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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변해야 산다.
작성자 기독교     게시물번호 -7847 작성일 2007-03-28 20:15 조회수 720
 나는 여기서 '21세기 기독교를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을 말하고 싶다. 깨어있고 열려 있는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에 대한 동참을 촉구한다. 이것은 기존의 한국 기독교의 근본적인 변혁을 포함함과 동시에 21세기 대안 기독교를 향한 '의식 개혁운동'이자 그에 따른 '실천운동'을 의도한 것임을 인지하길 바란다.
 
여기서 먼저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이라는 것은 나머지 열두 가지 패러다임 대전환을 위한 기초 토대이자, 그 같은 패러다임 전환이 왜 있게 되는지에 대한 궁극적 원인으로서 자리하는 것이다. 열두 가지 패러다임 전환에서 1-6번까지는 주로 신학적 전환에 맞춰져 있고, 7-12번까지는 주로 실천 목회 현장의 전환에 맞춰져 있다.

여기서 다시 7-12번도 나눠볼 수 있는데, 그럴 경우 7-9번은 예배와 교회 목회에 관한 것으로 10-12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천적 삶에 대한 것으로 보면 된다. 하지만 크게 봐서는 1-6번과 7-12번으로 둘로 나눠볼 수 있다. 이 때 조직신학이 실천신학의 브레인이고 실천신학이 조직신학의 손발이듯이 우리가 지향하는 대안적인 기독교는 항상 이론과 실천의 영역에 있어서도 양자의 긴장이 팽팽하게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제부터 이에 대해서 하나하나 짚어보고자 한다.

인식의 기초 전환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이것은 우리의 인식의 토대인 가장 근본적이고도 기초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이는 앞으로 얘기할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의 기본적인 대전제이기도 하다. 엄밀하게 말하면 앞으로 논의할 12가지 패러다임 전환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인식의 사고구조부터가"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어긋남과 갈등

우리 사회를 보면 주목할 만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바로 진보운동의 맹위를 떨치는 사람들 중에는 진보적 기독교인이 많다는 점과 또한 우습게도 우리 사회의 보수층을 형성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대부분이 보수 교단에 속하는 기독교인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독교 진영 안에서의 보수와 진보라는 그 맥과 양상이 사회 일반에서도 고스란히 그대로 사회문제와 연관되어 저들의 사회적 삶과 이념적 의식에 대한 범주를 가늠케 하는 지점이라고 하겠다. 진보측 기독교 인사 중에는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좌파 진영에 속하는 이들이 많은 반면에, 보수측 기독교인들은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수구적인 우익세력이라고 볼 만한 요건들을 다분히 지니고 있는 이들이 많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상당히 기이한 것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저들은 기본적으로 같은 성경책, 같은 하나님, 같은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것이 드러나는 사회적 삶에 대한 의식과 행태는 저토록 다르게 나누어질 수 있단 말인가. 사실상 저들의 입장의 차이 또는 이념적 차이는 저들이 가진 신앙과도 결코 동떨어질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저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성경책과 같은 하나님, 그리고 같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서로가 전혀 다른 하나님 전혀 다른 기독교에 발을 내딛고 있다고 봐야 옳지 않은가.

쉽게 말해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수차례 감옥에도 들어갔던 고 문익환 목사의 하나님과 서슬퍼런 군사 독재 정권을 위해 아낌없이 조찬기도회마저 베풀었던 CCC의 대부격인 김준곤 목사의 하나님은 솔직히 같다고 보긴 힘들다는 얘기다. 오늘날에도 보면, 국가보안법 완전 폐지를 주장하는 향린교회의 목사였던 홍근수 목사의 하나님과, 위대한 아메리카와 부시를 외치면서 때려잡자 김정일 때려잡자 공산당을 외치는 한국기독교의 대표적 보수단체인 한기총 회장 길자연 목사의 하나님은 서로 같은 하나님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저들은 기독교라는 카테고리에 함께 묶여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교회당에서 같은 성경책과 찬송가를 사용한다고 해도 저들의 하나님은 놀랍게도 서로 다른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있는 것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이른바 이같은 보수와 진보의 신앙적 차이와 괴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옳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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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보수와 진보는 겉보기엔 같은 성경책과 같은 하나님 같은 예수를 믿는다지만,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하나님 서로 다른 기독교에 발을 내딛고 있다고 봐야 옳지 않을까. ⓒ뉴스앤조이 양정지건(왼쪽) 뉴스앤조이 이승규(오른쪽)

기독인들에게 있어 이에 대한 답변으로 자칫 생각하기 쉬운 것은 '성서해석의 차이'에서 저들의 갈등이 빚어진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또한 답변이 될 수 있는 요인들 가운데 하나이긴 하다. 하지만 우스운 것은 기독교를 전혀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서도 그 이념과 그 사회적 행태에 따라 보수와 진보로 나눠볼 수 있다고 할 때, 저들의 친화성이 놀랍게도 기독교의 보수와 진보라는 색조와 각각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서해석의 문제를 논하기 이전에 이미 근본적으로 저들은 상당한 엇갈림 속에 놓여있다고 봐야한다.

