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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국화꽃 향기, 그리고 장진영 |
작성자 내사랑아프리카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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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번호 3108 |
작성일 2010-09-15 19:52 |
조회수 22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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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 향기", 저는 이 영화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여러 번 보았습니다. 영화속 주인공처럼 장진영님이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서 그런지 이 영화가 더 애틋합니다.
* 위 그림은 장진영이 주연한 영화 "국화꽃 향기"의 화면캡쳐입니다. 박해일의 얼굴이 보이고 그 얼굴 아래 왼쪽에 법정 스님의 책 [山房閑談] (산방한담)이 보입니다. 재밌죠? 우연이 아니라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배열한 것이겠죠?
올해는 여름을 느낄 틈도 없이 늦가을에 이른 것같군요. 그래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상들을 해 보았습니다. 아래 노래의 화면은 국화꽃 향기의 주인공들인 장진영과 박해일의 화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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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과 무소유
우리나라 불교 스님 중에서 무소유라는 “화두”처럼 살다가신 분이 법정 스님이시라면 토를 다실 분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화두란 전 존재를 걸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스승인 조사 (祖師)가 제자에게 주는 자기만의 실존적 물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의 선사들은 제자에게 화두를 주고, 그 화두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제자에게 법통을 주는데 이렇게 해서 법맥이 계승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엔 아무런 연고나 배경도 없는 제자가 법맥을 이어받아 다른 제자들의 질시를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법정 스님은 전남대 상대 재학 중이던 1954년 입산 출가를 하는데, 서울의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스님(1888-1966) 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습니다. 법정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습니다.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습니다.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온 법정스님은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오래 동안 혼자 지내시다가 올해 입적하셨습니다.
법정 스님이 출가를 했을 때, 무슨 화두를 받으셨는지 모르지만, 그 분이 남긴 유명한 책 제목이 “무소유”였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그 철칙을 지키면서 사신 분이었으니까, 이것은 법정 스님의 평생의 화두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소유의 본질은 집착인데, 이런 집착이 강할수록 인간은 불행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회심리학자 Erich Fromme의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도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짐으로써 진정으로 “있슴”이라는 존재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찌의 전체주의나 무소유를 강조한 공산주의나 소유의 피폐함을 보여줄 현재의 한국의 4대강 개발로 이른바 삽질하는 한국 정부도 지나친 소유욕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불교의 세가지 보배를 불법승 (佛法僧)이라고 하는데, 불이란 깨달음의 궁극이요, 법은 가르침이며, 승 (상가)은 이러한 깨달음의 궁극에 이루기 위해 정진하는 승가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이 승가 공동체는 세속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출가한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무소유의 이상을 꿈꾸는 곳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모인 곳은 먹고 힘의 사용과 살아야 하는 현실에 직면한다는 사실은 새로운 소유를 지향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소유는 결국 우리가 갖는 집착 때문에 일어납니다. 어쩌면 법정 스님은 우리가 집착을 끊지 못하는 그 뿌리가 소유에 있다는 것을 너무나 깊이 간파해서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소유하려 합니다. 물질적 소유는 기쁨을 주며, 우리 삶에 안정을 준다고 믿게 합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면, 다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프롬의 말처럼 “소유” (to have)가 존재 (to be; 있슴)를 압도하면, 우리는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소유를 통한 행복은 빼앗아야 얻어지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의 것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빼앗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면 최소한의 평화는 유지될 뿐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불행하게 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법정 스님의 말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낡은 탈로부터, 낡은 울타리로부터,
낡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다 나눌 것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그리고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서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청빈의 덕이다.”
이 소유욕이 법정 스님 말씀처럼, 물질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종교심 (宗敎心)도 그것이 영성이건 종교성이건 지나친 소유욕으로 가득 차면, 종교심은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화꽃 향기"의 주인공은 뱃속의 아기를 위해서 치료를 거부하다가, 아기를 낳고 끝내는 세상을 떠납니다. 아기는 그녀가 남길 수 있는 최상의 사랑의 결실이자 마지막 삶의 끈이기도 하였습니다. 사랑의 희생 공양이자 무소유였던 것이죠. 고 장진영님은 이 아름다운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던 국화꽃 향기의 기억을 남기고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늘한 바람 속 향기. <내사랑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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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거리육점씨
| 2010-09-15 21:46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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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금 성철스님 법어집을 읽다가 문득 들어와 봤는데,
이런 좋은글을 보게 되었네요. 무소유의 삶을 살고 싶은 일인인데, 결론은 현실에선 정말 힘드네요. 항상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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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0-09-16 02:47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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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거리육점님 안녕하세요.
완성되지 않은 모자이크 조각글을 읽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법정, 장진영, 국화꽃은 어쩌면 아무런 관계가 없는 기호 또는 개체인데 연관을 가지면 예상치 않은 은유적 의미를 생산하는 것 같습니다.
