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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
| 2010-11-14 21:32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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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라의 언어는 어땠는지 알려진것이 있나요? 서로 소통이 가능한 사투리수준이었는지 상당히 다른 언어였는지가 (예전부터) 궁금했었습니다.
예전에 Jared Diamond라는 분이 쓴 글이 생각이 나는데 (기억에 의한거라 매우 약간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분석에 따르면 현대일본인의 대부분은 2500년전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토착인들을 정복해서 mainstream이 되었다는 가설을 지지한다고 썼습니다.
이게 맞다면 의문점중에 하나가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가 왜 그렇게 다르냐는것이었다고 합니다. 즉 두언어의 차이는 2500년에 기대할 수 있는 차이보다 훨씬 다르다는 것이지요.
다이아몬드의 설명에 따르면, 정복자들은 고구려지역사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언어를 가지고 일본섬으로 이주 (정복) 하였고, 현대 한국어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서 주로 통용되는 언어가 지배어가 되었다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이 사람에 의하면 고구려지역언어와 신라언어가 그전에도 상당히 달랐었을 수 있음을 나타내는것이라 저도 예전에 읽으면서 \"아 그런건가?\"라고 의아해 했던적이 있었거든요... 예전에 읽은거라 얼마나 받아들여지는 얘기인지는 모르겠는데 한번 구글해 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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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
| 2010-11-14 21:34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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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www2.gol.com/users/hsmr/Content/East%20Asia/Japan/History/roots.html
target=_blank>http://www2.gol.com/users/hsmr/Content/East%20Asia/Japan/History/roots.html
</a>
jared Diamond 글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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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0-11-14 21:48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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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비님께서 사용하시는 자료는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는 일단 삼국을 통일했다는 통일신라나 고려 왕조의 이념이 이들 책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은 무시할 수는 없을 것같군요.
저는 박노자 교수가 러시아계라서 이른바 한국에서 횡횡하는 민족주의 이념에서 좀 자유롭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분이 용기있게 자기 주장을 해서 앞으로 논쟁에 불을 잘 지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신학자들이 주장하기를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 오기 전에 \"하늘님\" 또는 \"하느님\"이라는 유일신적 관념이 있어서 전통적인 한국인의 신관과 기독교적 신관이 선택적 친화성이 있다고들 주장했었습니다. 여기에 반기를 든 한국학 학자가 있는데 UBC의 Don Baker라는 분입니다. 이 분에 따르면 한국엔 그런 유일신적 관념이 기독교가 들어 오기 전에 없었고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현대 학자들의 invention이라고 주장했었습니다. 저는 이 분의 글을 읽기 전에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적극적으로 나가지 못했었습니다. 그냥 종교학에서 말하는 개념, 즉 사라진 신 (Deus Otiosus; \"idle god\" )의 개념을 이용해서 한국인의 종교관을 설명하려 했었습니다. 즉 이 게으른 신의 맥락에서 보면, 한국의 신관념은 애초에 유일신관념이 아니었습니다. 즉 하느님이라는 게으른 초월자가 천상에 존재하고 더 이상 일상에는 관여하지 않고 다른 다신적 관념과 위계적으로 상존했는데, 기독교인들이 이 하느님 관념을 전유 (appropriation)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위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는\"는 바로 기독교적 전유 또는 invention의 결과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다시 민족의 개념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현재 통합적으로 생각하는 한민족 단일민족 개념이 고대 삼국시대는 매우 희박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데, 역사학자들의 논쟁이 더 진척되면 무언가 결과물이 나올 것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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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0-11-14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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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한국, 일본이 우랄 알타이 족 중에서 몽골 어족에 속한다는 것은 서로가 언어적으로 심지어는 몽골반점처럼 신체상 유사점이 많지만, 당시의 관점은 여러 몽골어족이 부족의 형태로 흩어져 있었고, 고구려 때 비로서 국가적 개념이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박노자의 책을 안봐서 모르겠지만, 삼국도 개별 부족이 통합된 것이 아닐까요? 백제에 고구려 유민이 많이 내려 왔어도 말씀입니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일본과 한반도인들의 문화적 친화성이랄까 동질성이랄까 하는 정도 (degree)가 낮게 나온 것은 왜일까요? 저는 이것이 좀 궁금합니다.
