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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가면 한국사람 조심하세요!!!
작성자 운영팀.     게시물번호 7200 작성일 2014-04-03 18:27 조회수 3170
최근 한겨레 신문에 실린 칼럼인데 재미있어 옮겨봅니다. 

2012년 미국 코네티컷 초등학교에서 총기 난사살인사건이 발생해서 아이 20명, 어른 7명이 사망했죠. 당시 교사 한명이 아이들을 보호하고 자신은 희생했던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당시 관련 기사의 댓글에, 미국의 한인학생들이 한국의 교사같았으면 자기만 살려고 도망갔을 꺼라는 식의 한인비하글이 많이 달렸었다고 합니다. 
이에 글쓴이는, 한인들은 왜 스스로를 낮추고 비하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나름대로 원인을 분석해본 글인데
캐나다에 사는 우리 이민자들도 한번쯤 읽어볼만한 내용이라 판단되어 옮겨봅니다. 

아참 그리고 지난 2009년에 신문에 발표했던 글인데 '이민가서 한국사람 조심하라는 말'에 대한 CN드림 발행인의 견해가 실려 있습니다. 심심할때 보세요. 



미국 총기난사 사건에 왜 한국 교사 욕하는 악플이?
우리는 글러먹었어, 그 복잡한 마음속으로
2012년 12월14일, 미국 코네티컷의 한 초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해서 아이 스무 명과 어른 일곱 명이 사망했습니다. 이틀 뒤인 12월16일, 주요 신문의 인터넷판에는 그날 여교사 세 명이 총격으로부터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희생했다는 기사와 함께 그들의 사진이 실렸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지만,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기사에 달린 댓글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에 관한 한 가지 이야기를 풀어가려 합니다.
그 기사에는 당연히, 미국의 총기 소지에 관한 우려와 비판, 세 명의 여교사에 대한 칭송과 추모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주렁주렁 달리는 특정 내용의 악성 댓글이 이 기사에도 어김없이 달렸습니다. 다름 아닌, 우리나라, 그리고 우리나라의 교사들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댓글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나라의 (여)교사들은 자기만 살겠다고 학생들을 내팽개치고 도망갈 것이라는 내용이 가장 많았고, 비속어를 써가며 교사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댓글도 많았습니다. 이런 댓글을 예상하셨다면, 혹은 이런 장면이 익숙하게 느껴지신다면 제가 하려는 이야기에 관심이 있으실 겁니다. 
미국의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인터넷 보도기사에 난데없이 
우리나라 교사들 욕하는 악플 
왜 스스로 비하하고 조롱할까요? 

정신분석으로 해석해보려 합니다 
세상이 잘 바뀌지 않는 이유는 
집단 무관심과 이기심 탓일까요? 
인간은 늘 이성적인 존재일까요? 
아, 훨씬 복잡하고 끈적끈적하고 
괴상한 그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 대학생을 바라보는 어떤 고정관념
이 글을 통해 저는 대한민국에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우리의 자기비하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우리와 상관도 없는 남의 나라 이야기에도 득달같이 달려들어 우리 스스로를 욕하고 조롱하는 마음은 무엇인지, 무슨 일만 생기면 ‘한국인이라서’를 들먹이는 현상은 무엇이지, 외국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는 국산 제품들에 대해서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퍼붓는 심리는 어떤 것인지, 따지고 보면 다른 나라보다 잘할 이유도 없는데 축구 경기에서 질 때마다 나라가 썩어서 그렇다는 식의 논리가 터져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국을, 한국인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부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한 가지 시각으로 이런 현상이 깔끔하게 정리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의 시각을 통해서 이런 현상의 원인과 의미를 해석해보려 합니다.
