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독재에 길들여지고 획일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온 결과,
사람들은 '나'를 잃어버렸다. '너' 또한 잃어버렸다. '우리' 라는 우리 속에 모든 것을 가둬버렸다.
파쇼는 어원적으로 Fasces, 즉 묶는다는 뜻이다.
'단결' , '충성' 이라는 어마무시한 구호로 '나', '너' 를 없애버리고 되도않는 '우리'로 묶어버렸다.
그 시대를 살아온 결과 사람들은 분별해야할 지점에서 분별을 하지 못한다. 드러내어야할 때에 머뭇거린다.
생각의 차이와 인식의 차이는 고사하고 느낌의 차이, 취향과 욕망의 차이마저도 인정하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며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사는 세계시민, 새로운 세대에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민족주의는 부족주의를 고상하게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야만성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나폴레옹 이후 서양사회에서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고나와 끔찍한 살육들이 벌어졌다.
아시아를, 아프리카를, 아메리카를 절단내었다.
민족주의는 당연히 인종주의다. 종교주의다. 차별을 전제로, 차별을 먹으며 존재하는 기생충과 같은 개념이다.
'우리'라는 애매모호한 파쇼적 개념안에 인간의 존엄을 가둔 채 수많은 '개돼지 인생' 들의 존재를 먹이 삼아
신분제를 유지하는 소위 주류 엘리트들의 이념적, 정서적 기반이다. 좌우를 떠나서 그러하다.
인간은 관계의 존재이며 우주와 사회 역시 관계로 얽혀있다. 관계의 출발은 '나' 다. '우리'가 아니다.
그리고 '너', 즉 타자다. 세상에는 '나'와 '나 아닌 것' 이 존재할 뿐이며 그 관계 속에서 세상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여기서 '나' 는 지존이어야한다. 신만이 지존이 아니라 나도 지존이다.
내가 지존이면 세상을 가진거다. 개돼지도 없고 욕망의 나락이라는 것도 없다,
강정호는 세상과 마주한 문 앞에서 문을 열다말고 지존을 잃어버렸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나'가 살아 있으면 '너'도 살아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 가 될 수 있다면 좋다.
그렇다고 민족과 국가는 너무 범위가 작다. 우리는 세계를 상대해야한다. 캐나다 작은 촌구석에서 밥벌어먹고
살아도 내가 세계를 대표하고 이끌어가는 선수라 여기고 새로 차려진 영국 밥상에 감놔라 떡놔라 해야한다.
올림픽 구경하되 우리나라가 메달 몇개따는지에 목매지 말고, 박태환이 메달 따는지에 목매지말고 그저
인류가 한자리에 모여,'너'와 '나'로 만나,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가는 문화, 그 축제의 놀이를 즐기면 된다.
나XX 이는 '나'를 잃어버리고'타자' 역시 그들의 삶에 존재하지않는 자들이 누리는 세계에 대해 '산통을 깨버린'
어리석은 애완견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에 분노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정작 분노의 대상이 바로 '자신' 들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클립보드님의 글은 우리로 부정의 부정을 요구하고 있다.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따라야 비로소 '나'가 찾아지는 것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