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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선생님께 드리는 공개편지 |
작성자 강현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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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번호 1229 |
작성일 2009-03-20 13:30 |
조회수 1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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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오랜 만 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1999 년 캘거리대학교에서 있었던 3.1 절 기념행사 때 뵙고 처음인 듯 합니다. 참고로 선생님에 대한 이 공개편지는 씨엔드림 과 열린마당에 같이 올림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분들이 선생님처럼 시를 쓰는 분들입니다. 사실 저는 취향도 능력도 아니라고 생각해 시를 쓰려고 노력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시평 같은 것을 쓸 자신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시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제 정서 구조 안에 제대로 마련돼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제 스스로의 모자람 때문인지 씨엔드림이나 열린마당 같은 곳에 올라오는 시들을 접하면 항상 주눅이 드는 마음으로 겸손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한 수 한 수를 음미하고 있습니다. 물론 댓글 같은 것은 차마 달 엄두도 못 내고 있구요.
아주 옛날에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두 읽었을 ‘나그네’라는 시를 읽고 이런 생각을 한 적은 있습니다. 당시 태평양전쟁 발발로 강제공출이 심해져 죽 끓여먹을 곡식조차 절대 부족하던 시기에 썼을 그 시에서 ‘술 익는 마을 마다 타는 저녁 놀’ 이라는 대목을 접하고, ‘아마 시인께서는 일제강점기 말기의 처참한 농촌마을의 현실을 접하시고 실성을 하셨던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어제 ‘순수문학작가회의’에 소속된 어느 시인 한 분이 ‘나그네’에 대해 새롭게 평론해 놓은 것을 보고 아, 다르게 보면 이렇게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분이 시인이라 시적으로 평론을 한 것인지, 아니면 시인답지 않게 말주변이 없어서 횡설수설을 한 것인지가 잘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로 그 글이 ‘주장하는 바’를 파악하기가 난해했는데 대충 이런 내용인 것 같았습니다.
“체념과 달관의 경지에 들어선 시인께서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현실 속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나그네처럼 훨훨 길을 떠나야만 살 수 있었다”
그 버렸다는 모든 것 중에 ‘놓아 버린 정신’도 포함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명품’ 시를 쓸만한 어떤 정서적 경지에 들어서 있으면 보통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사고현상이 일어날 수 있고 이런 사고현상에서 나온 형이상학적인 표현이나 고백을 사회과학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고 비판하는 것은 경솔한 행동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사회적인 주제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토를 달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의견이든 일단 존중해야 하고 이런 상호 존중과 예의를 바탕으로 상대방 의견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토론을 제의하는 행위 역시 정당한 자기 의사 발표 행위일 것 입니다. 이런 식의 문제제기를 하다 보면 표현 상 다소 무례한 점이 노정될 수도 있음도 서로 이해해야 할 것 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문학인이시니 만큼 조롱과 속된 표현 역시 토론의 고비에서 필요한 소통수단의 한 장르로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소통은 단지 긍정적인 상호 이해만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서로간의 자극과 압력을 통해 현상을 이해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치-사회-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심각하게 존재하는 견해를 발표하셨다면 거기에 대해서 응당 같은 정도의 ‘심각한 반응’ 역시 각오하셨을 것이라고 봅니다.
‘노무현 과 조지 부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저는 이야기의 시작을 문학적으로 해야 할 지 사회과학적으로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야기 시작하기 전에 우선 한 가지 잘 모르시는 것 같아 알려드리고 싶은 대목이 있습니다. 노무현 씨는 '돌대가리'가 아니라는 점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노무현 씨를 지지하지도 않고, 어떤 경험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다만 1989 년 부산교육대 그리고 바로 이어져 터진 동의대 사태 때 부산에 내려가 약 1 주일 간 그의 일 처리 모습과 논의구조 안에서 즉각 즉각 정확하게 대꾸하는 토론 능력 등을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사례 하나 들까요? 2 년 전 아프칸 인질사건 기억 하시지요. 그들을 구출한 생명의 은인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미국의 침략전쟁을 규탄하고 보수기독교의 공격적 선교행위를 질타한 절대다수 한국민들의 여론이고 또 하나는 이런 여론을 뒷배 삼아 면밀하면서도 대담한 협상작전을 밀고 나갔던, 그래도 지금의 한나라당 정권따위와는 그 질과 격이 달랐던 당시 정부였습니다. 이런 점들이 탈레반으로 하여금 종래의 공격적 선교행위를 적대행위로 간주하고 군사작전의 시각에서 인질들을 처리하려던 입장을 바꾸어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게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고 봅니다.
2004 년 탄핵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자기들 보다 모자라야 마땅한 이 상고출신이 자기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똑똑하고 깊은 사고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발견한 나머지 꼭지가 돈 대한민국 기득권 서클의 거센 압력 때문이었지요. 대한민국 기득권 세력의 비겁함과 천박함은 미네르바 사태 때 아주 판에 박은 듯이 그대로 재연됐습니다.
그를 탄핵했다는 자실 자체 만으로도 대한민국 기득권 서클은 그가 돌대가리가 아님을 확실히 인정한 셈이지요. 만인이 인정하는 천하의 돌대가리는 현재 효자동에 하나 상도동에 하나 해서 모두 둘씩이나 서울에 살고 있으니 따로 돌대가리를 구하러 굳이 그 멀리 김해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돌대가리 이야기는 이쯤 하겠습니다. 그보다도 제가 정작 놀라서 이 무례한 공개편지를 쓰는 이유는 시가 아닌 댓글에서 선생님께서 이런 표현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조지 부시는 자국민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양심에 한 점 부끄럼 없는 정치를 했기에 그 많은 사람을 죽이고 세계경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아도 떳떳하게 대중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발언에 대해서는 저나 다른 분들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선생님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습니다.
일상을 깨서 죄송한 데 ‘양심에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부시 정치론’에 대한 선생님의 ‘공인으로서의’ 부연설명을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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