결론부터 요약해서 말하자면 저는 이 현상을 첫째, 자기애(나르시시즘)와 관련된 현상이라 생각하고 둘째, 도착(perversion)의 한 형태인 가학-피학(sadomasochism)이라고 생각하고 셋째,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희생양 삼아서 마음속의 불만을 바깥세상에 투사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무척 어렵고 복잡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나하나 풀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 현상에 대한 저의 관심은 처음으로 미국 생활을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내 나라에서 살 때는 안 보이던 것이 남의 나라에 살아보니 보이더군요. 제가 미국에 간 것은 1999년 여름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의 삶에 워낙 깊숙이 스며든 미국 문화에 젖어 살았고, 의대 교육 또한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미국에 대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미의 시대인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해서만큼은 꽤나 비판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배울 것은 배우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제 생각보다 훨씬 미묘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에 비판적이었다고 생각했던 제 마음속에 사대주의라 불러 마땅한 무언가가 깊게 뿌리박혀 있었다는 것을 그 나라에 살아보고 나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사대주의는 정치나 이념 같은 거창한 영역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질구레한 일상에서 소리 없이 태어나서 눈치챌 수 없도록 은밀하게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사대주의였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제가 어렸을 때는 마치 검증된 사실처럼 이런 얘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까지 뼈 빠지게 공부하다가 대학에 가면 살판났다고 놀아버린다. 그러니 학문이 발전할 리가 없다. 미국 학생들을 봐라. 고등학교 때까지 ‘인격 함양을 위한 전인교육’을 받다가 대학부터 우수한 체력과 인격을 바탕으로 밤을 새워 공부한다. 그것이 노벨상의 비결이고, 모든 분야에서 대가(大家)를 배출하는 이유다.
돌이켜보면, 선풍기 켜놓고 자면 죽는다는 이야기 수준인 그 ‘국민 상식’을 스르륵, 저도 믿었습니다. 역사나 정치 같은 공적 영역에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직접 본 적도 없으면서 미국인들은 대학부터는 공부를 무척 열심히 한다는 이야기를 의심 없이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미국 땅을 밟았을 때 약간은 주눅 든 느낌으로 그들과 저를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의사여서 비교 대상도 의사였습니다. 대학부터는 그들이 더 열심히 했을 것이다. 전공의 수련 과정도 우리보다 훨씬 잘 되어 있을 테니 당연히 나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큰 착각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저는 두 종류의 교육에 참석했습니다. 하나는 대학병원에서 열리는 소아정신과 세미나, 다른 하나는 정신분석 연구소의 수련 과정이었습니다. 소아정신과 세미나의 첫날, 미국에 대한 저의 환상은 단박에 깨졌습니다. 그 세미나에는 갓 전문의가 된 연구 강사 몇 명이 참여했습니다. 저도 전문의가 된 뒤 군복무를 마치고 바로 공부하러 갔으니 서로 비슷한 처지였습니다. ‘대학부터는’의 공식에 따라 그들의 해박한 지식을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아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어떻게 전문의 시험에 붙었는지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뭐지, 이건?”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같은 곳 향하는 ‘한국인 타령’과 마음의 법칙
반면에 그 세미나를 이끌던 교수의 박식함은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이 사람이 말로만 듣던 대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시작된 정신분석 연구소의 수련에서 그 정도 지식을 갖춘 분석가들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어렵게만 보이던 정신분석 이야기를 자기 목소리로 풀어서 들려주었습니다. 황홀한 경험이었습니다.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을 자신의 언어로 소화해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들과 우리의 수준 차이는 극명했습니다.
거기서부터 질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저 사람들과 연구 강사들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저런 사람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리는 없으니 지금은 신통치 않아 보이는 연구 강사들 중에서도 언젠가는 저런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한 가지 확실한 건, 대학부터 열심히 해서는 아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화려한 변태(變態)가 일어나는 것인가?”
