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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뺏겼다
작성자 심심해     게시물번호 15879 작성일 2022-03-18 04:24 조회수 2981

나는 장거리 트럭 운전사다. 짧게는 일주일, 길 땐 5주 정도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집에 와서 며칠 쉰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노닥거리는게 나의 최대 행복이다.

 

올 초에 아내가 취직했다. 집 근처에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리타이어먼트 센터에 파트타임으로 일한다고 했다. 두 주에 30여시간 일한단다. 일주일에 이삼일 정도 아침 일찍 출근해서 두세시 정도에 퇴근한다고 했다. 업무는 레지던트 아침 및 점심식사 서빙과 그 뒷처리란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내는 한 주에 6일동안 일했다. 그런데 7일째 또 나와달라는 메시지가 메니저로부터 왔다. 내가 못가게 했다. 파트타임이라며… 뭔 파트타임이 일주일에 칠일을 출근한다냐?

 

어떤 날은 아침에 나가고 또 어떤 날은 점심 이후에 나가서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서 돌아온다. 집에서는 액셀로 뭔가 서류작업을 하고 있다. 뭐하냐 물어보니,

 

'어, 직원 교육자료. 매니저가 달래. 그리고 내가 신입 한명 내일부터 가르쳐야 해.'

 

'??? 거기 일 시작한지 한달됐잖아. 근데 뭔 교육을 시켜? 그리고 교육자료를 왜 자기가 만들어???'

 

'그렇게 됐어.'

 

아내와 식사를 하며 혹은 아내가 내 머리를 깍아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막을 알게 되었다.

 

서구인들의 아침식사는 참 복잡하다. 빵은 화이트 혹은 브라운, 빵을 구을지 말지, 음료는 오렌지 주스 혹은 애플 주스 혹은 밀크, 계란은 삶을건지 후라이할건지, 후라이는 서니사이드업인지 이지오번지, 또 잼은 어떤걸 할건지, 베이컨은 몇개나 먹을지 조합이 무지 많다.

 

아내는 아침에 수십명의 레지던트로 부터 이런 주문을 받아서 메모하여 주방의 쿡에게 전달하고 조리가 되면 음식을 서빙해야 한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아내가 꾀를 냈다. 각 개개인별로 선호하는 아침 스타일의 변화가 별로 없다는 사실로부터 시간을 대폭 절약하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집에 와서 개개인의 이름 하에 아침 주문을 미리 프린트하여 출근한 것이다. 그래서 주문받는데 잡아먹는 시간을 대폭 줄였다.

 

개발새발 휘갈겨진 주문지를 상대하던 쿡들이 최첨단 프린트아웃된 아내의 주문지를 받아들고 뒤집어졌다. 아내는 서류작업을 통해 레지던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샐리, 오늘도 어제랑 같은거?'

'매리, 오늘은 어쩐일로 우유대신 사과주스를 원하니?'

 

이렇게 응대하니 레지던트들이 아내만 보면 하하호호 좋아한단다.

 

아내는 이렇게 절약된 시간에 놀고있진 않을 거였다. 아마 다른 사람들 몫까지 일할 거다. 틀림없다. 나는 아내와 사내연애했고 사내결혼했고 결혼후에도 대부분의 기간 같은 직장 같은 부서에서 일했었다. 그래서 잘 안다. 아내는 다른 사람들이 일할 때, 자기 일이 끝났다고 손놓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같이 일하는 동료로부터도 사랑받고 있겠지.

 

아내가 엑셀로 만든 시스템이 내부 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아직 교육을 받고 있을 상태의 아내가 다른 사람을 교육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맙소사…

 

언젠가 하루는 저녁 스텝이 빵꾸나서 아내가 대타를 처음으로 뛰었다. 이 때는 서빙이 아니고 일종의 주방 보조였다. 다음날 서빙될 디저트 푸딩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푸딩 플라워에 우유를 9L 부어 잘 저은 후 어쩌구 저쩌구 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아내는 두 개의 4L 짜리 우유통을 플라워에 냅다 들이부었다. 쿡을 포함한 주방 스텝들이 깜짝 놀랐다.

