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서 솔직해야 하며 이성적으로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성서에 근거한 교회사를 신중하게 살펴보면, 원초적으로 기독교는 차별적이고 편협한 유신론적 교리와 믿음을 보호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탄생하지 않았다. 교회는 유신론적 종교제도에서 태동하지 않았다. 초대 교회는 전혀 이분법적인 유신론적 믿음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으며, 오직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예수가 살았던 것처럼 참된 인간으로 사람 답게 온전하게 살 수 있는 나라 곧 예수가 가르쳐준 이 땅 위의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였다. 성서에 따르면 초대 기독교인들은 참 사람 예수가 말한 것처럼 말하고 예수가 산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사회에서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그리스도(Christ)와 같다고 해서 그들을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불렀다. 원래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는 예수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예수처럼 완전한 인간성을 살아내는 사람들을 칭하는 고대 사회에서 통용되던 말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는 한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는 많이 있을 수 있다(참고: “One Jesus, Many Christs”, Gregory Riley).
성서적으로 기독교는 예수를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하느님으로 신봉하는 교리적이고 관념적인 종교로 탄생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종교제도 없는 공동체” 곧 “자율적인 삶의 공동체”에서 출현했으며,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활동하는 “생명의 종교”이다. 물론 예수는 기독교를 세우지 않았으며, 예수는 이분법적인 원죄론, 구원론, 대속론, 내세론 따위의 유신론적 교리에 대해서 전혀 가르친 적이 없다. 이런 내용들이 성서에 간접적으로 또는 은유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현대인들이 고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직역적으로 믿는 것은 어리석고 몰상식한 일이다.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성서는 1세기에 성서 원본들이 실종된 상태에서 사본에서 사본으로 수없이 복사되었으며, 오늘의 성서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사본들 중에 극소수 수집하여 편집된 사본들의 모음집이다. 물론 성서에 예수를 신격화하고 내세적 천국을 문자적으로 비추이는 것은 삼층 세계관의 고대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성서저자들 곧 사본을 만든 필사가들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며 성서 전체의 핵심적인 사상은 아니다. 다시 말해 고대 삼층 세계관에 근거해서 은유적으로 기록된 성서를 21세기 우주진화 세계관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문자적으로 믿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현대인들은 참 사람 예수가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고대 필사가들이 왜 그렇게 성서를 기록했는지에 대한 성서비평학적 탐구가 필수적이다. 무엇보다도 성서에 솔직하면, 기독교의 창시자들은 인간의 존엄성 곧 인간성을 하찮은 것으로 폄하하는 유신론적 종교제도를 철저히 반대하고 거부했으며, 부족적 경계 넘어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려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1세기에 기독교가 탄생하게 된 동기는 인격신론에 근거한 초자연적 하느님을 신봉하는 유대교 성전에서 추방된 사람들이 참 사람 예수의 우주적인 의식과 완전한 인간성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려고 자신들의 공동체를 시작한 것이다. 사실상 그들은 유대교의 유신론적 하느님에 의해서 차별 받고 착취당하면서 인간 이하로 취급 당하던 사람들이었다. 초대 기독교를 세운 사람들은 참 사람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면서 오랜 세월 동안 움켜쥐고 있던 “유신론적 믿음”을 아낌없이 폐기 처분하고, “그런 하느님 없이”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가정과 사회와 세계는 공평한 정의와 사심 없는 사랑을 실천하며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인식했다.
5천년 전 고대인들이 창조했던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하느님은 지난 수세기 동안 과학혁명과 인식혁명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퇴화하여 철저히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오늘날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인류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 인류사에서 유신론은 삼층 세계관에 근거한 하늘 위 상층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들에 대한 믿음이었다. 유신론적 믿음은 인간의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수천년의 인류 역사에서 인간차별과 전쟁과 테러와 종교적 내지는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착취를 정당화했기 때문에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믿음은 이기적이고 부족적이기 때문에 전체를 분열과 혼돈에 빠트리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신론적 종교인들은 이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으며 이성적인 분별력을 상실한 채 자아도취의 망상 속에서 헤매고 있다. 그런 유신론적 믿음의 발전과정에서 고대인들은 초자연적인 영들의 존재를 상상했으며 그것은 다신론이었고 그 영들을 신(gods)으로 불렀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유신론은 다신론의 세계에서 유일신의 형태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기독교 구약성서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고대 세계에서 탄생한 신은 부족의 추장처럼 자신의 부족만을 보호하고 축복했으며, 이 부족신은 자신을 섬기는 부족만을 선민으로 인정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4세기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하면서부터 기독교는 군사적 제국의 세계정복의 정치적 야욕까지 함께 전수받았다. 그리고 마치 기독교가 세계를 통치하는 유일하고 진실한 종교라는 자기기만에 빠졌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신중하게 솔직하게 성서를 읽어야 한다. 성서는 유신론적 성전종교를 철저히 반대한 무신론적 예수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정신 곧 예수의 새로운 의식과 완전한 인간성을 체험한 사람들의 삶의 증언이다. 지난 세기 동안 주류 신학계의 전문학자들은 성서비평학 연구를 통해서 성서를 다시 새롭게 읽고 역사적 예수 탐구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교회가 325년에 니케아 신조를 만들면서 예수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적인 존재로 변형시키기 전에 바닷가와 장터와 들판과 산에서 힘없어 버림받은 민중들에게 새로운 의미의 인간과 생명과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고 자신이 몸소 그 의미들을 살아냈던 인간 예수가 있었다. 그 역사적 예수는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이고 편협한 유신론을 완강히 거부했으며 성서 전체는 이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오늘 교회들은 예수가 회칠한 무덤이라고 철저히 반대했던 유신론적 성전종교의 퇴행적인 속물들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더욱이 교회는 우겨대기를 유신론적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무신론자로 정죄하고 교회에서 추방한다. 