유대인이 흩어짐 (diaspora)를 경험했지만 자기 정체성을 유지해 온 것은 유대교 자체의 역량이랄 수 있지만,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화되면서 철저한 유대인 차별과 박해, 그리고 게토화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론 18세기가 되도록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대학에 입학을 못했습니다. 대학에 입학이 허용되면서 유대인들의 자기 정체성은 많이 약화되고 그 때 기독교로 많이 개종했다고 하더군요. 음악가 집안 멘델스존도 그렇구요. 한편으로는 이런 지적인 풍토에서 시온주의 운동이 확산대 현재의 이스라엘이 탄생된 기반을 닦아 놓기도 했다죠. 아마.
한민족 개념은 우리 고려인 유민사를 살펴보면 실마리를 얻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뭘 모르고 횡설수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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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by님의 의문점을 제가 속시원하게 설명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박노자의 거꾸로 고대사는 한겨레신문에 연제되었던 글인데 읽은지가 오래되고 분량도 많아서 제 기억도 가물하구여..삼국의 민족공동체 의식 결여는 당시 삼국분열이 7세기까지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상식선에서 이해가 되죠. 박노자교수도 이점을 지적했구요. 700년이라는 시간을 떨어져서 보냈다면 과연 어떤 동질감을 어떻게 느낄 수 있었을까? 민족적 동질감? 어려운 이야기에요. 하지만 고대 중국인들은 우리 삼국을 동류로 취급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과는 확연하게 차이나는 문화적 일관성과 언어적인 일치감이 삼국들간에 존재 했었기 때문이라고 박노자 교수는 설명을 합니다.
또 한가지..백제와 고구려는 같은 근원이다라는 고대기록은 단지 집권층 족보타령으로만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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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0-11-15 00:28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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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01112154726&Section=04
target=_blank>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01112154726&Section=04
</a>
박노자링크가 깨져서 다시 올립니다.
저는 고대사 문제는 고대사 역사학자들에게 맡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고대사 문제가 현재 우리의 국가주의 의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논란이 될 것이며, 또 논의를 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저의 생각은 국가라는 개념과 민족이라는 개념이 상호 보완적으로 쓰이고 의식하게 된 것은 한국의 경우 일제 강점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병자호란 같은 청의 침략을 당했을지라도 조선인의 정치가들은 여전히 소중화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망한 명나라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었습니다. 민족과 국가 문제를 독립적으로 생각할 여유가 없었겠죠. 일본의 경우는 메이지 유신을 정점으로 민족이 국가주의와 동일시되었고, 이에 대한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신토 (신도)가 큰 역할을 했구요. 서구의 경우는 근대 국가의 탄생은 신구교 전쟁의 30년 전쟁 이후 국가 의식이 싹텄을 것입니다. 라틴어 중심의 언어 구조에서 성서번역을 통해서 각 국가의 자국어사용의 대중화 (vernacularization)를 촉발시켰는데, 이 때 부터 국가주의에 근거한 민족의 개념이 확립됩니다. 구텐버그의 인쇄술은 새로운 국가주의의 탄생에 기름을 부은 격이지요.
저는 박노자의 인터뷰에 근거하지만, 필비님 말씀대로 삼국시대에 삼국인의 문화적 언어적 동질성은 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현대적으로 이해하는 그런 국가주의에 근거한 민족의 개념은 매우 희박했을 것이라는 가설인데, 요즘 대하드라마에서 지나치게 국가주의에 근거해서 과거를 이상화한다는 문제 의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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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by
| 2010-11-15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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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입니다. 일 시작하기 전에 커피 한 잔 하면서^^**.