아내와 함께 다시 \"국화꽃 향기\"를 보았습니다. 주인공 희재, 인하, 정란 세 인물의 캐릭터가 저는 참 좋습니다. 너무 착해요. 감독의 세심한 배려로 한국이 그립습니다. 처마 밑으로 비내리는 장면, 은행잎의 거리, 바닷가, 70년대나 80년대 초의 대학생들의 농활, 헌책방, 써클 활동. 이야기의 곳곳은 우리의 일상 삶에서 엮어 나갈 수 있는 그런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캐나다를 사랑하려면 캘거리 거리나 로키의 곳곳에 담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경험해야 될 것처럼, 역사, 기억, 사랑, 그리고 이야기로 엮어진 삶의 이야기. 그런 것을 느끼게 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고 장진영님의 죽음처럼 안타깝기도 하고, 또 그 절절한 안따까움 땜에 다시 보게 됩니다. 이 슬픈 수채화 속에 따뜻한 인간 윤리가 담겨 있습니다. 국화꽃은 삶을 열심히 살고, 사랑의 이야기로 엮어져,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가을 향기를 잃지 않은 그런 사람의 몫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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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
| 2010-09-16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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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두 글 잘 읽었습니다. 덧글에 달으신 국화꽃향기얘기를 읽으니 그 영화가 보구 싶어졌습니다.
\"처마 밑으로 비내리는 장면, 은행잎의 거리, 바닷가, 70년대나 80년대 초의 대학생들의 농활, 헌책방, 써클 활동. 이야기의 곳곳...\"
그리운 과거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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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팬
| 2010-09-16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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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윤리시간에 배웠던 \"苦集滅道\"가 생각납니다.
소유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이 참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하지만, 버린다는 것이 어디 당최 쉬운 일이길 하나요? 마음만 끌탕할 뿐입니다.
잘 읽었구요, 저도 드 영화 찾아봐야겠습니다. 일찍 운명을 달리한 \'장진영\'은 제가 좋게 본 배우중의 하나였거든요.
그리운 과거의 향수도 피어납니다.
함석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 은행잎에 발목까지 빠지던 길, 매케한 냄새의
헌책방, 최루탄 냄새, 아우성, 막걸리집의 찌든 담배냄새와 신문지 발라 놓은
벽마다 칼날같이 꽂혀있던 우리의 갈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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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by
| 2010-09-16 11:52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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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7월4일생 한 장면이 생각나는군요.
론 코빅이 내 실수로 윌슨이 죽었다는 편지를 윌슨 부모에서 쓰는 장면에서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 레마르크의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자신의 실수로 죽은 전우 윌슨의 묘를 찾아가던 날도 가을이었지요.
가을은 가을입니다. 좋은 가을 보내시길...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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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0-09-16 16:50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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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이 영화보고 실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영화는 곳곳에 예측 가능한 장치를 만들어 놓았고, 세트 또한 감독의 취향을 고스란히 연상할 수 있으며, 플롯도 단순합니다. 농활을 보면 70년대 같고, 미국에서 고교과정을 공부하고 돌아온 주인공 인하를 보면 심지어 90년대를 연상하며, 역사공부 써클 활동을 보면 70-80년대가 혼성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이른바 운동가요가 전혀 없는 것을 보면, 70년대 초 같기도 하며, 역사성이 배제된 삶의 원형적 추억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영화는 유치할 수 있어 보는 사람에 따라 실망을 할 수도 있습니다. 뭐랄까, 성인들을 위한 슬프고도 행복한 동화 정도는 되겠죠. 70년대를 산 감독으로서 꼭 자기 만을 위한 동화를 한편 만들고 싶었다는 느낌입니다.
피터팬님의 말씀처럼 우리에겐 무소유란 불가능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란 노동분업처럼 영성의 분업을 정교화시킨 종교같기도 합니다. 승려들의 정진 공동체인 승가 (僧迦) 또는 상가 (saṃgha)가 바로 이러한 영성 분업의 제도화라고 말할 수 있다면요. 가톨릭 전통에서 초기 사막에서 수도를 한 은자들이나 탁발승의 모임이 발전된 프란시스칸 직제 (Franciscan Order)도 그런 분업의 일종인데 이 조직이 이단으로 몰리지 않고 가톨릭 제도 안에 영입된 것 또한 이런 영성 분업의 제도화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개신교의 경우는 제동걸리지 않은 조직같아서 영성 자본의 극대화의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합니다. 영성이라는 잉여 자본을 다시 영성 자본에 극단적으로 투자하는 대표적인 종교 집단이겠죠. ㅎㅎ 제가 개신교도이긴 하지만…그런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법정 스님이 세간 (世間)과 출세간 (出世間) 을 넘나들면서 무소유를 실천하시고, 또 이 책이 절판을 유언으로 남기신 것은 바로 영성의 자본화를 우려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말한 영성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인 추구를 광의의 뜻이고 구태여 종교성을 지시할 필요는 없는 개념입니다.
