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탄자국이 남아 있는 당시 주재소.
순금으로 만들어 북한에 선물한 동아일보 호외.
1931년 9월18일 만철 폭파사건을 조작해 전쟁 명분을 만든 일본 군부는 관동군에게 만주 점령을 명령했다. 만주를 중국 진출 발판으로 삼기 위한 사전공작이었다. 관동군 참모 아타가키 주도로 만철을 폭파 한 후 장학량 군대 소행으로 몰아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5개월만에 만주일대를 석권한 일제는 만주에 꼭두각시 정권을 세워 만주를 실질 지배하였다. 일제의 만주 석권은 국내, 외 민족해방운동 세력에 막대한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욱일승천 하는 일제의 기세에 민족독립의 꿈을 사라진 것일까?
민족주의 독립단체들은 민족해방의 꿈을 잃고 망연자실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 하던 민족주의 계열 독립단체는 일제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중국관내로 이동하였다. 무력항쟁의 길이 막힌 것이다.
공산주의 계열 민족해방 단체는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는데 중국공산당은 조선인 당원들이 독립운동 하는 것을 금지했다. 혁명역량이 분산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국내 민족주의들이 이때부터 친일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희망을 잃으면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1937년 5월, 일제에 6번 체포돼 6번 탈출했다는 신화적 인물 이재유가 체포되었다. 이재유의 체포는 좌절하는 조선 민중을 완전히 패배의식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젠 안 된다. 끝났다. 독립은 물 건너 갔다.”
민중이 절망과 패배의식에 빠져 있을 때 보천보 전투가 일어났다. 그러나 군사적 성과로 본다면 보천보 전투는 전투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다. 보천보에 일본군이 주둔해 있던 것도 아니고 주재소에 경찰 6-7명이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경찰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전근 가는 소장 환송연 하느라 모두 술에 취해 있었다.
아무리 일제가 천하무적이라지만 술 취한 경찰 6-7명을 중무장한 청년 100여명이 제압하지 못한다면 말이 되는 소린가? 보천보 전투에서 죽은 일본 경찰은 한 명도 없다. 민간인 2명 죽었는데 술 취한 민간인이 총소리 듣고 웬일인가 하고 나왔다 유탄에 맞아 죽고, 아이 업은 일본여자가 총소리에 놀라 머리를 박고 숨었는데 유탄이 날라와 아이에게 맞아 아이가 죽었다.
군사적 성과로 본다면 일본 경찰대를 궤멸 시킨 구시산 전투나 일본군 74연대에 대승을 거둔 간삼봉 전투가 훨씬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볼 때 아무것도 아닌 보천보 전투는 26세 청년 김일성을 아주 대단한 독립투사요 영웅으로 만들었다.
김일성이 바란 것은 민중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고 일제가 아무리 강해도 칼로 치면 두 동강 나고 불 지르면 탈 수밖에 없는 존재란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부하들에게 ‘군대가 싸움을 잘하면 민중이 배짱이 커진다’ ‘국내에 들어가 총 몇 방만 뚱당거려도 대중의 활동이 훨씬 수월해진다’고 말했다.
마적수준의 비정규군인 유격대가 최정예 관동군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해 독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란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억눌린 민중이 일제의 탄압을 벗어나 독립하는 길은 민족이 하나로 뭉쳐 항일투쟁을 벌여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절망과 패배의식에 빠져있는 민중에게 김일성은 희망을 주고 ‘우리는 죽지 않았다. 우리도 독립할 수 있다’라는 기대감을 민중에게 주고 싶었다.
고향이 보천보 근처인 최익환 박사는 보천보 전투 후 아이들 노는 것이 달라졌다고 회고했다. 아이들이 편갈라 병정놀이 할 때 가위 바위 보 해서 이긴 편이 일본군 하고 진 편이 독립군 했는데 보천보 전투 후 이긴 편이 독립군 하고 진 편이 일본군 하게 되었다 한다.
보통 때는 함경도 산림주사와 간수들이 극성스럽게 산으로 돌아다니며 화전민을 괴롭혔으나 보천보 전투 이후에는 산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아 그 해에는 화전민들이 수월하게 화전을 개간 했다고 한다.
보천보 전투를 전국에 알린 것은 동이일보였다. 손기정 선수 일장기 사건으로 무기정간 되었다 보천보 전투 3일전에 복간된 동아일보는 신이 나서 두 차례에 걸쳐 보천보 전투를 기사화했다. 표현은 공비, 마적들의 살인, 방화, 약탈이었지만 아무리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 듣는 게 우리 민족의 센스 아닌가?
동아일보를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진 보천보 전투는 암울하고 숨통 막히는 우리 민족에게 한줄기 빛이 되었다. 동아일보는 1998년 10월 김병관 사장이 방북 했을 때 보천보 전투를 알린 동아일보 호외를 순금으로 찍어 북한에 선물했다.