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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몰랐던 것들
작성자 MtL    지역 Calgary 게시물번호 762 작성일 2008-10-21 12:07 조회수 1695
"내 키보다 작아져 버린 당신을 보면서." 1999년 여름. "여보! 밥 다 타잖아요. 아까 말한 거 잊었어요? 샤워하고 올 테니깐 밥 좀 보라고 했잖아요." "아 그랬었나? 내가 잠깐 깜빡했네. 미안해. 에이구 이거 어떡하나. 밥 아까워서…."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완전 새까맣게 탔네….  참 이렇게 정신이 없어서야…." "..." 건망증. 그 너무도 가볍고 우스운 단어는 그렇게 우리 가족을 조금씩 삼켜가고 있었다. 그 당시 내 나이 열 둘. 언제부터 였을까. 한없이 완벽하기만 했었던, 나의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바보가 되어갔다. 그래 바보. 어쩌면 내 아버지에게 쓰기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 단어. 하지만, 그것은 나의 아버지를 정의하는 유일한 단어였다. 내 기억 속의 엄격한 완벽주의자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남은 것이라곤 하루하루를 가족들 눈치 보며 살아가는 나약한 바보였다. 가장이라는 말이 무색한, 무엇하나 맘 놓고 맡길 수 없는 골칫덩어리.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개를 돌보라고 하면, 하루 종일 개를 굶겨놓기 십상이었고, 열쇠는 항상 차안에 두고 내렸으며, 거의 매일을 켜진 TV와 함께 잠을 이루셨다. "아싸 또 이겼다! 아빠 빨리 천원 주세요." "아니. 이게 왜 이렇게 되지? 허 참... 한 수만 무르자." "안되요. 내가 이겼잖아요. 빨리 천원 주세요. 아빠 빨리요." 어렸을 때부터 장기를 좋아하던 나는, 매일 밤 천원씩 걸고 아버지와 장기를 두곤 했다. 매일 매일 아버지께서 차 하나를 떼고 해도 지던 내가, 언제부턴가 아버지가 쉽게 느껴졌다. 고작 해봐야 열두 살 꼬마의 너무도 뻔히 보이는 수에도 당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난 뭐가 그렇게 좋았었는지…. "여보, 지금 뭐하는거에요?" "아. 아니 물을 따라야 하는데… 이거 물을 어떻게 따라야 할지를 모르겠네…." 물병과 컵 하나를 든 체 어쩔 줄을 몰라하고 계시는 내 아버지. 그때는 무엇이 그렇게도 웃겼었는지, 나와 나보다 8살 더 어린 내 동생은 깔깔 되며 웃었었지. "아빠. 아빠는 그것도 못해? 이건 3살짜리 내 동생도 하겠다!" 왜 나는 지금에서야 기억이 날까. 당시 나는 그런 아버지를 놀리며 웃어댔지만, 내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는 것들. 그 후로도 수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으로는. 운전 경력 20년 가까이되신 아버지께서 차사고를 내신 일이다. 이건 당시에 어머니께서 걱정하실까 봐 (혹은 또 혼이 날까 봐) 아버지께서 나에게 비밀리에 묻어두기로 한 사건이다. 실제로 10년이 지난 지금도 어머니는 그때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신다. 기억을 되짚어 보자면, 그 당시 나와 아버지는 미용실에 가고 있었다. 사고는 주차를 하기 위해 차를 뒤로 빼는 도중에 일어났다. 쿵. 뒤차를 박았다. 그렇게 차 주인에게 사죄를 하고 몇십 만원을 물어냈었지. 나는 그 모습마저 재밌어 웃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너 엄마한테 오늘 일은 꼭 비밀로 해야 된다. 이건 사나이와 사나이 둘 만에 비밀이야! 알고 있지?" "헤헤. 알았어 아빠. 걱정 마." 그렇게 수차례의 사고와 사건들이 있은 후에 끝내 우리는 정신병원을 찾았다. 병명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별로 걱정할것이 못된다는 것이 의사의 설명이었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찾아오는 병이라고 하였고, 회사일을 당분간 쉬고 휴식과 안정을 취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너무도 '별것 아닌' 병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그 말을 믿었다. "사삼팔칠. 자 해봐요." "칠... 칠... 칠 팔... 아 그것 참 어렵네... 문제가 뭐였지?" "사삼팔칠이라구요. 거꾸로 하면 칠팔삼사 잖아요. 그럼 다시 문제 내볼께요. 육삼칠구." 의사가 추천한, 병을 빨리 낫게 하기 위한 놀이였다. 네 자리의 숫자를 말하면, 그것을 거꾸로 말하는 놀이였는데, 그 놀이는 병을 낫게 하기는 커녕, 집안의 불화를(?) 초래하곤 했다. "아 참! 구칠삼육 이잖아요! 그것도 못해요? 아니 그냥 네 자리를 거꾸로 말하면 되는 건데 그것도 기억이 안 나요?"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줄 알아? 기억이 안 난다고. 숫자가 기억이 안 나는데 나보고 어쩌란 소리야!" 병은 호전될 기미조차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악화되어만 갔다. 우리는 결국 의사의 조언대로, 내 고향이기도 하고, 또 부모님께서 처음 만나 8년을 함께 하셨던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 아버지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그곳에서 쉬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그 곳에서, 우리는 너무도 오랜만에 행복을 느꼈다. 큰 이모, 작은 이모, 그리고 이모부 둘. 우리는 그 어느 곳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평온함과 행복함을 느꼈다. 너무도 오랜만에.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이제 조금 사라지나 싶던 그 괴물은, 이주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우리 목을 조여왔다. 그것도 당시 나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아버지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신다. 아버지가 비틀비틀 거리신다. 아버지가 토하신다.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사람을 못알아 보신다. 내 아버지가... 너무도 이상하다. 우리는 결국, 한 달을 예정으로 갔던 그 여행길에서, 단 이주 만에 발을 돌려야 했다. 