박노자 교수 글을 한겨레에서 몇 번 읽은 적 있습니다. 전부를 읽지는 못했구요. 그 분이 쓴 발해에 관한 부분하고 조선시대 실학자 유득공의 발해고 하고 비교해 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실학자들은 발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
박노자 교수는 발해에 관해 최치원의 견해를 많이 인용했던데 최치원은 당나라 유학생이고 황소의 난 때 격문도 쓴 친당파 학자입니다. 발해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당나라의 유학생인 친당파가 발해의 정체성애 대해 정당하고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그건 그렇고 토마님 글 로나마 자주 만나서 반갑고 아프리카님 반갑습니다. 캘거리에서 교회 다니고 싶다는 사람 있으면 아프리카님 교회 다니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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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by
| 2010-11-15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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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개념의 민족국가주의 의식이 고대인들에게 없었던 것은 거의 확실하겠지요. 그러나 민족이란 일정한 지역에서 언어적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해온 집단이라 정의한다면 삼국시대 고대인들에게 동질성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김치의 예를 들수 있겠는데 우리가 김치를 먹은게 약 3,000년 전으로 추정합니다. 유적과 기록이 말 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김치는 3,000년전 김치보다 무지하게 upgrade되었지만. 추운 만주지방에서 겨울에 야채먹는 법을 궁리하다 김치를 만들게 되었는데 삼국이 정립된 후에도 김치는 다들 먹었거든요. 3국이 정치적으로 대립만 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교류도 많이 했다는 것도 인정을 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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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0-11-1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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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피언즈님과 필비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이러나 저러나 한국 고대사 부분에 대한 연구 지원이 이뤄져야 하는데 별로 없는 것같습니다.
인문학하면 취직하기 힘들고 먹고 살기 힘들어서 제대로 연구를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알기론 한국 현대사만 해도 영문으로 된 한국사는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은 엄청 덜떨어지게 레이아웃되어서 나왔고, 브루스 커밍스와 몇몇 책들인데 분량으로 보면 일천하고, 고대사 쪽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신간나오면 보고 싶은 것이 많은데 쉽게 구해볼 수가 없어서 아쉬운 점이 많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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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
| 2010-11-15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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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두 필비님 역사연재 재밌게 보구 있습니다. 그러니까 삼국은 언어적으로는 동질한 한울타리였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은건가요? 저두 사실 그렇게 생각을 해 왔는데... Jared Diamond 가 저를 헷갈리게 했군요 ㅋㅋ
모두들 좋은 하루 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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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칸컵
| 2010-11-15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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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요\'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백제왕자와 신라공주 이야기였던가요?
토마님 말씀대로 서동요로 당대를 추정해보면 \"언어적으로 동질한 한울타리\"라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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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치독
| 2010-11-15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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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박노자 교수가 쓴 당신들의 대한민국 1,2권을 흥미있게 읽어본 기억이 납니다. 그 후로 한국 지하철에서 우연히 박 교수와 짧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한국사람보다 한국말을 그렇게 조리있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촘스키 교수를 연상 시킬 정도로 한국에 대해 박학다식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단군건국 신화에 대해서는 저도 몇 년 전까지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었습니다. 신화라는 단어가 myth를 뜻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성인이 되어서도 역사적 사실과 신화를 구분하지 못 했던 제 모습을 보면서, 그런 걸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 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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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0-11-15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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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칸컵님의 코멘트는 어쩌면 영국식으로 brilliant하십니다. 서동요의 출처가 뭔지더 알아 봐야할 것같습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서동요의 출전이 삼국유사로 되어 있어서 여전히 문제시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신화적 진술인 성서를 역사적 문서로 보고 규명하려는 기독교인들이나 단군신화를 역사서로 보고 한국 민족의 역사가 기원전 수천전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는 부류의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나질 않군요. 제가 캘거리 공공도서관에서 1불로 산 한국책, discarded 된 것인데 제목이 [바로보는 우리 역사: 대륙에서 8600년 반도에서 600년]입니다. 좀 황당한 제목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조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찾으려고 한 노력은 제법 있었습니다. 이 단군론의 재구성에 대한 책과 논문이 한국에 제법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신화가 완전히 허구라거나 비역사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일리아드 오딧세이에 근거해서 고고학적 발굴도 했으니까요. 트로이의 실재를 밝혔다고 하질 않습니까? 와치독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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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0-11-15 19:39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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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속에서의 단군론에 대한 써베이는 연구자들의 논문 모음집인 세계역사문화연구소 편 [한국사의 단군인식과 단군운동]을 참고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 집에 있군요.
