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 한인들이 캐나다에 독립운동가 동상을 세우자는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경술국치 100 주년 기념사업 중 하나로 진행하는 행사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동상을 어디에 세우느냐 하는 문제부터 여러 가지 지엽적인 논의사항들이 많지만, 저는 어떤 독립운동가들의 동상을 어떤 형태로 세울 것인가 하는 주제를 가지고 인물선정의 기본원칙에 관한 제 의견을 우선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굳이 동상이 한 인물의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동상일 필요도 없고 조각석상이어도 관계없다고 생각합니다. 좌-우를 막론하고 투쟁시기 당시에 서로 노선차이로 갈등하고 대립하기도 했던 지사 분들의 조각상이나 동상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다면 인물선정과정에서 빚어질지도 모를 동포사회에서의 쓸데없는 갈등을 줄일 수도 있고 보기도 좋을 것 입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다소 편향적인 역사교육을 받아 온 40대 이상의 기성세대에게 당장 떠 오르는 독립운동가를 대 보라고 한다면 거의 대부분이 대한민국임시정부나 한국독립당 인사들을 말 할 것 입니다. 이 세대에 속한 저부터가 마찬가지입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사교육 자체가 이 범주를 벗어난 인사들이 언급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백범 김구 선생 같은 분들은 훌륭한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러나 이 분과 쌍벽을 이루면서 이론적 실천적 비판과 자극을 가해 임정의 일부 조직을 무장투쟁의 한 줄기로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데는, 일찍부터 의열단을 조직해 일본 정규군과 전투를 벌여온 약산 김원봉 선생 같은 분의 공로가 지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원봉은 바로 우당 이회영 선생이 세운 신흥무관학교 출신입니다. 이항복의 11 대 손이기도 한 이회영 선생은 현재 시가로 5 조 원 정도에 해당하는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 가솔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이주 항일무장투쟁과 군사교육에 헌신하다가 중국 대련항 수상경찰서에 끌려들어가 무지막지한 몽둥이질에 맞아 돌아가신 분 입니다.
의열단은 항일무장투쟁의 원류이고 단재 신채호 선생이나 심산 김창숙 선생 같은 분들이 고문으로 계셨던 아주 중요한 항일 독립운동의 핵심조직인데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는 그 조직간부들이 공산주의자였거나 북한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다는 이유로 그 중요성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었습니다. 하긴 단재 신채호 선생 같은 분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미국에 팔아먹으려는, 이완용보다 더 매국노인 이승만을 추대한 임정간부들은 모두 쓰레기 같은 놈들”이라고 일갈하신 바 있으니 그 분의 국적이 회복되지 못하고 당신께서 고문으로 활동한 단체가 대한민국 교과서에서 사라졌던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북한에서 역시 김일성 전 북한주석이 주도했던 동북항일연군 주류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독립운동기록이 사장되거나 과소평가되는 불행을 겪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독립운동을 가장 많이 지원한 세력은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입니다. 특히 장개석은 재정적으로 조선독립운동가들에게 막대한 지원을 했는데 이 장개석의 정보기관이 임정의 김구와 무장투쟁의 김원봉을 조선독립의 두 축으로 보고 거의 비슷한 재정적 지원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특히 이봉창 열사의 히로히토 저격 미수사건과 윤봉길 열사의 상해 홍구공원(지금은 노신공원)폭탄 투척사건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조선독립운동을 다시 보고 임정으로 엄청난 자금지원을 하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는데 바로 임정 일부 조직의 무장투쟁으로의 노선전환이야말로 무장투쟁의 원류인 의열단 노선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40대 이상의 기성세대는 3.1 운동에 대해서 역시 왜곡된 교육을 받았습니다. 70 년대의 역사교과서는 3.1 운동에 대해 이런 식으로 기술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일본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하고 그것이 3.1 운동으로 연결됐는데, 그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 인이 종로 태화관에서……”
아시다시피 읠슨의 민족자결주의란 1차 대전 승전국들이 패전국들과 그 식민지들간의 지배관계를 청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나온 것으로서 1 차 대전 승전국이자 파리강화회의의 주요멤버이기도 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 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유학생들이 윌슨 선언의 의미를 오해하고 영향을 잠시 받았을 수는 있지만 역사기술을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될 것 입니다.
