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내세는 인간이 만든 은유적인 말들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언어가 세계를 창조한다. 태초로부터 인간은 자연에 대해 장엄하고, 신비스럽고, 경이롭고, 자비롭고, 진지하고, 힘이 넘치는 것을 체험했다. 무엇보다 자연은 자신들을 양육하는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상 자연의 세계를 통해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고 확대되었다. 우리의 조상들은 시각적인 문자들이 발명되기 훨씬 오래 전, 즉 입으로 표현하는 원시적인 믿음이 생겨나기 전부터 자연적인 현실로부터 자율적인 체험이 있었다. 그리고 후대에 이성적이든 비이성적이든 대부분의 믿음체계가 상징적인 언어를 모태로하여 탄생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왜 존재하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로 말하고,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실의 식물, 동물, 기후, 지형, 사회적인 인간 관계 등을 비유의 자료로 삼았다. 인류 문명사의 초기에 문자적 기록이 시작되었을 때에 사용되었던 은유적인 언어들이 아직도 우리들에게 남아있다. 예를 들자면,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쓰여졌던 ‘주님은 나의 목자,’ ‘하느님의 어린 양,’ ‘작은 겨자 씨,’ ‘당신의 왕국이 임하소서’, ‘하늘 문,’ ‘지옥 불,’ ‘하느님의 보좌,’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그는 나의 방패이고 구원의 뿔이시요,’ 등이 아직도 현대인들 사이에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은유적인 언어 즉 ‘궁극적인 실재’(Reality: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실제적 현실)에 대한 믿음의 원천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특정한 시대와 환경의 사람들에게 무엇이 진실하며,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은 고대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종교적인 이야기들, 은유들, 영적 믿음들은 진실했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사람들의 세속적인 일상생활의 체험에서 생겼다는 뜻에서 진실하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아름답고 자비롭고 사랑스럽고 경이롭고 능력있고 장엄하고 신실하다고 상상한다면, 그 원인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아름다움과 자비와 사랑과 경이로움과 능력과 장엄함과 신실함을 직접 느끼고 체험했기 때문이다. 만일에 우리의 조상들이 달에서 살고 있었다면 하느님의 이미지에 대해 달 표면의 메마른 땅을 반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물도 없고 생명도 없는 황폐한 달에 갇혀있지 않고, 생명력이 흘러 넘치는 창조적인 지구에 살고 있는 덕분에 아름답고 광대한 우주의 한 개체임을 인식할 수 있고, 이에 따라 하느님의 이미지를 긍정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는, 우주가 어떻게 출현했고, 우주가 지금 여기에 있고, 우리는 태초로부터 우주의 본질이며 한 개체이고, 모든 개체들이 통합하여 우주 전체를 이루어 간다는 신비스러움이고 경이로움이다. ‘하느님’이란 우리의 인식과 양심과 연민의 사랑의 중심에 있는 성스러움이며, 모든 생명체들이 공동으로 탄생과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이루어 간다는 경이로움이다. ‘하느님’이란 우주의 모든 개체들이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통합적인 전체를 이루어 가는 ‘창조성’이며, 각 개체는 전체이며, 전체는 개체라는 신비스러운 실재이다.
하느님과 관련해서 삼층 세계관의 고대인들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죽음 후의 세계’ 즉 상층에 있는 신의 세계에 대한 신화들을 만들었다. 더욱이 ‘몸과 영혼’은 분리된 존재들로 몸이 죽으면 영혼이 다른 세계로 옮겨 간다고 상상했다. 고대인들은 이것을 종교의 경전 속에 삽입했다. 그러나 21세기의 뇌의학은 뇌가 죽으면 영혼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혔다. 몸과 영혼의 분리는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큰 오류였다. ‘죽음 후의 세계’는 어떤 형태라도 인간의 언어가 창작한 아무도 모르는 상상의 세계일뿐이다.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미지의 세계에 메어달려 두려움과 욕심 속에서 살기 보다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을 기쁘게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더욱 소중하다. 이것이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를 온전히 살아 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