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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녹두꽃
작성자 안희선     게시물번호 10816 작성일 2018-04-19 00:06 조회수 3049

녹두꽃 / 안희선

해 저무는 황톳길에 눈 시리게 배어나온, 노오란 침묵 아, 그것은 그 언젠가의 우렁찬 함성이었나 피 끓던 열정이 남긴, 민중(民衆)의 목 쉰 소리었나 형장(刑場)의 달구지에 실려가던, 전봉준의 마지막 눈빛이었나 지천에 깔린 화사한 꽃들 제치고, 안간힘으로 일어나네 녹두꽃이 그렇게, 피어나네 청포 장수 넋을 놓아, 한 바탕 난장(亂場) 끝에 온통 허허로운 빈 강산 그래서, 다시 피어나네 기를 쓰고 또 일어서네 결코 죽을 수 없는, 흰 옷 나라의 서늘한 영혼처럼 막바지 신음으로 다시 꽃을 피우네 <Note> 동학혁명이 일어났던 게 어언, 124년전...... 그날의 전봉준이 마주했던, 시대적 상황과 오늘이 그다지 별반의 차이가 없음을 느낀다 부패한 정권 , 권력모리배꾼들의 한탕해먹기식 분탕질과 오늘도 여전히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民衆들 녹두장군은 무뇌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지켜보며, 과연 무슨 생각을 할지? 아마도, " 나의 죽음이 이토록 헛된 것이었는가? " 하며 그가 하늘에서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至氣今至願爲大降' 하며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지기금지원위대강 장탄식을 할 것 같다 * 사족 全琫準을 왜 녹두장군이라 불렀을까? 전봉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전봉준(1854~1895)의 출생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으나,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宮洞面 陽橋里:지금의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는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창혁(彰爀 혹은 承)의 아들이라 하고 그는 유난히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대략, 155cm의 신장) 주위의 사람들로 부터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하여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녹두장군 전봉준은 1892년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저수지) 축조 이유로 농민들의 금전과 곡식을 강탈하자, 농민대표와 함께 바른 정치를 해주도록 호소하였으나 거부당하여 1894년 1월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부패한 관리를 잡아 가두고 그 후 전주에 입성하여 부패한 관리 처벌, 노비의 해방 등 폐정개혁안 12개 조목을 실천하기로 약속받고 진정하였으나 조정의 약속은 끝내 이행되지 않았고 (오늘날, 부패한 권력이 국민에게 물 먹이는 경우와 같이) 나라의 정세는 더욱 어지러워져서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우리 나라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자 12만 명의 농민군을 지휘, 손병희의 10만 군사와 함께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동학 농민군은 한때는 중·남부 전지역과 함경남도, 평안남도까지 세력을 폈으나 공주. 금구 전투에서 대패한 후 순창으로 잠적, 재기를 꾀하다가 순창군淳昌郡 避老里 <피노리>란 곳에서 그 휘하의 밀고로 붙잡혀, 1895년 3월 처형되었다 민요 파랑새와 전봉준에 얽힌 이야기로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이 민요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 說이 있지만, 그 중에 일반적인 것은 동학농민운동과 관계가 깊은 내용이란 거 녹두꽃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청포장수는 民衆을 의미한다고 보는 설이 일반적 견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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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기사중에 나온 전봉준 장군이 남긴 최후의 시가 가슴을 적신다



   " 때가 오매 천지가 모두 힘을 합했는데(時來天地皆同力)

운이 다했으니 영웅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르겠구나.(運去英雄不自謀)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세운 것이 무슨 허물이겠나.(愛民正義我無失)

나라 위한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겠는가.(爲國丹心誰有知)”




경향신문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 2차 봉기에 나섰다가 패한 전봉준 장군(1854~1895)은

전북 순창군 상치면 피노리에 이르렀다.

동지인 김개남 장군이 은신해 있다는 태인으로 가는 도중에 옛 친구인 김경천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김경천은 원래 전봉준의 부하였다가 농민군이 대패한 이후 피노리에 피신중이었다.

당시 조정은 전봉준의 목에 현상금을 걸어놓고 있었다. 원하면 군수 자리까지 준다는 매혹적인 조건이었다.