'자유총연맹'이라는 보수우익의 사회단체가 기독교 단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한기총'과 상당한 친화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듯, 사회적 실천의 문제를 숙고하는 맑시스트들과 기독교 진영에서 좌파급 기독교인들은 서로 간의 빈번한 대화와 친화성을 보여주고 있는 점은, 성서해석의 문제 이전에 궁극적으로 세계를 가늠하는 가장 기초적 이해로서의 세계관의 문제라고 하겠다. 즉, 내가 세계(우주)를 궁극적으로 어떻게 보고 있느냐의 상태에 따라서 신도, 성서도, 우리 사회의 사건들도 달리 이해되고 채색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플라톤적 관념론의 사고 습성에 젖은 자들과 유물론적 세계관에 철두철미한 자들이 세계 안의 소소한 사회적 사건들을 대하는 시각과 상황판단 및 영위하는 삶의 행태들은 첨예하게 다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때 우리가 철학적 사고를 제대로 하지 않는 한, 세계관의 세계 해석의 문제는 매우 은연중에 이미 전제된 것으로 잠복되어 있다고 하겠다. 철학이 모든 학문과 사유의 베이스에 자리하는 기초 학문인 이유도 바로 이런 점에서다.

관념적 이원론으로 인한 사회적 행태

이 점에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철학 진영에서 논의된 다음과 같은 언명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관념론은 역사적으로 알게 모르게 지배이데올로기와 매우 친화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관념론은 철학사적으로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 세계를 이분화시켜 한 쪽이 다른 한 쪽에서 파생된 것으로 봄으로서 위계적으로 보는 플라톤의 관념적 이원론 사상에 뿌리박고 있다.

애초에 기독교 신학은 헬라문명권의 영향 안에 놓여 있었기에 알게 모르게 플라톤적 관념론이 기독교 안에 유입되었다. 이는 그리스도교 사상사를 꿰는 사람이라면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스콜라 시대의 기독교 신학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에 대한 아예 본격적인 신학적 작업이기도 했다. 이것은 현재에까지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우리 안의 해석학적 존재론의 시각이다.

예를 들면, 관념적 이원론으로서의 시각은 신-인간, 교회-세상, 내세-현세, 영혼-육체, 정신-물질, 남자-여자 등등 세계를 이원화시켜 위계적으로 어느 한 쪽에 다른 한 쪽을 종속시켜서 보는 그러한 구도로서의 인식 사고구조가 알게 모르게 여전히 기독교 사상 안에 뿌리 깊도록 팽배해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것'을 유난히도 강조하는 습성이 있다. 영적인 삶, 영적인 눈, 영적 양식, 영적 변화 등등 '영적인 어쩌구'라는 표현만 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좋아할 정도로 늘상 뇌까린다. 이 관습적 효과는 역으로 구체적인 육체적 삶이라는 이 땅의 현실을 은연중에 배제해버리는 기능으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특히 "당신은 기독교를 왜 믿는가?"에 대한 답변을 들어보면 대부분이 하는 대답은 "죽은 뒤의 나의 영혼이 천당에 가기 위해서"라고 곧잘 말한다는 사실도 기존 기독교에 깃든 관념적 이원론의 행태에 속한다. 구원이란 것을 흔히 '영혼구원'으로서만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이다. 나중에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부터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에서 얘기할 것이지만,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천당'과 '천국'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혼용해서 곧잘 쓴다.

세상을 볼 때도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켜 사고한다. 그래서 보수 기독교인 가운데는 기독교의 성서적 삶에 대해 얘기하는 것과 현실 정치적 사안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을 얘기하는 것을 서로 동떨어진 별개의 사안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없잖아 있다. 즉, 세상 일에 속하는 정치적 견해를 피력할 생각일랑 말고 하나님의 일에 속하는 교회 일에나 신경쓰라는 것이다. 물론 근래에 이르러 정교분리 인식 자체는 희미해지고 오히려 그 자신의 내적 신념의 정치적 표출은 확대되어지고 있지만, 표출된 그 정치적 양상은 여전히 보수와 진보의 갈등으로서 나뉘어지고 있다.

또한 극단적인 이원론적 보수주의자는 성경 이외의 지식은 세상 지식이기에 아예 쓸모없다고까지 말하는 자도 있다. 관념적 이원론의 습성을 보이는 자일수록 세계 안의 건강한 일반적 합리성까지 경시하는 초자연주의를 강조한다. 흔히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 구도와 갈등 역시 이와 관련된다. 저들에게 세계 안의 모든 지적 언명들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하위 명제에 속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보수 기독교인들의 인식 속에는 사탄이나 마귀를 예배나 기도 중에 잡념을 일으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무슨 초심령적인 세계에 자리한 존재로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보 기독교인들은 이와 달리 이를 매우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람을 피흘리게 하고 생명과 평화를 유린하는 독재체제나 악법들, 혹은 잘못된 사회구조악으로서의 제도들이나 법률조차도 오히려 실존적인 사탄의 정체로 이해하기에 바로 그러한 연유에서 작금의 국가보안법을 보는 시각도 첨예하게 달리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사람을 피흘리게 하고 죽인다는 얘기다.

