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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이야기
작성자 Oneness    지역 Calgary 게시물번호 3295 작성일 2010-11-09 13:47 조회수 1347
나는 2남 2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위로는 3살 많은 언니가 있고 아래로 3살 7살 어린 남동생이 있었다.

그 당시 대부분 가정이 그랬듯이 우리 집도 무척 가난하였다. 3평 남짓한 다다미 방 하나가 우리 여섯 식구가 사는 공간 이었다. 화장실과 수도는 40여 가구가 공동으로 사용했다. 40여 개의 방이 있는 일식 2층 기와집의 방한 칸이 우리 집이었다. 아니 우리 방이었다. 한방에서 우리 가족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세수를 하고 설거지를 했다.  

둘째 딸인 나는 우리 집 싸움꾼이었던 것 같다.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아이들은 싸우기 마련이고 나이 터울이 많은 언니와 남동생이 싸울리는 없고 언니와 내가 싸우거나 나랑 바로 아래 남동생이 싸우게 되니까... 막내는 너무 어려 싸울 수도 없었고.

아마 그날도 내가 형제 누군가와 싸웠던 것 같다. 화가 나신 아버지는 내게 고함을 치셨다.  

"나가 죽어버려라. 너만 이집에서 없어지면 우리 집은 조용할거다. 나가 죽어버려!"  

나는 순간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무언가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게 무슨 일인지 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여러 날이 지나서 또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날도 남동생과 싸우게 되었는데 동생이 내게 그러는 것이다.

"나가 죽어버려. 아버지가 그랬어. 누나만 나가 죽으면 우리 집이 조용하다고"




어린 시절,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가 무엇이라 생각하냐고 내게 물었다면 아마 나는 서슴없이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 지우지 못할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것 보다 더 큰 죄가 있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아이에게 그런 상처를 주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이다.  

나는 사춘기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은 슬픈 곳이다.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 아픔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산다. 나도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우리 아버지가 내게 준 그런 상처를 내 아이에게 줄 지도 모른다. 아니 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오래 살지도 않으리라. 산다는 것은 죄를 쌓는 것이다. 죄를 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찍 죽는 것이 그나마 죄를 덜 짓는 것이다.'  

내 기준에서 보면 세상에 의인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죄인이었다. 살면서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한마디도 한 적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나는 그 시절 하나님에 대해서는 상당히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십자가에 못박히면서도 그 사람들을 용서한 예수님은 좋은 분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도 내 기준에서 보면 죄인이었다. 성경 어느 구절에선가 "독사의 자식들아" 이런 말을 사람들에게 했으니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겠는가!

대학입학 후 김흥호 목사님을 통해 기독교인이 된 나는 우울함과 허무함으로 얼룩진 내 어린 시절을 끝내고 보통 사람들처럼 생활할 수 있었다.

결혼은 죄악이라던 내가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맏며느리였던 나는 시댁 식구들에게 최선을 다하였다. 아마 나는 부모님에게서 받지 못했다고 여겼던 사랑과 인정을 시부모님께 받아보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 같다.

그런 내 기대는 몇 년 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하루는 집안 일로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는데 시어머니께서 “네가 시집와서 한 게 뭐가 있냐”고 하셨다. 나는 거의 그 자리서 쓰러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하루 12시간 이상을 가게를 열어 시누이의 대학 학비를 대고 매달 용돈을 주고, 명절과 생신을 빠짐없이 챙겨 드렸는데 시집와서 지금까지 한 게 뭐가 있냐니!!!

나는 너무나 절망스럽고 억울해서 매일 울며 남편에게 하소연했다. 어떻게 내게 어머님께서 그렇게 말하실 수 있냐고. 내가 정말로 시집와서 한 게 없냐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냐고.