천금의 현상금에 눈이 먼 김경천은 이웃인 한신현에게 밀고했다.

한신현은 김영철·정창욱 등 마을 사람들과 전봉준이 쉬고 있던 주막을 포위했다.

전봉준이 위기를 감지하고 담을 넘어 도망가려 했지만 젊은이들(혹은 관군)이 내리친 몽둥이에 맞아 체포됐다.

김경천의 배신과 관련해서는 여러 후일담이 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전봉준이 일찍이 점을 쳤는데, “백만대군의 우두머리가 되어 이름을 떨치지만 경천을 조심하라”는

점궤가 나왔다는것이다. 충청도에 경천(京川)이라는 시내가 있었다. 전봉준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뒤 남하하면서

그 경천이라는 시내를 무사히 넘었다. 그랬으니 이제 불길한 일은 없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정작 점쟁이가 조심하라는 경천은 시냇가가 아니었다. 친구인 김경천이었다는 것이다.

어쨌던 전봉준을 밀고한 이들은 큰 상을 받았다. 한신현은 금천 군수에 제수됐음을 물론이고 상금 1000냥을 받았다.

정창욱을 비롯한 마을사람들도 100~200냥씩 받았다. 그러나 밀고한 김경천의 몫은 없었다.

군수자리는커녕 서당을 전전하는 등 떠돌다가 굶어죽었다.

전봉준 장군을 밀고한 대가를 톡톡히 치룬 것이다.




■전봉준은 첫 사형선고의 희생양

체포된 전봉준은 순창을 거쳐 담양에서 2박3일간 심문을 받은 뒤 일본군에 인계됐다.

12월18일 일본 영사관 감옥에 수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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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정읍 옹동면 비봉산 자락에서 발견된 ‘장군천안전공지묘’ 비석.


이곳이 전봉준 장군의 무덤이 맞는지 발굴작업이 벌어지고 있다.|조광환 동학역사문화연구소장 제공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을 재판한 곳은 법무아문 권설재판소였다. 권설재판소란 어떤 곳인가.

1894년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자 제2차 김홍집 친일내각이 수립됐다.

이때 이노우에 가로우(井上馨) 주한 일본 공사의 도움으로 귀국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서광범이었다.

갑신정변의 주동자였던 서광범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뒤 미국 시민권을 땄다.

미국 이름 ‘케네스 서’였다.

이노우에의 도움으로 돌아온 서광범은 법부대신 겸 판의금부사로 등용됐다.

이듬해 1월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으니 서광범은 이중국적자의 신분으로 조선의 장관이 된 셈이다.

친일내각은 관제개혁을 추진했다.

이때 사법제도 개혁의 기치아래 만든 것이 종전의 의금부를 대신할 법무아문 권설재판소였다.

이 재판소에서 모든 재판 업무를 관장했다. 참수형이 비인도적이라면서 교수형 제도를 채택했다.

그 참에 연좌죄까지 폐지하려 했던 서광범의 계획은 무산됐다.

이렇게 설립된 법무아문 권설재판소가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을 재판했다.

1895년 3월25일(양력 4월 19일) 재판소 구성법이 공포된 지 4일 후인 3월29일 전봉준을 비롯해

손화중, 최경선, 성두한, 김덕명 등이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러니 이른바 근대사법제도가 출범한 이후 내려진 첫 사형선고가 바로

녹두장군 전봉준 등 동학농민지도자들에 대한 교수형 선고였던 것이다.



■변호사는 무슨…

각설하고 서울로 압송당한 전봉준 등에게는 무수한 고문이 가해졌다. 그러나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전봉준 등은 2월 9일(음력)부터 5차례에 걸쳐 일본 영사관에 설치된 재판소에서 심문을 받았다.

2차까지는 조선의 평리원 검사로부터, 3차부터는 일본 영사로부터 각각 심문을 받았다.

전봉준 장군의 재판을 일본인이 맡았다는 것이니 그야말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영사관에 구금됐을 때 몇몇 일본인이 찾아와 회유했다.

“그대의 죄는 일본 법률로 따지만 국사범이다. 그러나 사형까지는 이르지 않을 수도 있다.