 

'계량컵 써야지 그러면 어떻게!'

 

아내는 수학과 나온 여자다. 황당했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해줬다.

 

'이거 4L 통 두 개. 8L 들어갔고 1L만 계량컵 써서 넣으면 되잖아.'

 

쿡과 스텝들의 눈이 새로운 깨달음으로 땡그래졌다.

 

이틀 후 출근한 아내는 뒤집어진 매니저와 쿡과 주방 스텝을 상대해야 했다. 매니저가 입이 귀에 걸린채 물어봤다.

 

'너 도대체 푸딩에 무슨짓을 한거니? 레지던트들이 맛있다고 또 해달라고 아주 그냥 난리도 아니였어.'

 

이거 나조차도 믿어야 할지 의심이 되는 일화였다. 해서 나도 아내에게 물어봤다.

 

'그래서 그 푸딩에 무슨짓을 한건데?'

'나 진짜 아무짓도 안했어. 잠깐…'

 

아내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며 번뜩 무언가를 생각해냈다.

 

'내생각에 그 계량컵이 뭔가 수상쩍어.'

 

여튼 그래서 아내는 이주일에 30여시간 일하기로 한 오전 파트타임 일을 잡았는데 오전 서빙팀은 물론, 오후 주방팀에서도 에이스가 되어서 일주일에 심하면 칠일을 아침저녁으로 불려다니며 혹사당하고 있다. 난 집에 와도 이제 같이 놀 사람이 없다.

 

나는 장거리 트럭 운전사다. 짧게는 일주일, 길 땐 5주 정도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집에 와서 며칠 쉰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노닥거리는게 나의 최대 행복이다.

 

그런데 아내를 뺏겼다. 심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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往十里  |  2022-03-1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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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기분 좋게 웃었습니다.
아주 산뜻하고 경쾌한 장편(掌篇)같은 한 꼭지의 수필을 읽었네요.
머리글을 반복한 마무리에서는 이마를 탁 치게 하는 화룡점정의 재치를 봅니다.
아름답게 사시는 부부시네요. 글 잘 보고 갑니다. ^^ 다음 글도 기대합니다.

카사블랑카  |  2022-03-18 12:27         
0     0    

다음 글을 기다리며 추천 누릅니다.

나의길  |  2022-03-18 12:35         
1     0    

너무 재미있엉.
처음부터 마지막투정까지 아내 자랑하느
두분이 너무 행복해보이네요.
아내분이 자랑바아 마땅해 보이네요.

레지던스에서 효율적으로 일하시는 부인모습이 머리속으로 그려집니다.

마치 기분좋은 드라마를 한편 본것처럼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말탄건달  |  2022-03-18 14:39         
1     0    

캘거리에서 사업하며 현재 직원이 15명 정도 되는데 항상 불안합니다.

제대로 믿고 맞길 사람이 없어서죠. 물론 성격 탓도 있겠지만...

예전에는 그런 직원들이 이해가 안됐습니다. 같은실수를 계속하고 가르쳐줘도 학습능력도 배우려는 의지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걸 보며 처음엔 참 답답했는데 언제부턴가 생각이 바꿔더군요.

'그래, 늬들이 그러니 우리같은 이민자도 사업이랍시고 하고 돈을 벌지 니들이 우리처럼 하면 우리가 설 땅이 있겠냐' 는 생각이 들면서 그저 자기자리만 잘 지켜주면 고맙더라구요. 내생각에 한명이면 될일 안되면 두명쓰면 되고 그 두명도 예측 가능하게만 해주면 고맙더라구요, 어차피 나 돈 남으니 한 포션에 두명이던 세명이던 쓰는거니.

낭중지추 라고 어디서 뭘하시던 잘 사실 가족으로 보입니다.

간만에 기분 좋아지는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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