아무리 남편을 붙들고 따지고 하소연해봐도 내 속은 풀리지 않았고 억울함만 깊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티브이에서 엔 카운터 그룹에 대한 이야기의 끝 무렵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게 뭔지도 잘 모르면서 일단 상담이라고 하니 내 고민을 귀담아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위로해주고, 조언을 해 주리라 막연히 기대하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3박 4일 일정의 엔 카운터 그룹에 신청을 하였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12명의 나 같은 신청자를 한방에 모아놓고 감수성 훈련이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훈련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 그룹의 진행자는 각자 별칭을 지어 소개를 하게 한 뒤 "이곳에서는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느낌을 말하는 곳입니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느낌을 말해 주십시오" 그러더니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모두 나처럼 당황해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갑갑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 나는 이렇게 말을 시작하였다.

“나는 정말로 절박한 심정으로 어렵게 시간을 내어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해주는 것은 없고 느낌만 말하라고 하니 '당황'스럽고 '화'가 납니다.”
그랬더니 진행자는 “지금 일어나는 솔직한 느낌을 말해주니 참 반갑고 시원합니다”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이름도 생소한 감수성 훈련이라는 것을 본의 아니게(?) 받게 되었다. 진행자를 포함한 13명의 멤버는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빙 둘러 앉아 생각이 아닌 느낌만을 표현하면서 3박4일을 보냈다.

느낌을 일으키는 것은 생각이지만 느낌은 지금 일어나는 것이기에 그 단순한 작업은 나를 "지금"에 머무르도록 도와 주었다. 현재는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 앉혀 나는 어렴풋이나마 뭔가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이미 지난 일이고 다 잊었으며 이제는 이해하기에 용서했다고 여겼던 어린 시절 상처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상처를 내 주변 사람들에게 무차별 투사하고 있었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나를 거부하는 듯이 보이면 내 반응은 즉시 어린 시절 상처받은 아이로 돌아가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생기를 잃고 고통으로 몸부림치거나 분노하고 공격하였다. 내 몸은 여기 있어도 내 마음은 과거를 살고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시집와서 네가 한 게 무엇이냐"는 시어머니의 말도 내게는 "너는 나가 죽어야 한다. 너는 살 가치가 없다"로 들려서 그토록 괴로워했던 것이다.  

감수성 훈련 마지막 날 맴버 중 누군가 나를 거부하는 듯한 말을 했는데 나는 그 즉시 과거로 돌아가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속으로 "슬픔, 슬픔, 슬픔,,,”이라고 되뇌며 느낌이 일어나는 현재에 머물러 깨어있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슬퍼하고 있는 나 자신을 알아차리려는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는 내게 불쑥 “나는 상처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이 의식 수면에 떠 오른 것이다.  

나는 상처 받을 수 없는 존재!

소리는 없었지만 또렷하게 내 의식에 떠 오른 메시지 아니 나에 대한 기억이라 해야 할까.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순간 그 즉시 눈물이 말라버렸다. 무언가가 툭 하고 내 가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상처 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내게 상처 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내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버지를 용서할 필요조차 없었다.

내가 상처받을 수 없는 존재이니 세상 사람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상처 받을 수 없는 존재이고 내가 상처를 준 사람도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나도 죄인이 아니다.

예수님도 죄인이 아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설령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 말로 상처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예수님도 죄인이 아니다.  

상처받는 것이 불가능한데 어떻게 죄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누가 죄인일 수 있겠는가? 용서할 필요조차 없는 완전한 용서 속에서 나와 온 세상이 함께 용서 받은 것이다.  

나의 가장 아픈 상처를 통해 나는 용서를 배운 것이다.  

내가 배운 용서는 당신은 잘못했지만 그래서 나는 무척 고통을 겪었지만 (혹은 아직도 겪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을 용서한다는 세상이 가르치는 용서가 아니었다. 그 용서는 용서를 해도 가슴 한편이 먹먹하고 힘겨운 용서였다.

하지만 내가 배운 용서는 그게 아니었다. 나는 상처 받을 수 없기에 아버지를 용서할 필요 조차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나까지도 아무 죄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죄가 없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용서를 체험 속에서 배웠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인간은 상처받는 존재라고 다들 생각하는데 상처 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며 용서하라면 누가 그 말을 듣겠는가?

