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 년 8 월 어느 날, 인민군 제 5 사단은 포항으로 진군했다. 김석원 준장이 지휘하는 한국군 제 3 사단은 경주 쪽으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포항과 경주 사이 국도는 대구-부산 쪽으로 피난하려는 군인가족, 경찰가족, 우익인사들과 일부 주민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피난민 대부분은 노인, 여자, 아이들로 구성돼 있었다. 피난민들 머리 위로 갑자기 미군 전투기들이 나타났다. 이 그라만 전투기들은 햇살이 반사된 은빛 날개를 눈 부시게 번쩍이며 하강하기 시작했다. 굉음을 내며 바퀴가 보일 정도로 고도를 낮춘 채 지상을 향해 돌진하는 전투기들을 본 피난민들은 혼비백산했다. 그들은 왜 저 비행기들이 자기들을 향해 그처럼 낮은 고도로 날아오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였다. 전투기 날개에 장착된 총구에서 일제히 불울 뿜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기관포탄을 맞은 피난민들은 피를 뿜으며 길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열 두 살쯤 된 남루한 옷차림의 그 소녀는 서 너 살쯤 된 남동생을 등에 업고 있었다. 전투기들의 공중사격이 시작되자 반쯤 혼이 나간 상태로 울 수 조차 없었던 그 소녀는 남동생을 업은 채 무조건 뛰기 시작했다. 뛰어가고 있는 소녀의 등 뒤에 전투기 한 대가 나타났다. 순간 소녀의 등에 업혀있던 네 살 박이 소년의 등에서 ‘퍽’ 소리와 동시에 분수 같은 피가 솟아 올랐다. 누나와 남동생은 그 자리에서 따로 떨어져 논두렁에 나 뒹굴었다. 미군 전투기에서 발사된 기관총탄은 남동생의 등과 배를 관통해서 누나의 몸 속에 박혔다. 남동생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열 두 살짜리 누나는 형언조차 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서서히 죽어갔다. 미군 그라만 전투기 편대는 포항 경주 가도를 순식간에 피바다로 만들고 난 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유유히 동남쪽하늘로 사라졌다. 전투기 편대가 사라 진 뒤 피로 개울을 이루고 있는 논두렁 한 켠에서 꾀죄죄한 몰골의 소년 하나가 흙더미 속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찰과상으로 팔뚝에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크게 부상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열 살쯤 되 보이는 눈이 작은 그 소년은 논두렁에 널브러져 있는 남매 쪽으로 다가가더니 피투성이가 된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소녀를 흔들어댔다. 소녀의 반응이 없자 눈이 작은 그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누~나 하고 소리를 지르며 비통하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 그 날 누~나를 부르며 울음을 터뜨렸던 눈이 작은 소년은 현재 대한민국 제 17 대 대통령이 됐다. 이 눈이 작은 소년은 나중에 자서전에다가 1950 년 8 월 어느 날 겪었던 이 비극적인 가족사를 “누나와 남동생이 피난길에 미군 폭격으로 죽었다” 는 딱 한 줄 문장으로 남겨 놓았다. sarnia 는 몇 년 전 그 자서전 ‘신화는 없다’ 를 다 읽었으면서도 자서전 주인공의 누나와 남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그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 비극적이고 중요한 가족사를 얼마나 흐리멍텅한 한 줄 문장으로 얼버무려 놓았으면 기억력 좋기로 유명한 sarnia 가 다 기억을 할 수가 없었을까? 점선 위에 저 스토리는 오늘 sarnia 가 그 눈이 작은 소년이 자기 자서전에 딱 한 줄로 남겨놓은 그 상황을 스물 네 줄짜리 이야기로 재구성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sarnia 가 소설을 썼다고 타박하지는 말기 바란다. 중요한 건 그 소년의 누나와 남동생이 미군 전투기의 무차별 공중사격으로 죽었다는 사실이니까…… 문서상으로 밝혀진 기록에 의하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지역에서 벌어진 미군 공중전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은 1950 년 8 월 14 일 경주 강동면 인계리에서 미공군 제 18 폭격단 제 39 폭격편대에 의해 감행된 50 구경 기총소사 및 네이팜탄 공격 사건인데, 이 사건과 관계가 있는지 여부를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 사건의 피해 신청인 명단에 그들이 없기 때문이다. 현직 대한민국 대통령의 누나와 남동생이 언제 어디서 미군 어느 폭격편대의 공격에 의해 희생됐다는 정보가 없는 건지 알면서도 발표를 못 하거나 안 하는 건지 그것도 확실치가 않다. 지난 해 12 월 말 그 임무를 종료한 청와대 직속 ‘과거사위원회’ 가 최종 발표한 미군 전투기 등 공중전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통계에 의하더라도 피 학살자 중 여성이 44.4 퍼센트 어린이와 노인이 각각 약 20 퍼센트에 달한다. 물론 이 통계는 비교적 공중폭격이 덜했던 남한지역만을 대상으로, 그것도 자료 회람이 가능한 141 건에 대한 근거 자료만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다. 무차별 공중폭격은 대부분 북한 지역에서 이루어졌고 평양을 비롯한 인구밀집지역에서 대대적으로 감행됐다. 미군의 민간인 사살은 고의적인 작전 개념으로 시행된 것임이 미군 제 10 군단 사령관 아몬드가 유엔군 사령관 릿지웨이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작전 건의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장군! 우리는 게릴라들과 모든 수단을 다 해서 싸워야 합니다. 네이팜탄으로 공중폭격하는 것은 게릴라들을 죽일 뿐 아니라 그들이 숨을 수 있는 마을까지도 없애버릴 수 있기 때문에 아주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Almond to Ridgway 1950. 1. 16 USAMHI Ridgway paper Box 17, 도진순 씨의 논문 ‘공중폭격과 민간인 희생’ 역사학의 시선으로 보는 한국전쟁 pp 334 에서 재인용 요약) 한마디로 유격대 (아몬드는 북한 정규군까지 게릴라로 표현하고 있다) 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 보급기지나 은신처가 될 수 있는 민간인 마을까지 소각 멸절시켜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미군 제 10 군단의 작전지역은 남한 지역이었다. 이 건의서를 작성할 당시 아군 지역이었던 남한 지역에 대한 작전 건의가 이 정도였으니 적 점령지역인 북한 지역에서의 공중폭격 개념은 어느 정도로 무차별적이고 비인도적일 수 있었는지 짐작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밀문서들이 속속 보안 해제되고 한국전쟁에 대해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하나 둘씩 폭로될수록 대한민국과 (특히) 북한은 앞으로 미국에게 돌려 받아야 할 빚이 참으로 많아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예감할 수 있다. 나는 저 눈이 작은 소년의 누나와 남동생의 원혼을 달래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