유신론적 종교제도를 반대한 예수가 무신론자가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무신론자 예수는 성전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교리적이고 관념적인 종교인이 아니었으며, 다만 세속적인 세상에서 유신론적 종교제도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먹고 마시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의 언행은 온전한 인간성의 표상이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교회에 다니고, 교회가 만든 내세적 교리들을 수동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성서의 문자적인 권위를 인정해야 하고, 두 손 모아 기도를 해야 하고, 예수의 신성을 믿어야 하고,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이 하느님의 심판과 징벌을 면하도록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구속론을 믿어야 하고, 내세를 믿어야 하는 등의 믿음체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은 교회가 상업적이고 정치적으로 만든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인 교리들을 억지로라도 믿는 사람이 아니다. 원초적으로 기독교인은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이며, 예수가 산 것처럼 사는 사람이다. 기독교인은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수동적으로 맹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예수가 가르친 대로, 보상심리를 떠나 사심없이 조건 없는 사랑을 종교와 인종의 경계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는 사람이다. 기독교인은 교회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예수의 하느님을 이해하고,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방식이 하느님의 의미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살아내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은 억지로 믿는 척하는 거짓과 은폐의 가식적인 사람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어 모든 불안으로부터 자유해진 사람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내세적인 망상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 현세적이고, 지금 여기 이 세계에서 영원함을 만끽하고, 생명이 충만하고 생기가 넘치는 사람이다. 기독교인은 유신론적 하느님을 맹신하는 내세지향적 종교인이 아니라, 새로운 의식으로 온전한 인간성을 살아내는 참된 사람이다. 결론적으로 21세기 과학시대의 기독교인은 과학이 발견한 우주진화 세계관을 살아내기 때문에 우주의 법칙이 깨어지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신뢰하지 않으며, 이에 따르는 내세지향적 망상의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인격신론의 초자연적 하느님의 존재를 맹신하는 유신론자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무신론자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지구적 위기상황은 장기화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기독교인들은 동료 인간과 예수와 성서와 하느님에게 솔직해야 한다. 교회가 만든 상업적인 교리와 전통에 속아넘어가던 유치한 행태는 이제 중단해야 한다. 바이러스를 막아 주는 그런 하느님은 없다. 죽음 후에 천국으로 들어 올려줄 그런 하느님도 없다. 물론 우주세계는 하늘 위와 중간과 아래가 없이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고 있는 한 몸이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이란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은 단지 인간 뇌의 기제작용으로 발생한 내면적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창작한 천국과 지옥의 노예가 되기 쉽다
이 해가 가기전에 제가 늘봄님께 한가지 여쭤볼 사항이 있습니다.
저는 늘봄님께서 믿으셔서 올리시는 종교, 신앙, 철학및 인간성, 우주, 인생, 죽음, 등등요 에 관련되는 글에 동의를 하는 점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질문 사항) 늘봄님께서는 이 생애를 마치신 후, 즉 죽음 후 내세를 믿지 않으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는지요? ~ 허면, 이 생애에서 인간애를 실천해서 살고 난 후, 자연의 법칙에 따라 그냥 완전히 영원히 본인의 존재가 소멸되는 것으로 만족하시는건지요?
늘봄님께서는 과학적이고 물리적인 것 외에도, 정신적인 또는 영적인 것을 옹호하시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서요.
이 점이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이 글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면, 다른 식물과 생물들이 이 입자와 성분들을 이용해, 새 생명으로 탄생하지 않나요?
저는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적 분리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신론적 이원론 죽이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원론은 설득력과 효력이 없습니다.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방식과 비전이 필요합니다.
저는 죽음 후의 내세를 믿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일회적입니다. 이 세계와 다른 세계의 분리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이제 몇 년을 더 살게 될지 모릅니다. 길어야 20년? 어쩌면 몇 년 후에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몇 년을 더 사느냐기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나의 생애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려고 합니다.
이만큼 살았으면 됬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살려는 꿈은 그야말로 헛된 욕심이고 망상입니다. 종교들이 영생을 가지고 유치한 장사를 해서 돈을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누구는 영생을 얻고 누구는 얻지 못한다는 새빨간 거짓말로 얄팍한 속임수를 씁니다.
저는 유신론적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존재론이 아니라 관계론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 곧 이웃들과 함께 온전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란 말을 반드시 입에 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하느님과 성령에게 내가 원하는 무엇을 달라고, 무엇을 해달라는 식의 주문형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기도로 너무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이란 말) 없이도 의미있게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20년 목회에서 교인들과 나누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저에게 믿는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이기적인 욕심, 이루어지지도 않을 헛된 꿈을 내려놓고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죽어야 새로운 생명이 탄생합니다.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우주의 법칙이 깨어지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상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거짓말일 뿐입니다.
모든 분은 제가 항상 말해온 대로 각자 본인이 선택하시고 믿으시는 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 같습니다.
답변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