그랬기에 책에서 이 시를 읽게 되었을 때 내 감동은 경이 그 자체였다.   내가 배운 용서에 대해 쓴 책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용서는 모든 것을 준다  


용서해달라고 청하지 말라.

그것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 보다 용서해주는 법을 배우게 해달라고 청하라.


세상을 용서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이

끝이 있을 수 없음과,

그리고 그분이 창조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실재가 아님을

너는 알게 되리라.

바로 이 한 문장 속에

우리의 전 과정이 설명되고 있다.


네가 원하는 그 무엇인들

용서가 해줄 수 없겠는가?

평화를 원하는가?

용서가 그것을 준다.

행복과, 고요한 마음과, 목적의 확실함,

그리고 세상을 초월하는

가치와 아름다움의 감각을 원하는가?

보살핌과 안전함,

그리고 늘 확고한 보호와 그 따뜻함을 원하는가?

흐트러지지 않는 고요,

결코 상처받을 수 없는 부드러움,

깊고도 변함없는 위안,

그리고 너무도 완벽하여 절대로 동요될 수 없는

안식을 원하는가?

용서는 이 모든 것을 네게 베푼다.


평화를 원한다면

오직 완전한 용서로만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정작 용서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는,

바로 그 완전한 용서 안에서

너는 완전히 사면된다.


실재의 세계는 단지

묵은 것에 대한 완전한 용서에 의해 이룩된다.


과거를 용서하고 놓아주어라.

과거란 곧 가버린 것이기에.


두 눈을 들어,

서로의 환상에 대한 완전한 용서에서 태어나는

순결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라.


네가 용서하지 않은 이들을 너는 두려워한다.

그리고 두려움을 곁에 두고는

아무도 사랑에 이르지 못한다.


용서는 언제나

용서를 해주는 사람에 달려 있다.


용서는

네 형제와 너 자신 사이에 버티고 있는 것을 치워준다.

용서는 곧 네가 그와 함께 하며

떨어지지 않고자 하는 바램이다.


어떠한 종류의 공격에도

그에 대한 응답은 용서이다.

그리하여 공격은 그 효력을 상실하고,

미움은 사랑의 이름으로 보답받는다.


네가 용서하는 사람에게는

너의 환상에 대해

너 자신을 용서하는 힘이 주어진다.

네가 주는 자유라는 선물에 의해

바로 너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너는 줌으로써 받게 될 것이다.


줌과 받음은 같은 것이다.


너 자신에 대한 환상과

이 세상에 대한 환상은 하나이다.

모든 용서는 곧

너 자신을 위한 선물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용서는 이 세상의 크나큰 요구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 세상이 환상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용서하는 사람은

자신을 환상에서 해방시키는 반면,

용서를 억누르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것이다.


용서를 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비판을 일삼는다.

왜냐하면 용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정당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용서하는 사람은 반드시

진리를 정확히 있는 그대로

반갑게 맞이할 줄 알게 된다.


용서는 행복으로 가는 열쇠이다.

평화를 추구하기 위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듯한 세상에서

의미를 찾게 하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호시탐탐 너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고,

고요와 평화를 찾고자 하는 네 희망에

불신을 가져다주는, 그 확연한 위험 속에서도

안전으로 가는 길이 여기에  있다.

모든 물음들의 해답이 여기에 있다.

여기서 모든 불신의 끝이 마침내 보장되는 것이다.




                                  나는 세상 모든 것들에게 용서를 보냅니다.
                                  그리하여 내게도
                                  용서가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선물 중에서>

영혼의 선물은 절판되어 구입할 수는 없지만http://cafe.naver.com/acimkorea 의 묵상집에 전체가 올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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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poirier  |  2010-11-11 09:24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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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ness님! 본인의 아픔과 깊은 이야기를 함께 공유해 주신 용기에 감사드립니다.좋은 싸이트 알게 된것도 좋구요. 마음속에 맺히는것도 풀어야하는것도 결국은 나자신임을 또 명심하게 되네요. 언제나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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