영동 세브란스 병원. "마음 단단히 하셔야 합니다. 이 사진에서 보면, 저기 뇌 오른쪽 구석에 야구공같은거 하나 보이시죠? 저게... 그러니깐... 안타깝습니다만... 뇌종양 입니다. 악성 이네요." 확률이 5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버지가 다시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믿지 않았다.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라고 믿었다. 의사가 아니라 사기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우리가 찾았던 그 수많은 의사들을 다 사기꾼이라고 믿기에, 현실은 너무도 가혹했다. 결국, 아버지는 언제 다시 나올지도 모르는 그곳에 입원을 하셨고, 어머니는 일주일의 대부분을 아버지와 함께 그곳에서 지냈으며, 나와 동생은 이웃집부터, 외가집, 고모집 등등 우리를 돌봐 주겠다고 하는 잘 알지도 못하는 곳을 떠돌아 다니며 여기저기 얹혀사는 짐짝이 되었다. 2년이라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매일 아침을 어린 동생의 울음 소리로 깨야 했고, 그 울음 소리가 사라질 저녁때쯤 잠이 들었다. 죽음이라는 것을 알기에 너무도 어렸던 나는, 아버지가 돌아 가신다는 사실보다도,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펐다. 집에 놀러 오겠다는 친구들에게 이런저런 변명을 대며 거절을 할 때도, 쌩 판 모르는 사람들과 식사를 해야 할 때도, 자꾸만 우는 동생 때문에 그 집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할 때도, 동정 어린 눈으로 나와 내 동생을 바라보는 그 시선들도, 더이상 함께 장기를 둘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수업 시간 부모님 관련 얘기가 나올때 억지로 눈물을 참아야 할 때도,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버티기 힘든 악몽이 되었다. 그 어린 나이에 나는 하늘을 원망하기 했었다. 나는 매일매일 기도도 했는데…. 교회도 꼬박꼬박 나가고, 나쁜 짓도 안했는데….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왜 나는 다른 친구들처럼 부모님 손잡고 걷질 못할까. 언제쯤이었을까. 처음으로 아버지 병문안을 갔다. 그 날,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얀 방, 하얀 침대에 누워 계신 하얀 옷을 입고 있으신 아버지. 손등에 꽂힌 주삿바늘. 초점 흐린 눈동자. 너무도 말라버리신 아버지. 그리고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많이 없어진 아버지의 머리숱. 화장실 마저 혼자서는 가시지 못하시는 아버지. 소변을 볼때도 너무 아프셔서 도움이 필요하시다는 우리 아버지…. 그리고 밤새 손 잡고 울면서 기도하시던 내 어머니와 우리 할머니…. 너무도 무서웠다. 그날 내가 본 것들은, 나에겐 너무도 낯설고 무서웠다.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는 수많은 고민 끝에 수술을 결정했다. 수많은 의사들이 그 수술은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했다. 가망이 없다고 했다. 혹여, 신이 도와줘서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다고 해도, 언어적인 장애나, 뇌 기능 저하로 남은 날들 역시 정상적으로 지내긴 힘들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확률은 5%도 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적은 확률에 모든것을 걸수밖에 없었다. 수술이 시작 되었다. 1시간... 2시간... 3시간... 시간이 너무도 천천히 간다. 예상 수술 시간은 10시간이었던가. 끝? 혹은 새로운 시작? 모든 것은 그 10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될것이다. 엄마가 기도를 한다. 눈물로 기도를 한다. 기도를 하면 아버지가 깨어 나실까. 기도를 하면 우리 예전으로 돌아갈수 있을까. 나도 기도를 한다. 그 곳에 있던 모두가, 오직 하나의 바램을 가진채, 그렇게 기도를 한다. 8시간.. 9시간.. 10시간.. 수술실에서는 아직 아무런 기척도 없다. 모두들 초조한 기색으로 수술실의 문만 주시 하고 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린 모두 한 마음 이었다. 11시간... 12시간...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없다. 13시간... 수술실의 문이 열리고, 의사선생님이 피곤한 기색으로 나온다. 그리고 입을 연다. "수술..." 모두가 숨죽이며 그 다음 단어를 기다린다. "성공입니다." 그 곳에 더이상 절망은 없었다. 상처도 없었고, 공허함도 없었다. 그 곳에는 희망이 있었고, 치유가 있었고, 넘처 흐르는 사랑이 있었다, 몇 주 후 집으로 돌아온 우리 가족. 그날 역시 여느 날처럼 장기를 두었고, 나는 아버지에게 단 한판도 이기지 못했다. 그 수술의 후유증으로, 아버지 께서는 오른쪽 팔을 잘 못 쓰시게 되었다. 허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 께서 잃은 것은 오른팔 단 하나 였지만, 그것보다 몇 억배의 값어치가 있는 "함께함"이라는 보물을 얻었으니깐. 그 이후로도 몇 개월을 더 아버지께서는 힘든 방사능 치료를 받으셨고, 그 과정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머리카락 마저 다 빠지셨다.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팔은 거의 완치 되었으나, 여전히 우리 아버지는 머리숱이 없으시다. "그것은 아마도 함께함의 행복을 잊지 말라고 신이 남겨놓은 사랑의 증표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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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  |  2008-10-31 09:20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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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와서 뭉치시는 가족은 어려운을 이겨내시고, 다 성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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