신본주의의 반대는 인본주의가 아닌 사탄주의

곁가지로 하나만 더 얘기해보자. 우리는 <신본주의> 반대를 <인본주의>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상식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신본주의의 반대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탄주의다. 인간은 그 사이에서 하나님이냐 사탄이냐를 선택해야만 하는 중간자적인 존재일 뿐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다.

어떻게 인간애, 휴머니즘이 사탄의 술수가 될 수가 있는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으로서 참되게 살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도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즉, 이 땅의 평화에 기여하는 인간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서 구원의 길로 혹은 멸망의 길로 나아갈 뿐이며, 그 속에서 끊임없이 번민하는 존재일 따름이다. 만약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지 않는다.

인본주의가 사탄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비극적 가능성들을 우려하지 않은 지나친 '낙관주의적 유토피즘'으로 흐를 때만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것은 일말의 반성조차 없는 인간의 교만으로서 드러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에게 속한 인본주의와 사탄에게 속한 인본주의가 있을 뿐이다. 혹자는 이를 행함과 믿음의 문제와 결부시켜 구원 문제를 말하기도 하는데, 사실상 성경에서 거부된 행함은 공로주의라는 율법적인 행함이지 진정으로 가치 있는 종교적 신념에서 열매 맺은 선한 행실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믿음은 결국 행함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으며 그럼으로써 그 자신의 신앙을 예증할 뿐이다. 믿음은 행함의 신념이요 행함은 믿음의 열매인 것을. 분명히 말하지만, 휴머니티로서의 인본주의는 결코 사탄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부터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몸소 인본주의를 실천하셨던 분이 아니셨는가.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위한 새로운 전환

나는 이러한 관념적 이원론의 시각이 기독교의 세계관으로서 자리하는 한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본다. 우리가 천국의 실재성이나 영적 존재를 완전히 부인하진 않더래도 그것이 이 땅의 현실과 동떨어진 그러한 것에 불과하다면 설득력 없는 이 같은 관념적 이원론의 시각은 양자를 긴밀히 연결시키는 현실적 관계론으로 바뀌어져야 마땅하지 않는가. 관념적 이원론으로서의 시각이 우리의 인식의 사고패턴을 좌우하는 한 역동적이고도 관계적인 이 땅의 현실을 전혀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고 하겠다.

따라서 우리가 속한 이 우주를 보는 가장 기초적 시각부터 제대로 교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내 안에 은연중에 자리한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세계관에 따른 세계 해석에 따라 신도, 인간도, 성서도, 사회 안의 모든 사건들도 달리 보이는 것이다. 이는 세계관의 문제에 있어 가장 기초라는 '해석학적 존재론'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앞으로도 계속 제시하고자 하는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의 대전제에 속하는 가장 중요한 사항임을 덧붙여 두는 바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부지불식 간에 자리하고 있는 내적 시각의 교정 문제부터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관념적 이원론으로서의 세계관은 보수 기독교인들에게는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해석학적 존재론이다. 이것은 사물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 거의 무의식의 진원에 속하는 것으로, 저마다 그 자신에게는 그 어떤 '뿌리 깊은 전제'로서 작동되는 관념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성장하면서 자신에게 영향을 끼쳐왔던 주위 환경인 타자적 세계와의 '교감'에서부터 형성된 것이리라. 바로 이 같은 사유의 충돌로 인해, 이로부터 세계와 삶을 보는 가치관의 충돌과 세계관의 차이, 그리고 나아가 해소되기 힘든 문명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결국 이것은 곧 철학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세계 이해의 기초라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기독교 신학과 깊숙한 관련을 가지게 되는 지점도 바로 이 지점에서다.

그렇기에 우리의 올바른 신앙관은 근본적으로 세계 안의 모든 사태에 대한 이해에 있어 바람직하고도 건강한 합리성에 기반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현실 저 너머의 영속성과 변화와 유동에 놓여 있는 이 땅의 현실과 서로 긴밀한 관련으로서의 통합적인 세계관을 기독교적 세계관으로서 필요로 한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통합적인 세계관에 대해서는, 윌터 윙크, 한성수 역,『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한국기독교연구소), pp.27-33 참조).

그럼으로써 기독자는 하늘의 비전으로서 땅의 문제를 해결하며 그것은 이 땅의 부조리한 현실마저도 설득력 있게 설명해낼 수 있는 것일 때, 세계 안에서조차 진정한 깊이와 경외감을 확보한다. 참종교란, 현실 저 너머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현실 세계에 위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영속적인 탁월함>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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