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 년 전에서 2천 년 전 사이에 기록된 기독교 성서는 문자적으로 온 인류에게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더욱이 절대적인 권위도 될 수 없다. 성서는 138억 년의 우주 이야기에 기초하여 엄격하게 신중하게 정직하게 여과시켜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과 무관한 이야기가 될뿐만 아니라 더욱 위험한 일은 성서의 문자적 왜곡이 인류사회에 절망과 분열과 파멸을 초래한다. 적어도 지난 1700년 동안 전 세계는 성서의 폭력으로 인종차별, 종교차별, 성차별, 성적본능차별, 빈부차별, 계급차별, 생태계파괴가 정당화되었다. 이것때문에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은 하찮은 것이 되었고, 사람들은 자율성과 창조성을 상실한체 생기가 없는 지루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성서 구절들이 소위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명분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다른 사람들의 존엄성을 폄하하고, 명예를 훼손하고, 인간이 살아 갈 권리를 박탈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비상식적인 악행들을 정당화했다. 기독교가 세계사를 장악하던 시대는 종교적 독선의 선을 넘어 종교적 박해로 나타났다. 불행하게도 오늘도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왜곡하여 악용함으로써 성서의 무서운 구절들로 저지르는 만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여섯 명의 장님과 코끼리에 대한 고대 인도의 이야기다. 여섯 명의 장님이 코끼리에 다가갔다. 첫번째 사람이 코끼리의 몸을 더듬고 큰 소리로, ‘신께서 나를 축복해 주신다. 코끼리는 벽처럼 생겼다.’ 두번째 사람이 코끼리의 뿔을 만지더니, ‘나는 확신한다. 코끼리는 창처럼 생겼다.’ 세번째 사람이 코끼리의 귀를 만지고는, ‘내 말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코끼리는 부채를 닯았다.’ 코끼리의 코를 잡고 있는 네번째사람은, ‘너희들은 모두 바보야! 코끼리는 길고 굵은 뱀과도 같다.’ 다섯번째 사람이 코끼리 다리를 붙잡고는, ‘너희들 모두 미쳤어. 내가 잡고 있는 견고한 코끼리는 나무기둥 모양이다.’ 코끼리 뒤에서 꼬리를 잡고 있던 여섯번째 사람은 큰소리로 ‘코끼리는 그렇게 큰 동물이 아니다. 코끼리는 가느다란 밧줄과 같다.’
이 여섯 사람은 서로 자신의 진리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면서 장시간을 소리소리 지르면서 입씨름을 벌렸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옳지 않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신약성서의 복음서 저자들의 원초적인 의도는 예수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그의 신성을 강조하려고 자연의 법칙이 깨어지는 기적적인 치유(healing)나 치료(curing)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삶의 모습에서 ‘우주적인 진리’란 무엇인지를 밝히려고 했다. 또한 자신들이 유대교의 뿌리에서 벗어나기 보다는 유대교에 기초하여 새로운 종교적인 길을 찾으려고 했다. 아마도 그들은 유대교의 종교 개혁가들이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복음서 저자들의 공동체는 개방적인 반면에 주류 종교체계는 폐쇄적이었다. 다시 말해 한 그룹은 포용적이었는데 또다른 그룹은 강박 관념적이었다. 한 그룹은 진리에 대해서 보다 폭넓게 이해했는데, 또다른 그룹은 진리에 대해서 대단히 편협적으로 이해했다.
예수가 죽은 후, 교회가 생겨나고, 세상에서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기독교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1세기 말까지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유대교 전통을 지키면서 회당에 소속했고 종교의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우주적인 신앙이 회당 안에서 부족적인 신앙과 공존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유대교와 기독교로 분리되었다. 유대교가 기독교인들을 추방하고 박해하고 처형했다는 소문은 근거가 없는 말이다. 물론 일부 비열한 유대인들이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탄압하기는 했지만, 역사적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기독교인들을 탄압한 원흉은 로마제국이었지 유대교가 아니었다.
예수는 유대교를 배반하지 않았다. 다만 예수는 유대교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로마제국의 폭력적인 불의에 항거하여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자신의 비전이었다. 초기의 예수공동체들은 예수의 비전을 완성하려고 예수 운동 즉 하느님 나라 운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정신과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는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반유대교 정서(anti-Semitism)가 기독교 안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십자군 원정과 세계 1차 2차 대전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의미없이 생명을 잃었다. 하느님의 진리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어야 한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은 불가능하며, 폭력이 개입된 하느님의 진리는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원초적으로 복음서들의 핵심은 초자연적인 기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적용할 수 있는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것이다. 성서에 많은 기적 이야기들은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가 산 것처럼 하느님의 의미를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경험할 수 있으며, 삶의 희망과 용기을 잃지 않고,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기쁘게 의미있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의 목적은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인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하느님의 진리를 탐구하고 깨닫고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어느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고, 나의 진리만이 옳고 정통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절대적인 진리를 고집하는 것은 인류 사회의 분열과 혼돈을 초래하기 때문에 통합과 평화에 위험한 장애물이다. 진리는 한 자리에 고정되면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썩기 때문에 흐르는 물처럼 신선하게 앞으로 전진해 간다. 진리는 시대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되고 성숙해지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진리를 탐구하는 여정에서 스스로에게 묻고 다짐해야 하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진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것인지, 폭력과 저주가 될 것인지를 솔직하게 생각해야 한다. 또한 내가 추구하는 진리는 세상 속에서 연민의 사랑과 포용과 이해로 넓힐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다른 사람들을 이분법적으로 정죄하고 심판하면서 진리를 편견으로 좁힐 것인지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진실한 기독교인이다.
성서는 수없이 많은 신학자들과 성서학자들에 의해서 수없이 많이 해석되어 왔다. 부정적인 해석과 긍정적인 해석들이 서로 맞부딪치면서 논쟁해왔다. 따라서 기독교 교회가 보수와 진보로 크게 분리되었다. 이것은 신앙의 여정에서 진리의 탐구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고 가르친 예수의 뜻은, 하느님의 진리는 심판이나 정죄나 징벌이 아니라, 우주적인 축복과 사랑과 구원을 뜻한다. 하느님의 진리는 기독교의 독점물이 아니라, 누구나 깨달을 수 있고, 누구나 눈을 뜨고 세상을 새롭게 보면 더욱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길이다.
오늘 우리는 복합문화(multicultural)와 복합신앙(multifaith)이 어울리는 상호의존관계문화(Inter-cultural)라는 다원주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개체들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내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이다. 사도바울의 말이 예수의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갈 3:28) 이 말의 뜻은 부족적인 교회들이 주장하듯이 모든 인류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함을 환영하면서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이다.
우주적이고 궁극적인 진리를 탐구하고 온전한 참 인간이 되려는 종교인이라면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힌두교인이든 회교도인이든 자신이 추구하는 진리가 이분법적으로 누구에게는 축복이 되고, 누구에게는 심판과 징벌이 되어서는 안된다. 기독교의 진리는 다른 종교인들을 개종시키거나 추방하거나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과 회교도인들과 불교인들과 힌두교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모든 인류에게 우주적으로 축복이 되는 것이다. 나와 우리만 행복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축복을 바라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폭력에 불과하다. 예수가 깨달은 하느님의 진리는 종교와 인종과 문화를 넘어서 모든 인류가 공평하게 축복과 사랑을 누리는 것이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