답을 얻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수련 과정에서 몇 가지 명백한 이유가 바로 드러났습니다. 우선 읽어야 할 책이 모두 영어였습니다. 같이 수련을 시작한 미국의 동료들은 나보다 두 배, 세 배 빨리 읽었습니다. 게다가 언어라는 것이 묘한 것이어서, 모국어가 아니면 읽을 때는 이해가 돼도 읽고 나서는 머리에 남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줄거리는 생각나도 구체적인 표현들이 기억나지 않으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같은 시간을 공부한다면 그들은 나보다 훨씬 많이 읽고 많이 기억할 것이었습니다. 경쟁이 될 리가 없었습니다.
만일 그게 이유의 전부라면 머지않아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석학들이 배출될 거라고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요즘은 영어에 능통한 유학생들이 많으니까요.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대가를 배출하고 우리는 그러지 못하는 데는 결정적인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대가들이 우리나라가 아닌 그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지만 당분간 우리가 그들을 넘어서기 힘든 가장 확실한 이유입니다. 그들은 언제든 자기들끼리 모여서 토론할 수 있고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에게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배우고 저희들끼리 떠들고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오면 더 배울 곳이 없습니다. 정신분석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비슷할 겁니다. 공부 모임을 만들 수는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끌어줄 사람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없는, 그들이 가진 가장 큰 자산이고 우리가 대가를 배출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고 나자 우리가 그동안 근거 없이 자기비하를 해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적인 학자가 탄생하기 어려운 이유가 분명한데도 우리는 그 이유를 외면하고 한사코 우리는 대학 때부터 놀아버려서, 더 심하게는 민족성이 글러먹어서라는 식의, 검증되지도 않은 주장을 고집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보니 학문의 발전에 관한 것은 일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뭔가 잘 안될 때마다 ‘한국인이라서’라는 주장은 약방의 감초처럼 꼭 끼어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10년이 지나 다시 밟은 미국 땅에서, 최소한 우리나라의 인지도만큼은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아졌다는 것을 체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기비하는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만 있으면 습관처럼 ‘한국인 타령’을 시작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슨 일이든 자신에게 유리한 쪽, 편한 쪽으로 해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한 왜곡도 불사합니다. 그것이 마음의 법칙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인 타령’은 불가사의한 현상입니다. 마음이 편해지기는커녕 수치와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그 인기는 여전합니다. 남의 나라 사정을 알기 어려웠을 때는 모르다 보니 ‘한국인이라서’라는 손쉬운 가설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세계 구석구석을 손쉽게 상세하게 알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논리는 통하지 않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국인 타령’은 만병통치약입니다. 게다가 그런 종류의 인터넷 댓글에서는 뭔가 뒤틀린 즐거움마저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한국인 타령’은 마음의 법칙을 거스르는 예외일까요? 아니면 마음의 법칙마저도 ‘한국인’만큼은 미화할 수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견 서로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마음의 법칙과 ‘한국인 타령’은 실은 같은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기비하는 겉보기에는 수치와 고통을 동반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지만, 그 밑에는 분명히 그것이 가져오는 이득이 있습니다. 수치와 고통을 감내할 만큼의 이득, 그것이 ‘한국인 타령’이 여전히 인기 있는 이유입니다. 그 이득이 무엇인지 앞으로의 글을 통해 하나씩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외치자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이 바뀌려면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것은 집단적인 무관심과 이기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에는 한 가지 그릇된 전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사고와 실천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데 무관심과 이기심이 그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이 그런 주장의 요지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그렇게 이성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괴상하고 끈적끈적한 것입니다. 이성의 시각에서 볼 때 무관심이나 이기심 등의 이름이 붙게 되는 현상은, 실은 그런 단어로 간단히 설명될 수 없는,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현상입니다.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처음 내 나라를 떠나 살아 본 이후, ‘한국인 타령’의 심리적, 사회문화적 역할과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우리는 자기비하를 일삼는 글러먹은 한국인이라고 또 한 번 자기비하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최고라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자는 것도 아닙니다. ‘한국인 타령’이라는 하나의 예를 렌즈로 삼아서 우리의 마음속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는 것입니다. 잘 들여다보면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 몇 가지 이유도 보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우리의 마음에 대한 글이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세상에 대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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