마땅히 일본인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재판해보라. 일본 정부의 양해 아래 살길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전봉준은 단칼에 거절했다.

“너희는 나의 원수이고, 나는 너희의 원수가 아니냐. 나를 죽여라.

구차한 삶을 위해 살길을 찾는 것은 내 본뜻이 아니다.

난 죽음을 기다린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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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장군 압송사진. 형형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조병갑의 죄상

전봉준에 대한 5차례에 걸친 심문 내용은 이른바 ‘전봉준 공초’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왜 봉기했는지,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부터 ‘전봉준 공초’를 토대로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 봉기를 알아본다.

전봉준은 우선 왜 봉기했는지를 묻는 재판관의 심문에 이렇게 말한다.

“만석보가 있는데도 그 아래 새로운 보를 쌓아 700석을 착취했다.

또 황무지를 개간해서 농사짓게 한 다음 면세를 약속했다.

그러나 다음 추수 때부터 강제로 세금을 거뒀다. 아비가 태인군수인 것을 내세워 아비의 비각을 세운다면서

1000여 냥을 징수했다. 대동미를 징수할 때 최상품인 정백미를 거두었다가 조정에 바칠 때는

나쁜 쌀로 바꿔 차액을 횡령했다.

불효·불복(不睦·화목하지 않음)한다는 황당한 죄목으로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한 액수가 2만냥이 넘는다.

이것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죄상이다.”

고부는 전라도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곡창지대였다. 그러다보니 부임해오는 관리마다 토색질이 극에 달했다.

당시 고부군수였던 조병갑도 마찬가지였다. 조병갑은 당대 세도가였던 조두순의 일족이었다.

전봉준은 “조병갑의 악랄한 쥐어짜기로 백성들이 수탈당했으며,

이것이 결국 민중봉기의 원인이 됐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고부 농민들은 조병갑의 탐학을 견딜 수 없게 되자 진정서를 쓰려 했다.

1893년 12월 그 진정서를 써준 이가 바로 전봉준이었다.

전봉준은 진정서를 써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농민 40여명과 함께 고부군아로 찾아갔다.

그러나 진정서는 묵살됐다. 전봉준은 조병갑을 힘으로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사발통문을 돌리고 수백명의 농민과 함께 고부군 아문을 습격했다.

1894년 2월16일이었다. 조병갑은 담을 뛰어넘어 도망갔다. 전봉준은 농민군 지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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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장군이 친구의 밀고로 붙잡힌 전북 순창군 상치면 피노리.



■난 수탈당할 것도 없다

1차 심문에서 재판관은 미묘한 질문을 했다.

“고부군 백성들이 모두 수탈 당했다는데 너(전봉준)만 홀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했다.

그게 의아스럽구나.”

그러자 전봉준의 진술이 간단명료했다.

“나는 아침 저녁을 모두 죽으로 연명해왔다. 그런 내가 수탈 당할 게 있었겠는가.”

맞는 말이었다. 전봉준은 그 유명한 곡창지대인 고부에서도 단 3마지기(3두락)의 농사밖에

짓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했던 전봉준이 어떻게 농민군 지도자가 되었을까.

재판관 역시 “백성들이 왜 주모자로 널 추대했느냐”고 물었다. 전봉준의 대답은 역시 분명했다.

“백성들 수천명이 나의 집 근처에 모였으니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글을 모르는 어리석은 농민들이었는데, 나는 다소나마 글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서당 훈장이던 아버지(전창혁 혹은 전형호)에게서 글을 배운 전봉준은

13살 때 ‘백구(白鷗)’ 시를 지어 고을 사람들을 감탄시켰다.

훗날 마을 아이들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아동용 교재)을 가르쳐 주었다.

전봉준은 고을사람들에게 신망을 쌓으면서 은인자중, 때를 기다렸다.

5척 단구의 몸이 마치 녹두 같다 해서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랬으니 거사하기도 전에 전라도에는 재미있는 동요들이 퍼졌다.

“새야 새야 녹두새야/웃녁 새야 아랫녁 새야/전주 고부 녹두새야/함박쪽박 열나무 딱딱 후여.”