윤이흠 편 [단군 그 이해와 자료] (2001년 간행)는 여러 1-2차 자료를 모아 놓은 두꺼운 책인데, 한국에 두고 왔군요. 저도 이 책 색인작업 할 때, 논문 몇 편을 색인작업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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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by
| 2010-11-15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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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출토 되는 유물중에 석기시대 유물이 있으니까 석기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이야기인데 과연 우리의 직접 조상일까? 흥미롭습니다. 석기시대 사람들은 paleo-siberian(구 시베리아인)으로 명명하더군요.
단군은 청동기시대 인물이니까 우세한 문물로 석기시대 선주민들을 복속시켰겟지요.그 당시에야 부락 수준의 집합체였겠지만요. Neo-Siberian에 속하는 알타이어족의 일부가 빙하가 녹으면서 남하하는 과정에서 청동기 문화를 경험하고. 일부는 정착하고 일부는 남하하면서 한반도로 들어왔으리라 추정합니다.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것은 터키, 몽고, 퉁구스족 계열인데 퉁구스 족은 여진족, 거란족등등 역사속의 종족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만주일대에 퉁구스어 방언을 쓰는 게 10만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한국어는 북방계 부여계언어 와 남방계 한계언어가 융합되었다는 가설이 있는데 퉁구스어와 비교해 한가지 특이한 점은 경어가 발달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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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님,
소중화론을 명나라에 대한 향수정도로 제한된 해석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소중화론이란 이제 명이 없어졌기에 마지막 남은 우리 조선이 참된 유학을 실행하며 군자의 도리를 실천하는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소중화론이 당시 조선 엘리트층의 전반적인 사상적 경향이라고 단정도 못하는데요. 단지 집권여당인 서인들의 강한 정치관이였구요. 이는 북벌에 대한 목표에 있어서 북벌주체 효종과 서인 총수 송시열의 차이점 이기도 했습니다. 효종의 북벌 목적이 개인적 국가적 치욕을 갚기위한 이해관계였다면 송시열의 북벌이란 군비증강으로 힘의 과시를 통한 만주족들에 대한 정신적인 승리(소중화임을 과시하자)였을 뿐이죠. 두 사람은 견해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효종의 죽음으로 북벌은 무산됩니다. 소중화(정신적승리)이건 북벌(물리적 복수)이건 핵심은 당시 지도층의 외세에 대한 대응 자세입니다. 외부세력이 압박을 가하면서 생기는 집단적 반발. 이것이 제가 배운바로는 민족주의의 탄생시점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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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by
| 2010-11-16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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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화사상은 조선시대 지배층의 일관적 사상이 아니였을까요? 조선의 외교의 기본인 사대교린정책이 소중화사상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명에 대해 제후국을 자처하고 책봉을 받고.
광해군때 잠깐 집권했던 북인의 몰락도 소중화사상과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북인 출신들이 임진왜란 때에 의병활동도 많이 했고 해서 광해군때 집권을 했지만 인목대비 폐비 와 청과의 등거리 외교가 실각의 이유로 작용합니다. 성리학이 조선의 통치철학인데 강상과 명분의 나라에서 인목대비의 폐모와 재조지은의 나라 명과 오랑캐나라 청 과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한다는 것을 조선 지배층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요.
물론 명이 망한 후 명을 대신해 성리학을 실현해 주나라 이래의 이상세계를 건설해야 한다는 조선 지배층의 사상으로 소중화사상이 진일보 했읍니다만.
한족 중심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대명천지라는 말, 돌아가신 할머니 어머니도 걸핏하면 \"대명천지에... \"라고 말씀 하신게 기억나는데... 참 뿌리깊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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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0-11-16 10:41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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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지배담론으로 된 것은 신유학으로 대변되는 성리학이었습니다.
진정한 민족주의의 시발은 동학혁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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