7월 4일생은 DVD가 있는데 다시 봐야겠군요. 참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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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s
| 2010-09-16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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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아프리카 님 께 감사 드립니다, 나 는 \" 국화꽃 향기\" 라는 영화 가 있는지도 지금 까지 몰랐거든요. 그 내용이 위 에서 설명 하신 대로 라 면 저의 오래된 옛 친구 의 사연과 너무가 같군요. 여러가지 내용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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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0-09-17 11:12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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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s님 안녕하세요. 제가 영화이야기 하면 김빠지실 지 모르지만 저의 감상 후기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영화는 좀 거창하게 말하면, 사랑의 계보 (genealogy)에 대한 동화적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계보를 제 나름대로 정의해 보자면, “생물학적 전승이 아니라 바로 타자의 삶에 대한 관여 (involvement) 또는 헌신 (commitment)”입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희재와 인하가 지하철에서 만나는 첫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희재는 만삭이 된 임산부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서 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곤드레만드레 널부러져 자고 있는 술취한 건달을 일으켜 거기에 자리를 확보하는 장면으로 시작되죠. 나중에 희재의 출산과 연결되는 좋은 영화적 장치입니다. 지하철 손님들은 이 임산부의 삶에 무관심하죠. 인하는 희재의 행동에 관심을 갖게 되고, 희재가 지하철에서 내리자 따라 내리는 장면은 바로 타자의 삶의 끈이 형성되는 “인연”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두 번 째 장면은 인하가 선배의 권유로 한국 역사 알기 동아리에 참여하기 위하여 헌 책방에서 만나는 것이죠. 여기서 인하는 미국에서 자라서 한글의 어휘가 부족하고 한국 역사와 문화를 모르는 무식한 신입으로 나옵니다. 이런 무지가 만들어낸 에피소드에서 이 동아리 여자 회장인 희재는 후배 인하를 이렇게 쏘아 붙입니다.
“미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역사나 문화에 대하여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런 얘기지? 자기가 어디에 자랐건 자기 뿌리에 대한 인식이나 태도는 확실해야 되지 않은가?”
이것은 어쩌면 일종의 지식이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 타자를 아는 과정을 설명하는 장치기도 합니다. 이 똘똘한 희재는 의협심 강한 여성이지지만 여전히 아직 타자의 고통을 자기 삶의 고통으로 철저히 내화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불의의 사고로 부모와 약혼자인 선배 (인하의 선배이기도 하며 동아리를 이끌었던 정신적 지주)를 교통사고로 잃고 철저히 절망하고 망가진 후, 인하와 친구 정란의 도움으로 거듭납니다. 두 짝사랑하는 사람, 희재를 짝사랑하는 인하, 이 인하를 짝사랑하는 정란. 이 두 사람은 그 동안 먼 발치에서 희재가 정신적 충격에서 회복되기를 지켜보는 인물들이죠.
희재와 인하의 행복한 결혼 그리고 생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불임인줄 알았던 희재 는 아이를 갖지만, 그녀의 몸에 암세포가 번져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치료를 하게 되면 아기를 잃고, 치료를 하지 않으면 자기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희재는 자기의 목숨 대신 아기의 목숨을 선택합니다. 암이 몸에 번지면서 오는 고통은 사랑하는 아기를 위해 감내하며 결국 수술을 통해서 아기는 태어나고 이 탄생을 어렴풋이 보면서 희재는 마지막 숨을 거둡니다. 이제 둘만 남은 여자 아이와 인하, 그러나 둘은 행복합니다. 여전히 희재는 그 둘을 묶어 두는 사랑의 추억으로 남죠. 희재가 인하와 함께 병 요양을 하던 바닷가 집에서 두 부녀는 앉아서 희재가 딸 재인에게 남긴 동화책( 희재는 미술학도였슴)을 읽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 사랑해, 바다야 사랑해, 하늘아 사랑해, 엄마 사랑해, 아빠 사랑해.” 그리고 인하도 딸 재인에게 말합니다. “나도 우리 재인이 많이 사랑해.”
이 영화에서 인하를 짝사랑하면서도 희재와 인하가 잘되기를 바라는 같은 동아리 동료 정란입니다. 정란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자기를 절제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타자의 삶에 관여하는 바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까요? 바로 그녀는 친구 재인과 인하를 사랑하니까요. 이 영화의 후기는 바로 인하, 재인 그리고 정란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좀 성차별적인 발언을 하자면, 저는 희재같이 똘똘한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녀는 앎을 상징하지만, 그 앎이 사랑으로 연결되면 우리의 연애사에서 희재는 이상형입니다. 왜냐하면 사랑 (헌신)과 앎 (인식)은 함께 갈 때 삶은 성숙해지니까요.
이 영화 못 구하면 메일 보내 주세요. <a href=mailto:novareligio@hanmail.net.>novareligio@hanmail.net.</a>
아프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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