태화관이라는 식당에 모여서 함께 식사를 했다는 그 33 인이 어떤 사연으로 민족대표가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을 필두로 그들 대부분이 1937 년 제 2 차 중일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변절했고 1941 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고 태평양전쟁을 시작하자 본격적인 친일활동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민족대표(?)로서의 그들의 태생적 한계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흐리멍텅하기 짝이 없는 내용의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이라는 자는 1949 년 적극적 친일행각을 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도 아닌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에 체포되는 망신을 당한 것 또한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역사의식의 한계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 입니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의 옛날 역사 교과서가 33 인의 태화관 모임을 언급하면서 3.1 운동 거사를 막후에서 이벤트로 조직한 당시 신한청년당 당수 여운형 선생과 그 인맥의 활약상을 싹 빼버렸다는 것 입니다. 이는 마치 어느 사이비 기자가 “6 월항쟁의 기폭제는 당시 국민운동본부의 고문 김영삼 씨가 정동교회에 들어가려다 백골단에 저지를 당해 못 들어가고 상도동 집으로 쓸쓸히 귀가한 사건이었다”라고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역사기술 오류입니다.
6 월 항쟁의 막후에는 전국의 학생조직을 관장하는 전대협과 재야 종교단체를 망라하는 민통련이라는 양대 간선 조직이 존재했었습니다. 이 조직을 토대로 통일민주당 등 제도권 정당까지 끌어들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구성하고 이를 통해 국민항쟁의 에너지를 한 군데로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것 입니다.
3.1 운동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여운형은 상해 등지에서 활동하던 미국인과 중국인 언론계. 경제계 인사들과도 교분을 갖는 등 엄청난 인맥을 가진 마당발로 알려진 사람인데 그는 이 인맥을 활용하여 1919 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조선대표로 파견하는 공작을 벌이는 한편, 한 중국계 실업인의 도움으로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 찰스 클라인을 만나 그로부터 아주 중요한 언질을 받습니다.
여운형이 클라인을 만난 목적은 조선독립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는데, 클라인은 이를 거절하는 대신 ‘만일 조선에서 일본에 대한 항의운동 같은 게 일어난다면 그걸 빌미로 어떤 국제적인 여론이 조성될 수는 있겠다’는 일종의 힌트를 제공합니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 조직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에 조직원들을 대거 파견하는 한편 2.8 선언을 필사하여 조선에 있는 각 학교와 교회 등 종교단체에 배포하고 거사 당일 인력동원계획을 수립하는 등 아주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쓰다 보니 말이 길어졌는데 토론토 한인 사회에서 동상설립을 추진한다 하니 인물선정에 대한 기본원칙에 대해 알버타 교민들도 토론을 해 봤으면 하는 취지에서 약간의 지엽적일 수 있는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고정관념 안에서 맴도는 인물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런 기회에 좀 더 정확한 독립운동사 공부를 같이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자는 이야기지요. 학교에서 역사를 잘못 배운 40대 이후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좀 더 폭 넓은 정보를 접할 기회가 많았던 세대에 속한 분들의 의견은 어떤 것인가도 궁금하고요.
아직은 소박하지만 제가 나름대로 지지하는 인물선정의 기본원칙은 이렇습니다.
1. 한 분의 동상이 아닌 여러 분의 동상이나 조각석상으로 하되 좌-우 이념이 폭넓게 반영됐으면 합니다.
2. 해방 이후 독재정권에 봉사한 적이 없는, 그리고 한국전쟁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즉 진보 보수 양 진영이 수용할 수 있는 무난한 인물이었으면 합니다.
3. 일제강점기 중 변절 경력을 가진 분은 당연히 제외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2 항과 3 항에 해당되지는 않더라도 독립운동조직을 개인의 정치적 성취를 위한 장으로 활용한 사실이 인정되는 분들 역시 제외되어야 할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