“새야 새야 파랑새야/녹두밭에 앉지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전봉준은 당시 “창과 칼을 맞지 않고, 총구멍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재주가 있다”는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왜적과 오랑캐, 권문세가를 몰아내자

재판관은 이어 ‘거병 당시 동학교도가 많았는지, 동학교도가 많았는지’를 추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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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장군이 돌린 사발통문.|정부기록보존소


그러자 전봉준은 “동학교도와 주민이 함께 어울렸지만 동학교도는 적었고 주민이 많았다”고 진술했다.

전봉준의 지휘아래 봉기한 농민군은 무기를 탈취한 뒤 탐학한 지역관리들을 포박·문초하고

창고에 쌓인 곡식을 주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원한의 대상이던 만석보의 신보(새로운 보)도 허물었다.

봉기 사실을 보고받은 조정은 조병갑을 파면하고,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사태수습를 위한 임시직)로

파견했다.

농민군도 이용태의 수습책을 믿고 자진해산했다. 그러나 이용태는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는 자였다.

병을 빙자해서 한달동안이나 부임하지 않다가 겨우 고부에 와서는 봉기에 가담한 농민과 동학군을 구금하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전봉준은 동료인 김개남·손화중과 상의하여 본격적인 거병에 나섰다.

1894년 3월 하순(음력) 동학농민군을 백산(고부군 북쪽의 구릉)에 집결하도록 명했다.

8000여 명이 모였다. 전봉준은 거사의 대의를 밝혔다.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충·효를 다해 제세안민할 것,

왜적과 오랑캐를 쫓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병사들을 서울로 몰아 권문귀족(權貴)을 몰아낼 것.”

전봉준이 돌린 사발통문의 내용은 봉기의 진정한 의미를 가늠할 수 있다.

“모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하는 것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한다.

주저하지 말고 모두 일어나라.”

농민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한 달만에 전주성을 함락하는 등 호남 일대를 석권했다.

그러나 소총와 죽창만으로 장기전은 어려웠다. 때마침 조정이 파견한 초토사 홍계훈의 반격과 회유책에 전의를 잃어갔다.

게다가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도착하고, 일본 역시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상륙하는 등

정세가 급변했다.

농민군은 할 수 없이 ‘탐관오리를 계속 처벌하고, 폐정(弊政)의 시정을 약속한다’는 등의 다짐을 받고

전주성에서 철수했다.



■일본놈들이 경복궁에 쳐들어와



그렇지만 농민군은 다시 일어선다. 1894년 9월 18일 시작된 제2차 봉기이다.

전봉준의 공초를 보면 다시 기병한 이유가 정확하게 나와있다.

재판관=다시 거병한 이유가 무엇인가.

전봉준=네 나라 놈들이(일본)…군대를 도성에 끌어들여 야반에 왕궁을 격파하여 주상(고종)을 놀라게 했으므로…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백성들이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의병을 규합해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전봉준은 7월23일 경복궁을 공격함으로써 청일전쟁을 일으킨 것 때문에 거병했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해 9월 18일 김개남·최경선·손화중 등과 함께 거병한 농민군의 수는 10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 연합군의 막강한 화력에 막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하고 만다.

전봉준은 당시 일본군과 연합한 관군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호소한다.

“조선 사람과 싸우자는 것이 아닌데 이렇게 골육상잔하다니 어찌 애달프지 않으리오.

같이 척왜척화하여 조선이 왜국이 되지 않게 하고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전봉준의 호소 이후 불과 20년도 안되어 거짓말처럼 조선이 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통상하는 외국인은 해치지 않는다

전봉준은 보국안민(輔國安民·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일본과 서양세력을 배척한다)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러나 맹목적인 배척은 아니었다. 전봉준의 공초에 나타나 있다.

재판관=일본군과 서울에 주재한 모든 외국인을 몰아내려 했는가.

전봉준=아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단지 통상을 할 뿐이지만 왜인들은 서울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것은 우리의 영토를 침략하는 것이라 의심했다.

전봉준은 일본을 제외한 외국과의 통상을 긍정적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안목이 결코 좁지 않았음을 웅변해주는 대목이다.

재판관은 또한 동학의 2세 교주인 최시형와의 관계를 물었다.

재판관=2차 봉기 때 최시형과 상의했는가.

