 연산군때 그 난리를 친 걸 봐도 계유정난은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봅니다.

계유정난은 상당히 재미난 부분인데 앞으로 두고 두고 생각해 봐야할 부분입니다.

clipboard  |  2013-12-2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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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사학자인 이덕일 씨도 그의 책들을 보면 계유정란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이고 세조반정 자체가 공신세력이라고하는 어머어마한 특권계급을 만들어 일반 백성들의 삶을 더 도탄에 빠뜨렸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자료에서 나온 통계인지는 모르지만 세조반정으로 약 1 만 여명의 특권계급이 새로 탄생했다고 하네요.

세조는 재임기간이 14 년 정도 였는데, 말년에 공신세력을 견제하려는 시도를 하긴 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장자인 도원군 (의경세자)가 살아서 왕위를 계승했다면 그런 시도를 안 했을지도 모르는데, 문제는 그가 일찍 죽는 바람에 나이가 어린 해양대군이 세자자리에 오르지요. 이 사람이 왕이 되고나서 1 년만에 비명횡사한 예종입니다.

의경세자의 맏아들 월산군과 불과 네 살 밖에 차이가 안나는 데 그 어머니인 한정 (의경세자의 부인인 수빈-한확의 막내딸) 과 한명회의 동지적 관계를 간파한 세조가 새 세자에게 위협이 되는 수빈과 한명회를 제거하려고 노력을 하긴 합니다. 실패하고 자기가 먼저 죽어버리는 바람에 다시 공신세상이 되는 거지요. (물론 공신세력은 예종을 제거하는데 성공한다해도 반대파의 사위인 월산군을 왕으로 모실 의도는 추호도 없었고 자기들 패거리 보스인 한명회의 사위 자을산군을 왕으로 올릴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계획은 끝까지 시치미를 뚝 떼고 침묵합니다. 결국 이 자을산군이 조선 제 9 대 임금인 성종이 됩니다) 이후 왕권이 공신에게 반격하는 사건은 딱 한 번 있었는데 그게 바로 연산군 때 두 번 째 사화인 갑자사화입니다.

연산군이 정치적으로 현명한 인물이었다면 공신의 대립세력인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들면서 공신세력의 기를 꺽어버릴 수 있었는데 바보천치같이 둘 다 적으로 돌리고 독불장군 절대왕권을 휘두르려고하는 바람에 사대부 전체의 공적이 되어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 겁니다. 사실 무오사화 전 까지는 공신과 사림이 명분적 대립관계였지만 무오사화 이후에는 명분이고 뭐고 서로 철천지 원수로 돌변했기 때문에 이 역학관계를 얼마든지 활용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왜 바보가 그 격에 맞지 않게 높은 자리에 앉으면 안 되는지를 또 보여 준 시대가 바로 연산군 시대입니다.

philby  |  2013-12-22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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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수를 일일이 세어 본 것은 아니지만 엄청나게 많습니다. 게다가 실제로 정변에 참가도 하지 않은 사돈의 팔촌까지 공신록에 올리니 공신청에서도 웬 듣보잡이 이리 많냐고 투덜거릴 법도 하지요.

그리고 결과론이지만 계유정난의 한가지 악영향이 공신들에게 땅을 나눠주다 보니 땅이 모자라 토지개혁을 했다는 겁니다. 토지 집중현상이 생긴 것도 그때부터이고 한가지 재미난 사실은 김종서쪽이나 사육신쪽 남자들은 다 죽었는데 부인들은 공신들에게 가서 잘 지냈다는거지요. 물론 종이나 노비 신분으로 간것이지만.

그래서 연산군 때 사화를 경제적 측면에서 해석한 것들도 있더군요. 공신들의 토지 재산 독과점에 대한 불만.

세조뿐 아니라 조선 왕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신권 견제를 늘 염두에 두고 왕 노릇했는데 세조의 노력은 너무 미온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작해야 젊은 남이, 이준 정도를 발탁한건데 이들을 중심으로한 적개공신들(이시애난 평정한) 정도로는 계유정난 공신들과 게임이 안되는 겁니다. 노회한 정치9단들 술수를 이들이 이길 수가 없지요.

이번 휴가에는 작년에 읽다 만 로베르 피에르 평전을 마져 읽고 예수 이전의 기독교를 읽어 볼 생각인데 잘 될지 몰라요...

참... 연산군이 어디서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는지 요즘에 자료를 줏어 모으고 있는데 연산군도 연구대상입니다.

clipboard  |  2013-12-22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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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무슨 작심을 했는지 재위 10 년 경부터 \'공신초록\'이란 것을 내리면서 공신의 경중을 가리고 오래된 공신의 노비와 토지를 도로 회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공신들의 물적기반을 약화시키겠다는 의도였겠지요. 연산군이 이런 결심을 한데는 자기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의 세자자리마저 위협했던 할머니 인수대비와 공신그룹이 대한 견제의 필요성을 느꼈던데다, 그런 원수같은 공신그룹의 공작과 부추킴에 의해 자신의 의자와는 별로 상관도 없이 사람들을 죽인 무오사화를 생각하고 열불이 나기도 했겠지요.

\'기묘록\'에는 연산군이 모후사사 사건을 몰랐다가 나중에 임사홍과 외조모 신씨부인을 통해 그 사실을 알고 복수극에 나선것이 갑자사화라고 써 있고 마치 이것이 사실인 것처럼 잘못 알려져 왔지만, 이것은 갑자사화의 명분을 지극히 사적인 복수극으로 격하시켜 반정의 명분을 더욱 공고히 하려고 날조한 문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갑자사화의 본질적 동기는 연산군 나름의 공신견제책으로 구상된 걸로 보는 게 맞겠죠.

어쨌든,,, 그 때 만일 연산군이 공신들에게 압수한 재산을 사림들에게 조금씩 나누어주고 그들을 기용하고 우대하는 척이라도 했다면 중종반정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예로부터 권력은 혼자 먹을 수 있는 거지만 돈은 나눠먹어야 말썽이 없는건데, 권력도 혼자먹고 돈도 혼자 먹으려다 날벼락을 맞은 것이니 연산군으로서는 변명의 여지도, 어디 하소연할데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philby  |  2013-12-23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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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에 대한 반정군의 악의적 평가, 연산군 일기가 반정군에 의해 기록된것이지만 연산군이 초기에는 제법 똘똘하게 제 정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초기 기록은 긍정적 부분도 많은데 특히 국방을 튼튼히 한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여진족 관계, 왜구문제 해결 문제 등등.

그리고 즉위 초에 외할머니에게 여러가지 물건을 내린 걸로 봐서 외할머니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어머니에 대해 몰랐을 리가 없지요. 근데 연산군이 이성보다는 감성이 발달한 사람이니 앞 뒤 생각해 가면서 일을 벌리기보다 감정에 치우쳐 일을 벌렸을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공신파+사림파를 몽땅 제거하고 말 잘듣는 궁중파(임사홍, 신수근 등등)와 정권 유지하겠다는 생각도 궁중파가 무슨 정치적 기반이 이나 지지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 판단이 잘못 된 것이지요.

연산군이 호해(진시황 아들로 2세황제)가 한 말 "천하가 내것이니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게 무슨 잘못이냐?"고 했다는 것도 반정군의 악의적 끼워놓기일 가능성이 있구요. 하여튼 성종 때 부터 삐그덕 거리던 징조가 보이던 조선이 연산군부터 서서히 망가지지 시작한 것... 그게 역사의 흐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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