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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혈당 쇼크였다. 죽을 뻔했다.
작성자 외노자     게시물번호 18234 작성일 2024-08-04 00:03 조회수 983

 

아내는 전생을 믿는다. 나는 무신론자지만 아내의 믿음을 존중한다. 그래서 오랜 기간 아내와 살아온 경험으로 나는 아내의 전생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아주아주 먼 옛날에 제다이 기사들을 주축으로 하는 연방군 잔당과 제국군이 전쟁을 벌였다. 여러 태양계를 아우른 이 별들의 전쟁 시기에 아내는 우주에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아내는 두툼한 우주복이 나오는, 외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끔찍히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또 아내는 과거에 굶어 죽은 경험이 확실하게 있다. 왜냐하면 아내는 삼시세끼를 꼭 제시간에 챙겨 먹는 것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내 끼니까지 철저히 챙긴다. 그래서 내가 살을 못 뺀다.

 

한국 여행 할 동안 모종의 이유로 아내와 여러 날 떨어져 지냈다. 아내와 함께라면 절대 할 수 없었던 단식을 실행할 훌륭한 기회였다. 하지만 전술했다시피 훌륭하게 실패했다. 친구들과 만나 먹고 마셔댔다. 또 아내와 아들과 함께 맛집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서 캐나다로 돌아갈 무렵엔 오히려 살이 더 쪘다.

 

캐나다로 돌아와서 단식의 기회는 또 찾아왔다. 나는 몇 주 더 쉰 후 직장에 복귀 하기로 했고 아내와 아들은 바로 출퇴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가 챙겨 준 밥은 최대한 깨작깨작했고, 나 홀로 있을 때는 완전히 음식물 섭취를 중단했다.

 

어느 날 24시간 정도 공복 상태를 유지했다. 아내는 새벽같이 출근했고 아들도 늦잠을 자다가 9시가 넘어서야 직장으로 향했다. 나는 허기진 배를 끌어안으며 유튜브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급격하게 컨디션이 나빠졌다. 온몸의 기운이 빠졌다. 굶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추웠다. 한여름에 추위 때문에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손발이 저리고 차가워졌다. 눈 앞에 오른손을 들어 쳐다보니 가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현기증이 나고 식은땀이 솟았다. 너무 추워서 서모스텟을 조절하여 퍼나스를 켰다. 곧 벤트에서 더운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두터운 오리털 파카를 꺼내 입었다.

 

그 상태로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TV 속 유튜브를 뒤적거렸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우선 힘이라도 내기 위해 뭔가를 먹기로 결정했다.

 

부엌의 팬트리를 뒤져 보니 즉석 퀘이커 오트밀이 눈에 띄었다. 포장지에는 Maple and brown sugar 라고 적혀 있었다. 커다란 머그컵에 내용물을 붓고 큐리그 커피 머신을 사용하여 뜨거운 물을 받았다. 다시 비틀거리며 소파로 돌아왔다.

 

스푼으로 머그컵 속의 내용물을 휘젓는 순간 달큰한 메이플 향이 올라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억제하며 한 스푼 입에 넣었다. 달콤한 설탕 맛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두 번째 스푼을 입에 넣었다. 갑자기 무더위가 확 느껴졌다. 현기증이 사라졌다. 손발 저림도 사라졌다. 내 몸에 대한 엄청난 불안이 갑자기 사라지고 100% 정상적인 상태로,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돌아왔다. 오리털 파카를 벗어 던지고 퍼나스를 꺼버렸다. 그리고 아직 한참 남은 오트밀을 말끔하게 비웠다.

 

매운 맛 진라면을 끓였다. 계란도 풀어 넣었다. 허겁지겁 라면을 조졌다. 이 라면이 참 맛있다. 조선시대에 라면을 가져갔다면 누구라도 인정하는 산해진미의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다. 아마 왕이라 해도 삼시세끼 라면을 진상하라고 명령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맛있는 라면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며 인터넷을 검색했다. 내가 경험한 것은 정확히 저혈당 쇼크였다. 어휴~ 죽을 뻔했다.

 

최근 몇 년간에 걸쳐 체중이 많이 늘었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친구들을 만났을 때, 놈들이 내게 한 얘기도 ‘몸이 불었다’ 와 ‘머리숱이 줄었다’ 였다. 머리숱은 내가 어찌할 방법이 없는데 체중은 노력한다면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소싯적에 담배를 한 순간에 끊은 적이 있다. 그래서 체중 조절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단기간에 체중을 줄이고자 결심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단식일 터였다. 하지만 금연보다 체중 조절이 훨씬 더 어려운 것으로 판명됐다. 금연은 그저 참으면 되는데 단식은 목숨을 걸어야만 한다.

 

제길, 단식에 의한 다이어트는 포기했다.

 

아내와 아들이 직장을 다니고 나는 집에서 논다. 집에서 놀면서 요리를 한다. 규동을 만들고 바베큐를 하며 치킨을 굽는다. 모두 훌륭한 맥주 안주다.

 

오~ 예! 체중은 더더욱 늘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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