전봉준=아니다.

재판관=최시형은 동학의 괴수인데 동학당을 규합하면서 왜 의논하지 않았나.

전봉준=충의는 각자의 본심에서 나온다. 왜 최법헌(시형)과 의논하겠는가.

동학 내에서 전봉준의 확고한 위치를 일러주는 대목이다.

당시 최시형은 제2차 봉기에 반대하여 황해도로 가버렸다.

손병희·손천민 등이 전봉준의 요청에 따라 농민군에 합세했다.



■서광범이 판결한 전봉준 사형

1895년 3월 29일(음력)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 등 농민군 지도자에 대한

선고재판이 열렸다.

법무아문 대신 서광범, 협판 이재정, 참의 정박, 주가 김기조·오용묵, 그리고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의 이름이 제37호 판결문에 등장한다.

전봉준에게 사형을 선고한 이는 법무아문 대신 서광범이었다.

재판은 피고인 한사람씩 법정에 들어와 선고를 받고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성두한의 뒤가 전봉준 차례였다.

“<대전회통> ‘형전’ 중 ‘군복을 입고 말을 탄채 관문에서 변란을 일으킨 자는

즉시 사형한다(軍服騎馬作變官門者不待侍斬)’는 조항에 따라 처형한다.

이상의 이유로 전봉준을 사형에 처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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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 전봉준을 ‘부대시 사형에 처한다’는 판결문.


서광범 법무아문 대신과 협판 이재정, 참의 장박, 주사 김기필· 오용묵,

그리고 회심으로 경성 주재 일본 영사 우치다의 이름이 서명돼있다.|정부기록보존소





전봉준은 차분한 목소리로 최후진술을 했다.

“정부의 명이라면 한 번 죽는 거이 굳이 아까울 것 없다. 삼가 목숨을 바치겠다.”

재판부가 선고문 내용을 부연설명하자 전봉준이 대꾸했다.

“나는 바른 길을 걷다가 죽는 사람인데 대역죄를 적용한 것은 실로 천고의 유감이다.”

전봉준 뿐 아니라 손화중 역시 “백성을 위해 힘을 다한 것인데 어찌 사형에 처하느냐”고 질타했다.

최경선은 아무 말없이 활달한 걸음으로 법정을 떠났다.



■세상을 놀라게 한 대위인·대영걸

“사형을 선고받으면 대개 정신이 혼비백산하고 사지가 떨리는 법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선사람은 배짱이 좋다.

동학의 거두를 자임하는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더한) 같은 사람은 매우 대담했다.”

당시 재판을 지켜봤던 일본의 <시사신보> 서울 특파원(다카미 가메·高見龜)의 소감이다.

고문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전봉준은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관아의 서리(衙吏)가 안고 사형장으로 갔다.

다음날 새벽 2시 손화중·최경선·김덕명·성두한 등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다.

전봉준의 나이 41살 때의 일이다. 가족에게 남길 말을 묻자 전봉준은 “다른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리라”고 했다.

“어찌 이 깜깜한 적굴에서 암연히 죽이느냐”고도 했다.

교수형 집행 당시 총순(판임관)을 맡았던 강 모(謀)는 전봉준의 됨됨이를 이렇게 전했다.

“전봉준이 잡혀올 때부터 형을 받을 때까지 죽 지켜봤다. 풍문으로 듣던 말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느낌이었다.

외모부터 천인만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청수(淸秀)한 얼굴과 정채있는 아미(眉目·눈썹과 눈),

엄정한 기상, 강장(强壯)한 심지(心志)는 과연 세상을 한번 놀라게할만한 대위인·대영걸로 보였다.”

전봉준은 즉흥시 ‘운명(殞命)’을 읊었다.

“때가 오매 천지가 모두 힘을 합했는데(時來天地皆同力)/

운이 다했으니 영웅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르겠구나.(運去英雄不自謀)/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세운 것이 무슨 허물이겠나.(愛民正義我無失)/

나라 위한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겠는가.(爲國丹心誰有知)”



■‘장군천안전공지묘’의 출현

전봉준의 시신은 어찌 되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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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장군 등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을 주재한 서광범 법무아문 대신


그러던 전봉준이 사형 당한지(1895년 음력 3월30일) 118년 뒤인 2013년 8월,

조광환 동학역사문화연구소장(학산중 교사)에게 제보가 들어왔다.

전북 정읍시 <옹동면지> 편찬을 위해 현장 조사 중이던 정승룡·김현수씨가

옹동면 비봉리 수암마을 주민(김상섭씨·72)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즉 인근 비봉산 자락에 1m 남짓되는 크기의 화강암 비석이 있는데,

바로 ‘장군천안공지묘(將軍天安全公之墓)’라 새겨졌다는 것이었다.

전봉준 장군은 ‘천안 전씨’였다.

이 제보를 받은 조광환씨는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서울에서 교수형을 당한 장군의 시신이 이곳 정읍까지 와서 묻힐 리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뭔가 확인해볼 필요는 있다고 여겨 현장을 답사했다. 최초 제보자인 김상섭씨가 동행했다.

“과연 장군천안전공지묘비가 있었고,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묘가 1기 있었어요.”(조광환씨)

김상섭씨의 증언으로는 이 묘가 어렸을 때부터 있었고, 봉분이 없는 평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묘를 관리하는 익산 이씨 가문이 훗날 봉분을 얹었다고 한다.

김상섭씨는 어렸을 때부터 이 무덤이 전봉준 장군의 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송정수 전북대 교수에 따르면 익산 이씨는 예전에 전봉준 장군의 가문인 천안 전씨와 사돈을 맺은 집안이었다.

익산 이씨가 전봉준 장군의 제사를 지냈던 이유는 나름 충분하다.

만약 이 무덤이 전봉준 장군의 것이라면 누가, 언제, 어떻게 매장했다는 것인가.

사실 전봉준 장군이 처형 당한 뒤에도 자녀들은 정읍에서 살고 있었다.

장군의 장녀인 전옥례씨(1970년 별세)는 김개남 장군의 중매로 혼인했는데,

김개남의 고택 바로 옆에 살았다고 한다.

‘장군천안전공지묘’의 무덤이 있는 곳은 전옥례씨가 살았던 곳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맏딸인 전옥례씨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서 매장하는데 간여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봉준 장군의 머리를 수습해서 매장했던 인물이 기록에 나온다.


여성가사작가인 소고당 고단(1922~2009)의 가사집에 실린 ‘동학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가사는 조장태라는 인물이 전봉준 장군의 머리를 수습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교수대의 이슬되니…조장태의 거동보소. 녹두장군 잘린 머리 부담 안에 담아오니

장군 소실 고부댁이 동곡 뒷단 장사하고….”

여기서 ‘장군의 소실 고부댁’은 장군의 후처인 여산 송씨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후처인 여산 송씨와 맏딸인 전옥례, 그리고 조장태라는 인물 등…. 그럴듯한 가사내용이 아닐 수 없다.

가사에는 장군의 처형 이후 가족의 행적을 매우 소상하게 노래하고 있다.



■장군의 무덤은 발굴중

그렇다면 교수형 당했다는 장군의 머리는 왜 잘렸다는 것인가.

송정수 교수는 “아마도 교수형을 당한 장군의 시신은 일단 가묘에 묻혔다가

훗날 묘비가 있는 이곳으로 이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유골을 이장할 때의 모습이 마치 효수된 머리만 남은 것으로 착각해서 ‘잘린 머리’ 운운했다는 것이다.

지금 ‘장군천안전공지묘비’가 발견된 곳에서 발굴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전봉준장군기념사업회가 발굴기관(전라문화유산연구원)에 본격적인 조사를 의뢰한 것이다.

발굴결과는 11월 중 발표될 것이다. 한번 주의깊에 기다려 볼 일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이 전봉준 장군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떻든 이번 기회에 전봉준 장군의 최후 모습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참고자료>

조광환, <전봉준과 동학혁명>, 살림터, 2014

임태섭, ‘전봉준의 공초연구’, 전주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1

정부기록보존소, <동학관련판결문집>, 총무처, 1994

최현식, ‘전봉준 가묘의 수수께끼’, <정읍문화> 제16호, 정읍문화원, 2007

오지영, <동학사>, 박영사, 1990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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